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08화 (508/651)

제508화: 돌파구(3)

로만체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입으로 모든 걸 털어 놓고 있는 현실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저택과는 10킬로 가까이 떨어진 곳으로 사격장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경쟁조직의 공격을 대비해 끊임없이 훈련을 하죠. 일반 군으로 얘기하면 기동대 격입니다.”

“비상 사태를 대비해 평소에 많은 사격 훈련을 한다는 것이군.”

“무장 상태는 어느 정도요?”

오민철이 물었다.

로만체프는 약간 이마를 찡그리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군 제식소총 AKS-74로 무장했소. PKM과 수류탄, RPG도 갖추고 있죠. 모두가 러시아 최고의 특수부대 스페츠나츠 출신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소.”

말속에는 은근히 겁을 주려는 느낌도 풍겼다.

너희 둘의 힘으로는 결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눈빛도 보였다.

“조르닌이란 이 친구가 우릴 호랑이 굴로 안내를 해준 꼴이었군.”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종이를 찢었다.

약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다행이다.

만약 로만체프에 대한 생각 없이 곧장 약도를 따라갔다면 강한 역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는 모스크바강을 따라 올라가더니 지하도로 빠져 한참을 달려 방향을 틀었다.

숲을 낀 한적한 왕복 2차선 도로였다.

더위가 한참 익어가고 있는 서울과 달리 산속은 선선하다 못해 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끼이익!

오민철이 차를 한 곳에 세웠다.

통행하는 차량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곳이 사람 통행을 막아 놓은 중요 시설이 있는 곳도 아닌 것 같았다.

오민철은 룸미러를 통해 권총수를 살폈는데 전음으로 차를 세워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차를 세우라고 했던 권총수가 입을 닫아 버리자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딸칵!

오민철는 유리를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권총수까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유리를 완전히 내리고 팔꿈치를 창문틀에 올리고서 숲속을 바라보았는데 경치를 감상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걸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들리는 건 두 사람이 연기 내뱉는 소리가 전부였다.

파르르!

로만체프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워낙 위험이 일상화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웬만해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데 이런 해석되지 않는 해괴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꿀꺽!

로만체프는 침을 삼켰다.

자신은 지금 약자이고 끌려온 포로다.

두 사람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할 것이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려주는 것도 아닌 이 기묘한 분위기는 뭘까.

“로만체프씨.”

침묵은 권총수가 깼는데 시선은 창밖에 두고 있었다.

“그 막강한 조직에서 넘버2라면 수많은 사람을 젖히고(죽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배신을 밥 먹듯이 해왔겠죠. 결코 넘버2라는 자리는 가만 앉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로만체프는 침묵했다.

“로만체프씨 우리 거래 하나 할까요?”

권총수가 돌아보았다.

“당신도 살고 나도 사는 거래 말입니다.”

로만체프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상태에서의 거래란 일방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은 무장이 해제된 상태이고 권총수는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다.

결코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합당한 비즈니스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의 판단이다.

“넘버2라면 보스의 저택을 들어가는데 누구보다도 수월하리라 봅니다?”

파르르!

로만체프의 눈이 커졌다.

“날 입구까지만 데려다 주시오. 그럼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 시켜줄 수 있소.”

권총수의 제안에 로만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조직에 칼을 겨누라는 뜻이다.

배신자로 낙인찍히면 절대 러시아에서는 살아 갈 수 없다.

총잡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자신을 찾아 올 것이다.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 것이고 주위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일단 나와 한국으로 들어가 신분 세탁을 한 뒤 미국으로 들어가시죠. 난 용병회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

처음으로 로만체프가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날 사막의 흑새라고 부르죠.”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로만체프는 권총수를 바라보았는데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

맑고 고요한 눈이다.

그 순간 로만체프는 권총수의 말속에 담긴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막의 흑새는 곧 신용이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여 떠도는 말을 종합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약속을 지킨다. 뱉어낸 말은 책임지는 사람이다.’

전세(戰勢)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미 오른손이 잘려 나갔다.

이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도망친다고 해도 조직에서 자신의 권위는 예전만 못할 것이다.

손목이 잘려 나갔다는 건 사막의 흑새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넘버2가 당했다는 건 조직의 명예와 직결된다.

명예 보호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것이 뻔했다.

딸칵!

누구도 문 열고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만체프는 차문을 열고 나가더니 길옆 바위에 걸터앉았다.

고민의 시간인 모양이다.

또 한번 삶을 선택해야 할 중요한 분기점에 왔으므로 잠시 모든 걸 계산해보려는 행동인 것이다.

배신이 플러스일지 마이너스일지 확실히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한다.

“받아들일까?”

오민철이 묻는다.

“고민될거야.”

“어떤 고민?”

“미국에도 러시아 마피아가 있어. 이쪽과 연계된 조직도 있지만 독자적인 세력도 활동하고 있지.”

“미국에 있어도 암살당할 확률이 높다는 거잖아.”

“아마 그걸 지금 고민하고 있을 거야.”

“정 안되면 성형수술 시켜 버리지 뭐. 완전히 신분세탁 해버리면 되잖아.”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은 FBI에서 증인 보호 차원으로 국적을 바꾸고 이름과 얼굴까지 바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프로그램이 있긴 하다.

