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탈출(3)
상대가 이쪽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기 위해서는 흰색의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
아직 헬기에서 흰색의 깃발이 보이지 않는다.
확인되기 전에는 소대원들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엄청난 무장을 한 헬기가 한번 쏟아내면 20여명의 목숨 정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면서 전상미는 헬기가 멀리 날아가 선회하기 직전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공격을 당해도 자신만 받겠다는 의도였다.
순식간에 50여미터 정도 이동한 뒤 완전히 몸을 드러내고 교신을 이었다.
“PK, 여긴 블랙잭 내 모습이 보이는가?”
주머니에 있던 블랙잭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을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헬기에서도 흰색의 깃발이 흔들렸다.
전상미는 블랙잭 손수건을 흔들며 말했다.
“PK, 수신했다. 이상!”
“블랙잭 국경을 넘어가면 5킬로 지점에 우리 부대가 있다. 즉시 안심하고 부대를 향해 이동하기 바란다 이상.”
“잘 알았다 PK.”
헬기는 교신 성공을 축하라도 한다는 듯 두어 번 전상미 머리 위를 회유하더니 국경너머로 사라졌다.
헬기가 사라지고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던 대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전상미를 중심으로 몰려 들었지만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GPS를 통한 연락이 왔다는 건 권총수가 개입한 분명한 증거라고 봐야 한다.
권총수는 믿지만 파키스탄 군을 아직은 신뢰할 수가 없다. 워낙 탈레반과 지근거리를 두고 있는 현 정권이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없어요.”
전상미는 굴곡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생각 있나요? 있으면 얘기 해보세요.”
상대가 우릴 유인하여 몰살 시킬수도 있다는 걸 알아 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모두가 의심은 하지만 위험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없는 듯 침묵했다.
“이동!”
전상미는 앞장섰다.
그건 어차피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우리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파키스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프카니스탄의 땅에서 탈레반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육로탈출을 결행한 것이다.
해가 떠올랐다.
마침내 허름하지만 철조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영토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우리나라 비무장지대 철조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냥 울타리 정도에 불과했다.
끊어지거나 오래되어 삭아 버린 곳도 있으며 철조망의 흔적도 없는 곳이 지천이었다.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면서 밀려올수도 있는 아프카니스탄 난민을 막기 위해 국경 봉쇄를 강화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최소한 지금 이곳은 무인지대였다.
전상미와 소대원들의 시선이 전방을 살폈다.
지뢰를 매설해 놓을 수도 있고 부비트랩이 설치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비트랩 같은 경우 대낮이 더 위험하다.
투명한 낚시줄이나 가느다란 양털실, 그리고 이지역에서 자생하는 잡초들끼리 엮어 수류탄이나 다른 폭약을 설치해 놓고 걸어가다 발로 차거나 걸리면 폭발하게 되어있다.
“대기!”
전상미가 앞장서더니 대검을 뽑아 지뢰탐지를 시작했다.
비록 계급이 없는 용병이지만 이런 일은 지휘관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신뢰를 얻는다.
“내가 하죠. 문도석이 나섰고 연이어 여기저기서 서로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섰다.
전상미는 빙긋 웃었다.
“걱정들 마세요.”
전상미는 곧장 탐지 작업에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대검으로 지면을 찔러가며 지뢰를 살폈다.
소대원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좌우 일 미터 정도의 공간만 집중 탐지하다 보니 속도가 빨랐고 십여 미터쯤 나간 뒤 일어섰다.
“여기서 걸리면 하는수 없죠.”
전상미가 땀을 흘리며 돌아서서 웃는다.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어 동료들은 탐지한 지점만을 골라 이동했다. 곧 완전히 아프카니스탄을 벗어나 파키스탄 영토로 들어섰다.
틀림없는 무전교신을 했지만 안심하지 못 한다.
전쟁터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다.
소속부대와 지휘관 이외의 정보는 항상 신중하게 접근하고 잘 걸러야 한다.
권총수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하여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지만 긴장을 풀기에는 모자란다.
헬기에서 불러준 파키스탄 국경수비대 위치를 찾기 위해 지도를 꺼냈다.
전상미는 지도를 보며 무전으로 불러온 숫자를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여깄는데.”
전상미 손가락이 PT 기지라고 쓰인 글씨를 가리켰다.
“동남쪽으로 3킬로.”
지도를 접고 동남쪽 방향을 바라본다.
지도에는 오른쪽으로 800미터 정도 내려가면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길을 걸어 부대로 가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산길을 택했다.
불편한 산길이지만 이상하게 편하다.
