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붉은 두목(4)
주변의 시멘트 건물이나 주택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는데 클래식한 느낌에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과 창문이 유난히 많았다.
오민철은 아주 오래전 교회로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돈 많은 백작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차를 건물 못 미쳐 세웠다.
탁!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산속 저택에서 가지고 온 AK를 옆구리에 바짝 붙여 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봐도 얼른 알아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행인들도 많지 않았다.
“고급 주택가로군.”
골목 안쪽의 집들이 크고 웅장했다.
아치형의 입구는 육중한 자색 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두 사람은 대충 주위를 살폈지만 마땅히 들어갈 만한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권총수는 조금 뒤로 물러나와 작은 돔으로 되어있는 지붕을 보았다.
돔 바로 아래 작은 창문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 행인이 별로 없는 것에 재빨리 오민철을 끌어안고 돔을 향해 솟구쳤다.
살짝 지면을 박찼을 뿐인데 퉁기듯 올라 돔에 섰다.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권총수는 돔 벽쪽으로 난 창문을 열기 위해 다시 몸을 띄웠다.
허공에 뜬 상태로 창문의 유리에 손을 대고 내공을 끌어 올리자 잠시 후 유리가 물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스으윽!
오민철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열린 문으로 연기처럼 빨려들어갔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멋으로 올린 돔인줄 알았는데 용수철처럼 회전하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마치 이슬람의 모스크를 방불케 했다.
조금 전 그 옛날 성당이었을지 모른다는 오민철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공산 혁명이 일어나며 많은 종교들이 쓰러졌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일지 모른다.
두 사람은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회전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권총수가 펼치는 무형의 강기에 의해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두 바퀴 정도 돌았다고 여길 때 계단이 끝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양탄자였다.
중동생활을 오래 한 탓에 단번에 최상품의 양탄자라는 걸 알아 보았다.
이층에서 기척이 있었다.
상당히 넓은 거실은 조용했고 왼쪽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 방에서 전달되어 오는 인기척이다.
숨소리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이 사내들이다.
오민철은 다른 방을 살피기 위해 움직였고 권총수는 복도를 따라 2층 끝으로 향했는데 공중에서 30센티 정도 떠서 움직이는 초상비를 펼쳤다.
문은 닫혔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굵은 톤의 남성들이다.
스으윽!
손잡이가 돌려졌으나 결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방문이 열렸다.
권총수는 소리없이 들어섰는데 안쪽 창가로 원목 책상이 놓여 있으며 앞으로 쇼파가 있었는데 두 사내가 앉아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 얘기를 하던 두 사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실제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듯 두 사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권총수를 보며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권총수는 두 사내중 오른쪽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눈에 그토록 찾고 있었던 솔른쳅스카 브라트바 조직의 보스 세르게이 미하일로프라는 걸 알아차렸다.
두 사내 역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누구요. 어디서 왔소?”
재빨리 권총수의 왼손이 뻗었다.
손가락에서 섬광이 피어나더니 퍽 하며 미하일로프와 마주 앉은 사내의 미간에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흘러내렸다.
소림의 탄지신통이 펼쳐진 것이다.
권총을 뽑던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가 죽은 사내 발치에 앉았다.
가운데 탁자 한 개를 놓고 마주 앉은 셈인데 권총수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는 눈치인데?”
미하일로프는 애써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얼어붙은 몸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어깨를 움직이며 목까지 돌렸다.
“사막의 흑새?”
목소리가 떨린다.
그 역시 숨길 수 없는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궁금할 것입니다. 산속 저택의 상황이 말입니다. 누구도 전달해준 사람도 없었을 테니 내 입으로 설명하죠. 모두 죽었습니다.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죠.”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는 말에 흠칫했다.
“아, 레드킬인가 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화장을 시켜 장례식까지 마쳤습니다.”
무슨 말인가.
장례식까지 마쳤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미하일로프는 권총수의 말을 완전히 이해못한 듯 굳은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2층 스피커에서 RXD를 발견했죠.”
RXD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남은 수류탄 몇 발을 적절하게 잘 이용하여 레드킬 팀원들이 타고온 버스에 불을 질렀습니다. 잘타더군요. 냄새가 조금 역겹긴 했지만.”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드르르륵!
그때 격렬한 총성이 아래층으로부터 들려왔다.
AK소리다.
마당과 정원이 없는 단독 건물이기 때문에 1층에서 들린 총소리라면 한 가지 상황이다.
오민철이 일층을 내려가 모여 있는 경호원들을 기습했을 가능성이었다.
드륵!
드르륵!
단발과 점사가 연거푸 들리는 것이 조준 사격이다.
인원이 많았다면, 즉 혼자서 깔끔하게 해치울수 없었다면 지원을 함부로 나서지 않고 권총수에게 맡겼을 것이다.
전장에서 만큼은 절대 호기를 부리지 않고 차가워지는 오민철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이 오민철이다.
예상대로 잠시 후 방안에 오민철이 나타났다.
“다섯 명!”
그러면서 미하일로프를 보았는데 눈이 드러내놓고 흔들거린다.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또한 미하일로프 말고는 더 이상 이 건물에 경호원은 없다는 보고이기도 했다.
“보스!”