물론 국가적 차원이므로 완벽하다.

“맥!”

권총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맥보란이다.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일로 잠시 소원했으나 곧 풀렸다.

권총수가 피해도 없었고 하여 한 발 물러나 이해한 것이다.

맥보란은 미국 공무원이므로 당연히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20년 동안 지배했던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 정부에 협력한 현지인들이야 말로 엄청난 우군이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군이 입은 피해는 훨씬 컸을 것이다.

사망자만 3,000여명 나왔는데 20년 전쟁치고는 매우 적은 수치이고 그보다 훨씬 짧았지만 58,000명이 전사한 월남전에 비교하면 피해는 더욱 적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맥보란의 입장을 권총수는 충분히 수긍한 것이었다.

맥보란은 마음을 다해 미안하다고 했었다.

“증인보호프로그램(WITSEC)이 필요합니다.”

“상대는 누구요? 혹시 러시아?”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역시 CIA는 다르다.

자신이 모스크바에 온 사실을 알고 있다.

증인 보호 프로그램(WITSEC)은 과거 마피아와 갱스터 같은 범죄조직들이 증인을 보복 살해하는 사건이 늘어나자 미국에서 1970년에 관련법을 제정했다.

미국 연방 위증자 보호 프로그램(WITSEC) 이라는 미국 법무부, 연방보안관 그리고 미 육군의 보호를 받으며 증인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치밀한 시나리오이다.

신고자의 정보는 국가기밀로 보호된다.

구체적으로 개명 및 사회보장번호, 여권번호, 운전면허증 번호 등 각종 번호는 변경되며 필요시 성형과 의사까지 연방정부에서 지원해 준다.

이러한 프로그램 덕분에 미국에선 보호대상자가 증언한 사건의 유죄판결률이 일반사건보다 높다.

“우리 요원을 캡틴에게 보내야겠군요.”

“그러면 우린 더욱 좋죠.”

“알겠습니다. 접선 방법과 시간을 곧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그때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로만체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갑시다!”

권총수가 어딜 가느냐는 듯 바라보자 무뚝뚝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보스가 있는 곳까지 안내를 부탁했잖소.”

탁!

차로 올라와 문을 닫는다.

도로를 달리던 랜드로버 한 대가 방향지시등을 켜면서 속도를 늦췄다.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랜드로버는 차선이 없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사유지라는 간판이 있다.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깨끗했고 주위는 자작나무와 러시아 소나무가 빼곡했다.

운전석에는 로만체프가 앉아 있었는데 오른손은 소매자락 속에 감춰져 있고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저건 뭐야?”

커브길을 돌아서자 통나무로 지어진 초소 하나가 나왔고 시멘트 담벼락을 세우고 그 위로 PKM(러시아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AK를 든 두 명의 사내가 바리케이트를 쳐 놓고 다가오는 차량을 세웠는데 오민철이 중얼거렸다.

“군부대도 아니고.”

군복대신 평상복 차림에 긴 머리를 한 사내가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로만체프!”

넘버2를 알아보며 웃는다.

쉬쉭!

조수석에 앉은 권총수의 오른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푸욱!

푹!

운전석으로 다가온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다른 한 명의 사내가 늘어뜨리고 있던 AK를 들어 올렸지만 그보다 먼저 권총수의 손을 떠난 플라스틱 빨대가 미간을 뚫어 버렸다.

주차장에서 초코우유를 마시던 빨대가 흉기로 돌변해 덩치 좋은 두 사내의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딸칵!

오민철이 뒷문을 열고 내리더니 죽은 사내들 손에서 AK를 압수하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30발들이 탄창까지 회수하여 차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바리케이트를 올렸다.

꿀꺽!

로만체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도 초코우유를 좋아한다.

어려서도 맛있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맛있는 우유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빨대를 꽂은 초코우유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빨대에 대해서는 아는 편이다.

말 그대로 힘이라고는 거의 없는 것이 빨대다.

우유를 빨아올리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휘어지고 꺾인다.

더욱이 가볍기로 따진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훅 불면 날아간다.

감촉만 없다면 손에 들고 있어도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5g도 채 안될 솜털과 다름없는 빨대로 두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 권총수의 솜씨에 목이 막힌다.

부우웅!

차는 다시 출발했다.

차안은 무겁다.

로만체프는 어금니를 물었다.

“검문소가 모두 세 곳이라고 했소?”

뒷좌석 오민철이 묻는다.

로만체프는 그렇다고 룸미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이 두 번째인가?”

검문소는 이번에도 커브길을 돌아서자 나타났다.

아군은 몰라도 외부의 적이라면 커브길 뒤에 숨겨져 있을 초소를 미처 예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들어가다 한 방 맞는 것이다.

차는 다시 속도를 늦췄고 역시 이번에도 PKM이 설치된 초소가 나타났는데 앞서와 같은 구조와 형태였다.

그런데 제1 초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한 사내가 시멘트로 된 담장 위에 거치된 PKM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권총수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형 몸에 힘 빼.”

권총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총소리가 울렸다.

PKM과 AK가 마치 소나기 쏟아치듯 총알을 쏟아냈고 랜드로버는 순식간에 벌집이 되고 말았다.

두두두두!

드르륵!

무자비한 사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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