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화: 돌파구(2)
굳어 있던 크리스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눈에 힘을 주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꿀꺽!
“음!”
침을 삼키기도 하고 감탄을 해가며 읽은 크리스의 어깨가 급기야 떨린다.
“제레미, 제레미!”
그대로 이층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단숨에 이층으로 올라간 크리스는 딸 제레미 방을 노크했다.
안에서 대답이 있기도 전에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섰는데 딸 제레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요 아빠?”
능청맞다.
“이런!”
와락!
제레미를 힘차게 끌어안는다.
“왜 말을 안했니? 이런 엄청난 일을.”
품에 안긴 제레미를 밀어내고 바라보는 크리스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오오! 하느님! 이건 꿈이 아니지.”
크리스는 감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학교 역사상 4학년생은 있었지만 3학년생은 제가 처음이라고 했어요.”
“아빠가 지금 내 딸과 있는 것 맞지. 너 제레미 아니냐.”
콱!
다시 한 번 딸을 끌어안는다.
침묵이다.
기쁨 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고 입을 열면 울어 버릴 것 같아 말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떠난 아내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를 생각하자 목이 메어 버린 것이다.
두 부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 사람은 엄마를, 한 남자는 아내를 떠올렸다.
크리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 물을 올리고 빵을 구웠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마약단속국 DEA(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국장 로버트와 아침 식사 겸 폭증하고 있는 마약 밀반입을 막기 위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로버트가 다니는 단골 식당에 예약을 해 두었다고 했지만 커피 한 잔은 마시고 가고 싶다.
끓는 물에 가루 원두를 넣고 휘젓는다.
소파로 커피 잔을 가지고 온 크리스는 어제 밤 읽었던 제레미 기사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읽는 내내 크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는데 후루룩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책장을 넘긴다.
뭔가를 읽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습관이다.
멈칫!
몇 페이지를 대충 넘기던 크리스의 손이 멈췄다.
하나의 기사가 시선을 끌었는데 터번을 둘러쓴 이슬람 복장의 사내가 어깨위에 M-4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사막 끝으로 뜨거운 불덩이가 떨어지는 걸 배경으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다.
입가에 문 담배를 바짝 당겨 찍었는데 말보로 레드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잡혔다.
그러고 보니 기사가 아니라 기사형태를 띤 광고인 것이다.
그냥 넘길까 하다 광고 내용을 읽었는데 사진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읽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멈칫!
‘사막의 흑새’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 그는 말보로 레드를 입에 문다는 카피를 읽고 난 크리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뭔가를 떠올린 듯 사진 속 권총수를 한 참 바라보더니 재빨리 안방에서 핸드폰을 가져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지 않는가 싶네?”
“그걸 아는 사람이 전화질이야.”
상대는 버럭 소릴 질렀다.
“자네 정말 화났나? 그래서 소리 지른 건가? 그렇다면 미안하네.”
“이 사람, 자네답지 않게 갑자기 무슨 말투가 그러나. 운동 가려고 지금 채비 준비 중일세. 무슨 일인가?”
상대는 필립모리스에 다니는 친구이며 대학 동창인 브래들리 홍보이였다.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전화를 했네.”
“자네 같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나 같은 담배회사 직원에게 부탁이라니, 설마 담배가 사람 몸에 나쁘니 더 이상 생산하지 말라는 얘긴 아니겠지?”
“그 광고 말일세. 뉴스위크에 실린 말보로 레드 광고.”
“아, 자네도 봤나? 흐흐! 내 작품일세. 아이디어의 80퍼센트 이상이 내 머리에서 나왔네. 그 광고가 매우 효과를 누리고 있지. 아주 대단해. 일부에서는 워낙 유명한 모델 덕을 본다고 하지만 내 컨셉이 맞아 떨어진거야.”
“그 친구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가?”
“사막의 흑새를?”
브래들리가 놀란다.
***
택시가 멈췄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는데 멀리 푸시킨 미술관이 보인다.
전시회 구경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조르닌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로만체프가 가끔 들립니다. 미술에 조예가 깊죠.”
조직의 넘버2 로만체프는 모스크바 대학 미대출신인 엘리트다.
놀라운 건 러시아에서 유명한 미술 평론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틈나는 대로 여러 미술관을 찾아다니는데 그중 이곳 푸쉬킨 미술관 발길이 제일 잦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가 올지 몰라 헛걸음을 각오하고 온 것이다.
오후 5시에 묻을 닫는다고 했는데 아직 한 시간이란 여유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한국 돈 이만 원의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미술관에서는 한참 루이뷔통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브랜드 루이뷔통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과 그들이 창조해 낸 패션들이 걸려 있었다.
생각보다 관람객은 많았는데 권총수는 루이뷔통이라는 브랜드 효과 때문이라고 나름 판단했다.
뭔가 감상할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조르닌의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 있던 로만체프의 확대한 사진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은 남자들을 중심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와중에 동행한 오민철은 남자 관람객 일부가 이마를 찡그릴 만큼 노골적으로 면전에서 비교를 했다.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고 다시 남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형 일로와 봐.’
갑자기 권총수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오민철은 사람들을 헤치고 권총수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 사람.”
권총수가 턱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일남일녀가 측면으로 서서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자는 수첩에 뭔가를 계속 받아 적고 있었다.
