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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500화 (500/651)

제500화: 누구나 살다보면 죽는다(1)

가족 모임이라고 해도 항상 맨 끝자리에 앉아야 했고 경조사에 참석해서도 심부름하는 입장이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도무지 어깨펴고 걸어 다녀본 적이 없어 한때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었다.

그중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인물이 권악수였다.

어느 날인가는 권악수를 죽이고 싶다는 살인충동에 을지로에 나가 회칼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칼만 사놨을 뿐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탁!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머리채를 거머쥐더니 화장실 안으로 끌어 당겼다.

술에 취한데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푸욱!

강제로 변기에 앉혀지나 싶었는데 뜨거운 것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푹!

푸우욱!

연거푸 불덩이가 들어왔고 전철해는 이마를 찡그렸다.

고통스럽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아랫배가 뜨거울 뿐이었다.

고개를 숙였다.

와이셔츠가 시뻘겋게 물들었으며 피가 물처럼 변기로 흘러내려간다.

스으으!

전철해는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한 사내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이며 그래서인지 이가 순백으로 빛나고 있었다.

툭!

사내는 쥐고 있던 칼을 변기에 넣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퍼억!

전철해는 옆으로 쓰러졌고 문이 닫혔다.

웨이터들과 손님들이 간간히 화장실을 드나들었지만 모두가 소변만 보고 나갔다.

묘하게도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이 없었다.

문 안에 사람이 죽어 있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철해를 발견한 사람은 김동복이었다.

한 참을 기다려도 전철해가 돌아오지 앉자 김동복이 직접 화장실을 찾은 것이었다.

화장실을 들어선 김동복은 이마를 찡그렸다.

화장실에 없으면 어딜 갔을까.

몸을 돌려 나가려던 김동복의 시선이 맨 안쪽 화장실 문 앞을 주시했다.

문 틈으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와 굳어있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여 내려다보던 김동복이 문을 열어 젖혔다.

“으헉!”

문을 연 김동복은 기겁했다.

전철해가 화장실 구석에 쳐 박혀 있었다.

“이...이런 젠장!”

김동복은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갔다.

전철해의 사망 소식은 조간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고 또한 아침 뉴스의 절반을 차지 할 만큼 집중적으로 방송되었다.

권총수 역시 집에서 아침뉴스로 보았다.

다른 채널을 통해서도 사건 소식을 듣고 난 권총수는 나직히 중얼 거렸다.

‘한심 하군’

전철해를 죽여봤자 권악수에게 돌아가는 이익이란 전혀 없다.

전철해가 외국 투기자본과 손을 잡고 천왕물산의 M&A를 주도한 건 분명하다.

누구보다도 천왕물산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팔았을 것이다.

투기자본들과 은밀한 거래를 했다는 걸 알만 한 사람은 알고 있다.

전철해를 없앤다고 해서 천왕물산이 돌아오는 건 절대 아니다.

이번 살인사건이 전철해를 죽여 천왕물산이 다시 권악수 손으로 들어온다면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가치는 있다.

하지만 이미 회사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전철해를 죽인다고 해서 권악수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망하려고 작정한 선택이었어’

권철악이 조카인 권악수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가장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권철악이 기업을 일구던 시절은 사기와 협잡이 통하고 불법과 편법이 판을 친 개발독재의 시대였다.

돈으로 정치권을 매수하고 노조를 파괴하며 탄압해도 정치권과 언론 검찰 모두가 자기편이었던 시절이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권철악은 권악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는 것 자체가 몰락의 전조이며 어쩌면 인과응보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21세기는 자신이 마음대로 하던 20세기가 아니라는 걸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권악수는 도장을 찍은 듯 권철악의 방식 그대로를 따라하고 있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20세기의 어두운 사고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전철해를 죽여봤자 권악수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단순 분노에 의한 보복 살인일 뿐이다.

권총수는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출근길을 서둘렀다.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오민철이 따라 들어선다.

오민철은 전철해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권악수겠지?”

오민철은 자신감 있는 표정이다.

“전철해를 죽일 인간이 그 놈 밖에 더 있냐고? 안 그래?”

권총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권총수의 표정을 살피던 오민철이 길게 숨을 들이 쉬며 입을 다물었다.

권총수가 뭔가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이란 전철해의 죽음에 대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커피 할래?”

오민철이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는 듯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권총수는 조용히 숨을 내 쉬었다.

‘뭔가 잡히고 있는데’

육감이라는 것이 있다.

오감이 아닌 짐승들의 본능 같은 것이다.

본능은 위험이 특별한 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알아차리지만 내공이 육식귀원을 넘어 반노환동의 경지에 들어서기 시작한 고수는 훨씬 그 앞을 내다본다.

즉 자신을 향한 어떤 암살을 모의하거나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면 그 거리가 설혹 수백 킬로 밖이라고 해도 알아차리는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나 아니면 하늘의 별자리에서 자신의 길흉을 간파하는 능력을 지닌다.

약 한 시간 전 집에서 출근준비를 할 때까지는 이런 기이한 느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그 순간부터 묘한 공기가 온 몸을 간지럽히듯 스치기 시작했다.