권총수가 정색했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사막의 흑새는 결코 먼저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죠. 또한 명분 없는 전쟁은 절대 시작하지 않습니다. 용병이지만 아직까지 대의(大義)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권총수의 담뱃재가 길어지자 오민철이 한쪽 탁자에 있는 머그컵을 가져다 주었다.
툭!
권총수는 머그컵에 재를 털며 말을 이었다.
“보스께서 날 죽이려고 하니 나 또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전장에서 멍청한 지휘관은 애꿎은 부하들을 죽이죠. 내가 부하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보스께서 죽인 것과 다를바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미하일로프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린다.
모욕을 느낀 것 같았다.
“날 죽일 건가? 날 죽이면 러시아를 살아 나가지 못할 걸세.”
권총수는 빤히 미하일로프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이다
“이제 보니 마피아 보스가 아니라 시장통 양아치였군.”
형편없는 그릇이다.
마땅히 할 말이 없으면 가만있던지 아니면 보스 답게 죽일 거면 어서 죽이라는 품위를 지켰다면 이토록 실망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푸틴 대통령과 친분을 내세워 권총수를 위협하려는 것이다.
난 단순한 마피아 보스가 아니라 러시아 정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러시아 정부차원에서 널 죽일것이라는 말이다.
“권악수 천왕그룹 회장측과 살인청부에 관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있는 대로 주시죠. 그럼 보스를 살려드리겠습니다.”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최고의 비즈니스라고 했다.
형편없는 그릇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 크기에 맞춰 거래를 해야한다.
“뭘 드리면 되겠나?”
예상대로 즉각 반응을 보인다.
권총수는 혼잣말처럼 중얼 거린다.
‘진짜 이 사람 싸꾸려였군. 어떻게 이런 인물이 러시아 마피아에서 가장 큰 조직의 보스가 될 수 있었지’
불현듯 푸틴과 매우 가깝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결국 권력자를 등에 업고 설친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걸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준비하시오. 시간은 1시간입니다.”
권총수는 권악수가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에 자신을 죽여달라는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빠짐 없이 말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미하일로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 많은 것들을 한 시간 안에 준비한다는 건 어렵소.”
씨익!
권총수가 미소를 짓더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오민철이 들고 있던 AK를 건네 주었다.
휘익!
AK총열을 쥐고 개머리판으로 미하일로프 머리통을 찍었다.
빠아악!
총을 거꾸로 드는 순간 미하일로프는 심상찮음을 느낀 듯 상체를 뒤로 젖혀 피했지만 권총수가 더 빨랐다.
머리가 깨지면서 미하일로프의 얼굴로 핏물이 흘러 내렸다.
“끄우윽!”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50분을 드리겠소.”
스윽!
한 시간도 어려운데 50분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권총수의 손에 들린 AK가 또 한번 휘둘러 졌고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뼈를 부서버렸다.
뻐어억!
“으거헉!”
쇼파 위로 나동그라지며 온 몸을 떨었다.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잔뜩 웅크리며 울부짖는데 무척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40분을 드리겠소.”
미하일로프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야 했다.
한번 거절할 때마다 10분씩 줄어들고 있다.
핸드폰을 꺼내 왼손으로 번호를 누르더니 신호가 가는 듯 기다린다.
“내 말 잘 들어!”
미하일로프는 상대에게 빠르게 말을 했고 30분 이내에 모든 것을 준비해 오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미하일로프는 제대로 앉아 있지를 못하고 상체를 휘청거리더니 다시 바닥으로 엎어졌다.
깨진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내리고 부서진 어깨뼈는 완전히 주저 앉았다.
미하일로프는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릴 중얼거리며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딸칵!
오민철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더니 벌러덩 누워 있는 미하일로프 입술에 담배를 밀어 넣어주었다.
미하일로프가 놀라는 듯 움찔하더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실내는 침묵에 잠겼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가방 한 개를 들고 이층 건물 현관으로 다가와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는 열수가 없다.
딸칵!
안에서 문이 열리고 그대로 들어서려던 사내가 멈칫했다.
턱 밑에 AK가 닿았다.
“들어와요!”
오민철이 한쪽으로 비켜섰고 주춤 방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기겁했다.
다섯 구의 시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절대 총을 쏘지 않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시죠.”
사내는 주춤거리며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금방이라도 등뒤에서 AK총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내는 한참을 걸어 2층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으음!”
사내는 신음을 흘렸다
하늘 같은 보스가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보스!”
“가져왔나?”
“예...예!”
사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권총수가 빼앗듯 가져가더니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방에는 서류를 포함해 통장사본과 암살청부에 대한 장웅철과의 대화가 녹음된 볼펜형 녹음기가 있었다.
그 이외에 권악수가 자신을 암살하도록 사주하고 지시한 분명한 증거들이 차고 넘쳤다.
권총수는 꼼꼼하게 살핀 뒤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퍽!
바닥에 누운 미하일로프 머리가 박살나며 사라졌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이번에는 심부름을 온 사내가 종잇장처럼 날아가 뒤쪽 벽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사내의 가슴에 손바닥 자국이 났는데 뜨거운 불에 옷과 피부가 타버린 듯 새카맣다.
소림의 절기 사자모니인(獅子牟尼印)이었다
쿵!
사내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권총수는 가방을 들고 일층을 내려갔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타고온 벤트리를 끌고 이층 건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