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5화: 꿈은 사라지고(3)
가는 신호가 오늘따라 너무 두렵다.
전화기는 사람을 슬프게도 만들고 기쁘게도 한다는 단골 룸살롱 여종업원의 말이 떠오른다.
편지를 사용하지 않는 요즘 모든 희로애락이 전화기속에서 이뤄진다는 뜻이다.
받지 않는다.
무려 다섯 번을 끊고 누르기를 반복했지만 통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지이잉!
그런데 전화를 끊고 30초가 지나지 않아 벨이 울린다.
혹시 그쪽에서 했나 싶어 재빨리 액정을 살피던 장웅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솔른쳅스카 브라트바 넘버 2 로만체프였다.
그와 모스크바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며 러시아 국립발레단의 공연까지 봤었다. 그는 한국 재계서열 1위인 천왕그룹의 법무팀장의 체면과 명예를 최대한 세워준 것이다.
“로만체프!”
“별일 없습니까?”
목소리가 모스크바에서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그때는 훈훈했고 자신의 고향 베르호얀스키 사투리가 정감 넘치게 흘러나왔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기계가 말을 하듯 목소리에 굴곡이 없고 한자 한자 찍어내는 인쇄기처럼 말을 했다.
“연락이 안 됩니다. 아는 것 있으면 말해주시오.”
장웅철은 잠시 망설였다.
망설였다기 보다는 뭔가 한마디 해야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미스터 장!”
“나도 연락이 안 됩니다.”
“사막의 흑새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살아 있습니다.”
“끄으으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그들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게 나도 답답하죠.”
“죽었단 말입니까? 사막의 흑새에게?”
장웅철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시신이 발견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알아보고 전화를 주시오.”
전화를 끊는다.
장웅철은 끊어진 전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이잉!
전화를 책상위에 놓으려는데 또다시 벨이 울린다.
아는 번호가 액정에 찍혔다.
“박 과장!”
“몹시 기다리던데요.”
교도소 보안과장이다.
권악수가 목 빠지게 자신이 오길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럴 것이다.
그 역시 이번 일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음을 알고 있다.
면회실 문이 열리고 죄수복 차림의 권악수가 들어섰다.
날씨가 더워지고 8.15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권악수의 얼굴이 확실히 밝아졌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자연스럽게 피워 물었다.
“어제 꿈을 꿨습니다.”
권악수는 의자에 느긋하게 앉더니 꿈 얘기를 꺼냈다.
“이걸 길몽이라고 해야 하나 흉몽인가? 죽은 늙은이가 나타났지 뭐요?”
그는 친아버지인 권철태만 아버지라 부르고 권철악은 항상 늙은이라고 칭한다.
즉 어제 밤 권철악을 만났다는 뜻이었다.
“우리 아들 왔느냐면서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글쎄 살아생전 한 번도 하지 않던 악수를 하자고 하지 뭐겠습니까?”
팟!
악수라는 말에 장웅철의 눈이 빛났다.
죽은 자와 악수는 흉몽 중의 흉몽이다.
죽은 자와 만나는 건 상관없고 얘기를 하는 것도 전혀 신경쓸일 없으나 손을 잡거나 끌어안거나 하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했습니까?”
“아니 면전에 늙은이가 웃으며 손을 뻗는데 어떻게 안 잡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토록 얼음 같기만 하던 늙은이 손이 왜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지 소스라칠 뻔 했습니다.”
“악수를 했다고 했습니까?”
“꿈속이지만 기분 묘하더군요.”
흉몽이다
꿈 해몽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을 만나고 보는 건 상관없으나 집으로 찾아온다거나 손을 잡는 신체접촉은 아주 불길한 꿈이다.
집안에서부터 꿈이 시작되는 건 상관없으나 대문을 통해 죽은 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아차 어찌됐소? 러시아 친구들 왔소?”
“예!”
벌떡!
권악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서 놈을 죽였소. 죽였겠지. 자동소총으로 갈겨 버리는데 제까짓 놈이 무슨 수로 살아나.”
러시아 마피아들의 무차별한 공격 방식을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장웅철은 어금니를 물었다.
모든 걸 되돌려 놓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후회하고 싶어도 너무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앞으로 가는 길 말고는 선택이란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결과인 듯 합니다.”
장웅철은 더듬거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환한 얼굴로 출소의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던 권악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기동이 봤다면 살아 있다는 얘기 아니오?”
“그렇죠. 그가 잘못 봤을 리는 없죠. 그는 누구보다도 권총수를 잘 알아 볼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콰아앙!
권악수가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병신 같은.”
권악수가 장웅철을 노려본다.
“회장님!”
친 아버지인 권철태 대통령을 만드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당시 권철악 밑에서 법무팀장 직함으로 선거기간 내내 권철태 캠프를 향해 쏟아지는 갖은 유언비어에 대처했다.
크고 작은 법적 문제를 해결하고 화려한 인맥을 내세워 엄청난 고소고발 건을 유야무야시켰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비록 부하직원이지만 자기 아버지 또래이다.
그런 자신에게 병신이라는 말을 쏟아낸다.
“실패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러시아 쪽 애들은 틀림없다고 말했잖습니까?”
“그 말을 했던 사람은 회장님입니다.”
화악!
권악수 눈이 커졌다.
금방이라도 장웅철을 한 대 갈길 듯 주먹을 쥐며 바르르 떤다.