여자는 주로 남자가 하는 말을 기록했는데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로만체프야.”
오민철은 단언했다.
“진짜야. 맙소사! 정말로 만나다니 이건 완전 횡재 아냐.”
보물이라도 찾은 듯 오민철은 침을 삼켰다.
“꼬락서니가 어느 언론사 문화부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모양인데.”
여자가 질문을 던지면 로만체프가 대답을 했다.
간간이 웃으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30여분이 넘도록 시간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미술관을 나와 주차장에 있었다.
빨대를 꽂은 초코 우유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머지않은 곳에 지하철역이 있는 탓에 주차장에는 이십여 대가 채 되지 않는 차량들이 있었다.
모스크바도 교통지옥이다.
“저기 온다!”
로만체프는 2층에서 봤던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는지 뭔가 계속 떠들었고 여자가 붉은색 차 앞에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여자는 차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우웅!
떠나면서도 유리를 내리고 뭔가 한 마디 하며 떠났고 로만체프는 잘가라는 듯 살짝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지랄도 가지각색이라더니.”
오민철이 로만체프의 행동을 비웃었는데 마피아 범죄자가 너무 뻔뻔하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차로 걸어가는 로만체르를 오민철이 불렀다.
“헤이, 체프.”
로만체프가 고개를 돌렸다.
오민철이 빙긋 웃으며 다가갔는데 로만체프는 위아래를 훑었고 권총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멈칫했다.
매서운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점점 눈이 커졌다.
어디서 한번 쯤 본 얼굴이라는 걸 떠올린 듯 했다.
“난 몰라도 넌 알아본 모양인데.”
오민철과 권총수가 다가갔다.
“그대로!”
권총수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로만체프는 뒤에 숨겨 놓은 권총을 뽑기 위해 오른손을 움직이려다 권총수의 눈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휘익!
권총수의 지시를 거부하고 곧장 권총을 잡아갔다.
“헙!”
그런데 로만체프가 신음을 터뜨리며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허리에 꽂힌 권총을 잡아가던 자신의 오른손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믿어지지가 않는 듯 이번에는 오른팔을 보았는데 손목에서 정확하게 잘려나갔고 핏방울이 떨어진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픔도 잊은 듯 로만체프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주차장 바닥에 떨어진 손과 잘린 팔목을 번갈아 본다.
슥!
오민철이 뒤에 꽂힌 권총을 압수하고 로만체프를 향해 웃는다.
“그대로 있으라고 하면 그대로 있을 일이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갑시다!”
오민철이 우두커니 서 있는 로만체프의 등을 툭 밀었다.
로만체프는 넘어질 듯 앞으로 휘청하며 걸어갔는데 오민철이 물었다.
“차 어딨죠? 당신 차?”
오민철의 질문에 로만체프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랜드로버 흰색 SUV한대가 보인다.
“러시아 마피아가 돈을 잘 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SV오토 바이오 그래피면 우리 돈으로 3억이 넘어가는데.”
오민철은 랜드로버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당신 차 맞아요?”
웃으며 물었는데 로만체프의 반응이 없자 인상을 썼다.
“나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대답 좀 하지 그러십니까?”
“맞소!”
딸칵!
키는 로만체프 자신의 주머니에 있다.
그런데 차량의 문이 열리자 로만체프의 눈이 커졌다.
전자키다.
옛날 수동 키라고 해도 고급차이기 때문에 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손도 대지 않고 열었다.
자신의 손목이 잘린 것은 아직까지도 확실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30만 달러 가까운 고급차를 손도 대지 않고 여는 기술을 연이어 선보이자 로만체프는 고개를 돌렸다.
말로만 듣던 사막의 흑새의 신비한 능력이 소문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마술이 절대 아니다.
내가 강기로 자동차 손잡이에 강한 압력을 넣으면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면서 열리는 것이다.
오민철이 핸들을 잡았고 권총수와 로만체프는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오민철은 곧장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 시켰다.
부우웅!
차가 주차장을 조심스럽게 빠져 나갔다.
“차도 죽이고 석양도 죽인다.”
아름답다.
모스크바 강변을 달리는데 저 멀리 붉은 낙조가 서서히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내려앉고 있었다.
스윽!
권총수가 담배를 권했다.
로만체프는 잠깐 망설이더니 왼손을 들어 한 개비 받아 입에 물었다.
딸칵!
권총수는 불까지 붙여준다.
자신도 한 개비 피워 물고서 유리를 내렸다.
파파팡!
차안으로 거친 바람이 들어왔다.
촤락!
권총수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구겨진 A4용지를 꺼내 펼쳤다.
그곳에서 조르닌이 그려준 약도가 있었는데 권총수는 아뭇소리 않고 로만체프에게 건네주었다.
로만체프는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얼른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 이마를 찡그렸다.
“알아보겠소?”
로만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해야 합니다.”
로만체프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렸다.
“보아하니 보스의 집을 가리키는 약도인 듯 한데...약간 다르군요.”
“어디가 어떻게 다릅니까?”
“이쪽 도로까지는 분명히 맞소. 그러나 이 화살표가 있는 곳으로 가면 여긴 레드 킬로 불리는 사냥꾼들이 있소.”
“네?”
운전하던 오민철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