‘분명해’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누군가 날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 아직 서울에 있지는 않다’

문이 열리며 오민철이 양손에 커피 잔을 들고 들어섰다.

권총수는 오민철이 내미는 커피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특사를 받은 놈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죄를 지으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대책 없는 놈이잖아.”

오민철은 범인을 권악수로 단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형, 틀림없이 메릴린치나 브레이크 타임에서 연락이 올거야.”

메릴린치는 미국계 투자회사이고 브레이크 타임은 싱가폴 헤지펀드다.

메릴린치 경우는 천왕물산 주식을 15퍼센트 가까이 소유하고 있었다.

외국 자본들은 일단 회사 경영권을 확보하면 쓸데없는 살을 빼고 조정하면서 주가를 끌어 올린다.

이후 충분하다 판단이 서면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주식을 처분하고 빠져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천왕물산의 투기 자본들 경우는 조금 틀렸다.

천왕물산의 주식이 인수합병 때 보다 20퍼센트 정도 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빠져 나갈 때가 됐는데도 아직 시장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권총수는 알고 있다.

전철해가 사망한 지금 그들이 더 이상 천왕물산에 미련을 둘 필요 없다.

그렇잖아도 지금쯤 자신들이 보는 천왕물산의 주식은 오를 만큼 올랐다.

이쯤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전철해이다.

인수합병 작업을 하면서 그와 맺은 여러 가지 계약서와 법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만한 합의서가 있었다.

전철해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댓가를 원했고 그렇게 약속했다.

주식을 팔고 싶어도 그 약속으로 인해 팔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전철해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다.

대표의 사망으로 주식이 잠깐 동안 떨어질 가능성이 높고 더 떨어지기 전에 권총수에게 제의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말 되는데.”

오민철은 전화 올 가능성이 높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 여러 간부들이 있으나 권총수와 자주 대면하고 영향력 있는 발언을 가진 사람은 오민철이라는 걸 시장에서 모르지 않는다.

즉 오민철에게 전화가 올 가능성이 높으므로 잘 받으라는 의미였다.

“좋았어. 정신 바짝 차리고 머리 돌릴 테니까 염려마.”

오민철이 자신 있다는 듯 웃는다.

권총수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제25기 지원자 170명의 출국 서류를 정리하고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누구십니까?”

“메릴린치 한국지사 미스터 아서 입니다.”

메릴린치라면 이름깨나 있는 미국 투기자본이다.

오민철은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냐며 슬며시 물었다.

전화에 대비해 권총수는 모든 걸 가르쳐 주었고 오민철은 1분여 통화를 나누다 약속장소를 잡았다.

전화를 끊고 난 오민철은 외부에 나가있는 권총수에게 아서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얘기를 전했다.

권총수는 별 얘기 없이 잘 하라면서 끊었다.

타워호텔에서 만났다.

깨끗하게 머리를 빗어 8대2 가르마를 한 아서는 이제 고작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다.

서른다섯 살짜리가 이런 중요한 만남에 혼자 나온다는 건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 대표의 죽음 말입니다.”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오민철은 미소만 지었다.

‘형 쓸데없는 말 하지마. 애매 할 때는 그냥 듣기만 하고 고개만 끄덕여’

‘그 자리에서 대답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지만 잘 들으면 돼’

권총수가 던지고 간 말이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아서는 정색을 했고 예상대로 주식 매도 의사를 비쳤다.

오민철이 할 수 있는 얘기는 간단했다.

“가격만 맞으면 우린 언제든지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다.”

매수할 의향이 있다는 말에 아서는 다소 안심하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오민철이 아서라는 인물과 주식 거래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 권총수는 중국 대사관이 보이는 맞은편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서점은 주로 만화와 농도 짙은 포르노 잡지를 파는 곳이었는데 권총수는 꽂혀 있는 책을 뽑아 살폈다.

주인은 책은 사지 않고 이것 저것 뽑아 보다 다시 꽂아 놓는 권총수가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얼마요?”

한참 권총수를 미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격을 묻는다.

“이만 원이오.”

권총수는 재빨리 지갑에서 이만 원을 꺼내 주고 서점을 나왔다.

바로그때 중국 대사관 문이 열리고 차량 한 대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르릉!

권총수는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헬멧까지 완전히 뒤집어 쓴 권총수는 오토바이로 조금전 중국 대사관을 빠져나가던 검정색 승용차를 쫓기 시작했다.

중국 대사관을 빠져나간 검정색 승용차는 시청 앞을 빠져나가 광화문 쪽으로 달렸다.

운전석에는 마흔 초반 가량의 정장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차안에 음악을 틀어 놓고 여유있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광화문은 한가하다 할 정도로 차량통행이 많지 않았다.

팟!

사거리 20여 미터 전쯤 신호등이 노랗게 바뀌었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 능울력은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서대문 쪽에서 내려오는 차량과 종로에서 올라가는 차량들이 교차로를 메우는 사이 능울력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운전석 유리를 약간 내렸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고 블루투스로 연결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곧장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아내다.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오늘 아내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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