“진정하십시오. 실패한 일 갖고 저와 회장님께서 다퉈봤자 득 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앉으세요.”
“실패한 일.”
어이가 없다는 듯 권악수가 피식 웃는다.
“지금 날 가르치는 것이오?”
“무슨 말씀.”
“우라질!”
성질을 내며 나동그라진 의자를 다시 가져와 앉으며 죄수복 상의 주머니에 있던 담배갑을 꺼냈다.
하지만 담배가 없는 빈 갑이다.
장웅철이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꺼내 건넨다.
딸칵!
불까지 붙여 준 장웅철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장웅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담배를 피우는 권악수를 요리저리 살피며 아주 무겁게 말을 계속 이었다.
“공존공생하면 안되겠습니까?”
“공존공생?”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네 번을 노렸지만 실패했습니다. 이건 그가 아직 죽을 운이 아니라는 뜻이죠. 운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권총수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놈과 그냥 같이 살자는 뜻으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토록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번에 또 실패했습니다.”
“몰라서 그따위 개소릴 하는 거요.”
권악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
“그놈 때문에 우리 권씨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소. 집안이 몰락했단 말입니다. 증거만 없을 뿐이지 아버지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권씨 집안의 핏줄이 청소 당했는지 직접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증거가 없다는 건 법치주의에서는 무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놈이 죽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살아가는 길 말고는 현재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같은 배를 탔다.
권악수가 죽으면 자신도 죽고 그가 살면 자신도 살아날 것이다.
장웅철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권악수를 설득 시켜야 한다.
지금이라도 권악수가 모든 걸 비우고 털어내면 희망은 있다.
자신이 지켜본 권악수는 경영인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다.
단지 타고난 거친 품성이 냉철한 이성보다 먼저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 한다면 나 보다 강하고 뛰어난 상대를 인정하는 것도 프로다운 멋입니다.”
파르르!
담배를 끼고 있는 권악수의 손가락이 떨린다.
“누군 아마존을 창업했지만 누구는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범죄를 계획하죠. 같은 대학을 나왔는데 어느 동창은 기업을 일궈 순식간에 재벌 총수가 되고 다른 친구는 연거푸 사업 도전에 실패하는 것이 사람이고 인생사 아니겠습니까?”
“능력의 차이라 이 말인가.”
“제가 드리는 마지막 충언입니다. 권총수를 인정하십시오.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화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부욱!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나요.”
권악수는 씨익 웃는다.
“무서우면 당신 내게서 떠나도 잡지 않겠소. 난 절대 그 놈과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권악수는 어금니를 물며 말을 이었다.
“실패하면 재도전하면 되는 거요. 될 때까지.”
“무슨 뜻?”
“솔른쳅스카 브라트바에게 다시 의뢰를 하는 거요. 성공할 때까지 기한을 정하지 말고 무한정으로 말이오.”
“그만 하시죠.”
“당장 일주일 안으로 그들과 다시 협상을 매듭짓고 보고 하세요.”
탁!
권악수가 문을 열고 사라져 버린다.
장웅철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교도소 보안과장 박식종이 들어섰다.
“박과장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별말씀을.”
“퇴직하고 나면 천왕그룹에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 두었으니 편하게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회장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시던데?”
“우후후!”
장웅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
비행기 한 대가 모스크바 도모데보도 국제공항 3번 활주로에 내려앉고 있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자욱한 연기가 반짝 피어났다.
대한항공이다.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하며 승객들은 출구로 서서히 이동해 갔다.
트랩이 닿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입국장을 나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모두 여행자 차림으로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었고 점퍼와 모자, 그리고 좌측의 키가 조금 작은 사내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었다.
“7월인데 이렇게 선선해.”
청사를 나온 오민철이 따뜻한 모스크바 날씨에 놀라워했다.
서울의 7월은 벌써부터 펄펄 끓는다.
낮 최고 기온이 35도는 어렵지 않게 오르내리는데 모스크바는 우리 봄 날씨 같다.
두 사람은 택시들이 몰려 있는 승강장을 향해 걸어갔다.
앞서 공항을 나온 사람들이 줄지어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떠나고 있었다.
“거기가 어디지?”
두 사람이 택시에 올랐을 때 오민철이 물었다.
“글쎄!”
권총수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작은 손가방을 뒤적거렸다.
오민철은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기사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성질내지 말고 참고 살아라 했던 사람 있죠?”
“푸쉬킨 말입니까?”
택시기사는 육십이 넘어 보였는데 머리에 때 묻은 사냥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맞아 푸쉬킨, 그 사람 미술관 앞으로 가면 됩니다.”
늙은 기사는 밝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이 푸쉬킨 미술관이 있는 곳을 향해 갈 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다.
온통 시체다.
경찰복장의 시체도 있고 반팔에 추리닝을 걸친 시신도 있으며 정장을 한 건장한 백인들의 시신이 골목마다 지천이다.
여긴 브라질 최고의 관광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가장 빈민가로 불리는 자카레지뉴였다.
“K7, K7 대답해.”
방탄복을 걸치고 손에 권총을 들고 있는 백인사내가 주먹 크기 정도의 휴대용 무전기에 소리쳤다.
“K9, K9, 내 말 들리나. 맥스, 맥스.”
무전기에 대고 애타게 소리치며 부르지만 기다리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백인 사내 캐빈의 방탄조끼 일부에도 핏자국이 묻어 있었는데 잠시 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앰블런스들이 골목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