제513화: 손님(1)
그날 밤 모스크바 발로 전 세계를 경악케 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동하던 러시아 최대 마피아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의 보스 세르게이 미하일로프가 자신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호원 수십 명도 같이 사망했으며 그중 일부는 불에 타버려 신원을 파악하는데 몇 개월, 심지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러시아 경찰은 강력한 라이벌 세력인 포돌스카야 브라트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중에 있으나 아직 중요한 단서를 확보하거나 의미 있는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에서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이 범죄산업이다.
수십 개의 갱단이 출현했고 조직화 되더니 어느 한순간 권력과 손을 잡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였다.
크렘린을 배경 삼아 독주하다시피 길거리 이권을 독차지하던 그들이 이제는 전 세계를 상대로 마약을 수출하고 거대 기업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알류산 열도를 날고 있었다.
델카항공 455편인데 최대승객 260명에 승무원 16명을 태우고 있다.
촤락!
FBI국장 크리스는 기내에서 나눠주는 신문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한숨 자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안정되지 않는 마음은 잠을 불러오지 못했다.
출국전까지도 자신을 향한 워싱턴 공기는 차가웠다.
파상적인 공화당의 공세와 민주당 내에서도 일부 해임해야 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비록 새 정부들어 같이 일하는 한 식구라고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정치적 야망이 클수록 동지의 등에 칼을 꽂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편이라도 앞길에 방해가 되면 짓밟는 것이 정치 방식이다.
크리스의 이번 한국 방문은 대통령만 알고 있다.
측근들도 모르고 한국 정부에서는 더욱 모른다.
티켓 예약도 가명을 이용했으며 공항에서 기자들 눈에 비칠 것을 우려해 변장을 했다.
다행히 승무원들은 물론 일부 미국 승객들도 자신이 요즘 뉴스의 중심에 있는 FBI국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뭘 그렇게 볼 것이 많은가?”
옆 좌석에는 대학 동창이며 필립모리스 이사인 브래들리가 앉아 있었다.
크리스는 빙긋 웃었다.
“시간 보내는 거지 뭐, 별거 있겠나?”
브래들리 이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보니 크리스의 입술이 말라 있다.
그건 초조했을 때 인간에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신체 반응이다.
팟!
그때 신문을 뒤척이던 크리스의 눈이 빛났다.
“왜 그러나?”
그러면서 브래들리는 창가 쪽에 앉은 크리스 팔을 당기고 고개를 쑥 빼어 신문을 보았다.
신문은 워싱턴 포스트다.
브래들리 역시 신문을 보며 놀랐는데 거기에는 어제 일어났던 러시아 마피아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의 보스 세르게이 미하일로프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회면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기사는 가득 넘쳤고 읽어가던 두 사람의 눈이 흔들린다.
이른바 갱들의 전쟁으로 인한 대형 사건도 아니다.
아직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경쟁조직인 포돌스카야 브라트바는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물론 그들의 말을 신뢰하지는 않을 일이지만 전쟁이 있었다면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상대도 일정부분의 피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른 조직이 죽었다는 기사는 없다.
마치 태풍이 싹 쓸어가 버리듯 철저히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의 넘버 원,투가 희생되었다.
“여기 보게!”
브래들리가 의자에 설치된 화면을 가리켰다.
오전에 발표된 녹화된 뉴스들이 쏟아졌는데 대부분 러시아 마피아에 관한 기사였다.
녹화 화면을 보고 있던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얼마 전 이번만큼 큰 대형 사건 하나를 떠올린 것이다.
그건 프랑스 최대 범죄조직 르 밀리유였다.
파리주재 미국 대사관에 파견 근무중인 FBI 요원의 보고에 의하면 공격자는 사막의 흑새라고 했다.
르 밀리유가 먼저 오민철의 신혼여행을 파괴했고 분노한 사막의 흑새가 파리까지 날아와 완전히 르 밀리유를 뭉개 버렸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일이로군.”
브래들리 역시 신문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브래들리, 자네 혹시 사막의 흑새와 밥 한 끼라도 먹어봤나?”
필립스의 모델이니 가능한 일이이서 묻는다.
“전혀 없네. 모델 사진만 찍고 끝이었어. 감독은 물론 스텝들 누구도 같이 차 한 잔 해보지 못했다더군.”
“소식은 틈틈이 보고 받고 있나?”
“회사 모델이기 때문에 체크를 해야 하지만 도무지 우리 정보력으로는 그를 쫓지 못하고 있네. 이제는 포기했지. 그가 연락해오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가 없어.”
“만나 보기는 했나?”
“물론이지. 나와 마주 앉아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으니까.”
크리스의 눈이 빛났다.
“어쩌던가? 듣자하니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던데 정말로 으스스하던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뭐라고 할까. 음 그렇군. 눈이 굉장히 맑았네. 그런 눈 있지 않는가. 어린아이의 해맑은 눈.”
“자네가 아이들의 해맑은 눈을 봤는가?”
갑작스럽게 따지고 들자 브래들리가 이마를 찡그렸다.
“이 사람아, 봤지 그럼 안봐.”
“아 미안하네. 내가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 어떻게 맑던가? 바닥이 훤히 들려다 보이는 동굴 속 물 같던가?”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고 날 바라보는 눈이 너무 맑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 순수함에 내가 완전 지배당한 거지.”
크리스가 브래들리의 말에 관심을 갖는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범죄수사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속에는 매우 재미있는 내용 한 가지가 있는데 그다지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거나 아주 중요한 과학적 사례라는 전제는 없다.
현장 요원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얘기를 담아낸 일종의 기록물이었다.
‘취조는 용의자의 눈을 보고 해야 한다. 눈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눈이 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보다는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너무 맑고 깨끗한 눈이다. 오히려 취조관이 상대의 맑은 눈에 현혹되어 분노와 감정, 투지가 상실된다. 상대가 연쇄 살인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모든 미움이 사라졌다’
‘그는 아니다. 단언건데 절대 악인일 수가 없다. 범죄자의 눈은 다르다. 그의 눈은 너무 순수했다. 난 내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수하고 맑은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을 테러범으로 오해하여 고문까지 했던 FBI 조사원의 고백이었다.
눈(目)이라는 것이 그렇다.
마음의 창(窓)이라는 말은 맞다.
범죄학에 있어 인간의 눈처럼 많은 연구가 진행된 부분도 드물 것이다.
눈을 볼 줄 알면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마음이 눈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인데 어떤 눈이 범인이고 어떤 눈이 잘못 잡아 온 건지 구별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눈이 유려하고 물방울처럼 깨끗하다면 둘 중 하나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인이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나 아직까지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사막의 흑새란 인물이 후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직 없다.
그때 스피커에서 인천공항 도착 소식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풀어 놓았던 안전벨트를 다시 멨다.
권총수는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결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경리과장 강순태를 필두로 각 부서 책임자들이 한 명씩 들어와 결제를 받고 돌아갔다.
“팔 아파.”
권총수가 오른팔을 좌우로 움직이자 오민철이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전자 사인 체재로 전환하자니까.”
전자결제를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채명천 이사와 권총수였다.
채명천은 컴퓨터 사용이 서투르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지만 권총수는 능숙했다.
전 직원의 99퍼센트가 전자 사인을 실시하면 서로 왔다갔다 하는 불편도 없고 시간도 절약된다면서 강력하게 제도를 도입하자고 촉구했지만 권총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사람을 보고 결제한다’
그건 곧 기계에 사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대표라고 하지만 너무 하는 것 아냐?”
오민철이 빤히 바라보았다.
“오 이사, 할 일 없어요? 아침 회의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방에서 어정거리죠?”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가 정색을 하자 기분 나쁘다는 뜻이었다.
피식!
그런 오민철을 보며 권총수는 실소를 지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형, 조폭들을 살인자보다 더 나쁘다고 하지. 왜 그러는 줄 알아. 강자에게는 굽히고 약자에게는 악랄하게 굴기 때문이지. 얼마 전 어느 프로그램에서 현재 조폭으로 활동하는 친구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흥미로운 얘기가 흘러나왔어. 그게 뭔 줄 알아?”
권총수는 창문을 열어 젖혔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어느 누구와도 마음을 놓고 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같은 조직원도 언제 등을 돌릴지 알 수 없고 돈이 없으면 밑에 아이들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조폭이 아니라 돈폭이라는 표현으로 요즘 조폭 세대를 말하더라고, 질문하던 기자가 옛날처럼 선배가 저지른 범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교도소에 가는 사람이 있냐고 묻자 웃더만, 그러더니 완전 전설속의 얘기라는 거지.”
오민철은 이마를 찡그렸다.
전자결제 얘기 도중 갑자기 조폭얘기를 꺼낸 권총수의 의도를 당췌 알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조폭들은 같은 조직원을 식구라고 표현했지. 식구, 한 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했어. 규율이 엄격했어도 배신자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야. 형님을 위해서라면 몇 년 썩는걸 아까워하지 않았지. 서로 부대낀다는 건 그만큼 미운정 고운정이 든다는 거지. 이런 말 있잖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오민철의 눈이 빛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전자서명 제도가 편하다는 걸 권총수 자신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자서명을 하다보면 한 달 내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치열하게 부대끼며 희노애락이 만들어진다.
오민철이 씨익 웃었다.
이른바 권총수만의 경영철학인 것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
미래는 생각지 않고 눈앞의 편리성만 쫓다가 나중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다.
“야 우리 총수 진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
오민철이 둘 밖에 없는 사무실이지만 다시 한 번 둘러 살핀 뒤 말했다.
“뱁새가 어떻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이 우둔한 오이사에게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척!
오민철이 거수경례를 하며 돌아나갔다.
권총수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아 CNN채널에 들어갔다.
뉴스가 곧 돈이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 번은 CNN뉴스를 본다.
잠시 CNN뉴스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