누구도 힘들다거나 좋은 길 놔두고 이 무슨 고생이냐는 불만 따위는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서로가 같은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헬기에서 전해준 PT기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국은 길을 찾아 내려가야 한다.
그 길을 만든 사람들이 PT기지 군인들이다.
길은 부대로 향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주르륵!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전상미는 미끄러지는 전투화를 바로 세우며 바위사이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아직도 말이 없다.
“지금 우리 죽으러 가는 것 아니잖아.”
문도석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융숭한 대접을 해주면 쪽팔리지 않겠어. 좀 여유를 갖자고.”
“십 분간 휴식!”
문도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응하듯 전상미가 휴식을 명령했다. 휴식이라는 말에 모두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전상미의 눈이 커졌다.
아직 위험지역에 있기 때문에 담배연기는 굉장한 위험물질이다.
탈레반이 잠복해 있다가 담배 냄새라도 맡는다면 공격당할 것이 뻔했다.
전상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문도석이 내뱉었다.
“마지막 담배라구.”
전상미가 무슨 뜻이냐는 듯 문도석을 바라보았다.
“들어갔는데 그냥 갈겨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담배를 피운단 말입니까?”
“난 그러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죠.”
다른 사람 모두 웃는다.
그건 문도석과 같은 생각이라는 동의이며 한편으로는 부대가 1킬로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최고조로 뚫어 오르는 긴장을 풀려는 것이다.
“절대 투항은 없어.”
전상미는 단호했다.
상대가 공격하면 이쪽에서도 방아쇠를 당긴다.
함정에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두 죽겠지만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낫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중앙으로 올라오면서 대지는 더욱 펄펄 끓기 시작했다.
“좋군!”
전상미는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이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걸 느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다.
권총수는 사무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고 간부들도 회의실 자리를 가득 메웠는데 하나 같이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권총수는 쉬지 않고 핸드폰 시계와 벽시계 보기를 반복했다.
현지 시간으로 오전 10시다.
바시오 장군의 전화는 헬기와 블랙잭 팀 교신이 현지 시간 아침 6시라고 했다.
교신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인근 국경수비대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일곱 시에 도착했다고 친다면 지금쯤 사우디 지사로 연락이 갔어야 한다.
“여전히 무소식인가?”
권총수가 사우디 박호명 지사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직!”
대답이 없다.
권총수는 두말않고 전화를 끊었다.
지이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권총수는 재빨리 액정을 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대표님, 전 흑표소대장 전상미에요.”
“전 중사.”
권총수 목소리가 떨린다.
오래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전장을 누비다 보니 숱한 우여곡절과 아찔한 위기에 한두 번 직면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애를 태우며 마음이 흔들려 보긴 처음이다. 차라리 자신이 위기를 겪었으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모두 무사한거요?”
“예! 감사합니다. 우리 때문에 대표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다는 걸 압니다.”
“일단 사우디 지사로 복귀한 뒤 다시 통화 합시다.”
권총수는 간단한 인사 몇마디를 더 나눈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 모두 안도의 표정들이다.
권총수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축하합니다.”
직원들은 서로를 향해 축하 한다면서 악수를 나눴다.
권총수는 오랜만에 웃었다.
***
손님이 밀려든다.
예약하지 않은 손님은 무조건 순서대로 받고 있었다.
룸살롱은 밤 11시부터 피크이다.
월요일인데도 붐볐다.
술을 나르는 웨이터들과 손님의 지명을 받고 방을 찾아가는 여종업원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그들은 아홉 시가 갓 넘자마자 들어왔다.
돌어올 당시 어디선가 1차를 마신 듯 불콰한 얼굴인데 지금 11시 30분이고 벌써 발렌타인 30년산을 9병 째 들이고 있었다.
아직 이들이 누군지 모른다.
처음에는 고가의 술을 주문해서 좋았고 아가씨들 가슴에 백만원짜리 수표를 찔러 넣어 흥분했다.
웨이터 실장인 김진국은 오늘밤 잘하면 제대로 매상 한 번 올리겠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일곱 병째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불안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은근슬쩍 걱정이 되어 세 사내 몰래 좌중을 주름잡는 물주로 보이는 사내의 사진을 찍어 대기실로 들어섰다.
주위 다른 동료들과 사진을 나누며 신분파악에 열을 올릴 때 누군가 말했다.
“그 사람 아냐? 천왕그룹 사위라고 언젠가 신문에 났던 인물.”
사실 룸살롱이라는 곳이 오묘한 곳이다.
단골들에게는 외상 거래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가끔은 왕창 먹고 마신 뒤 배째라고 들어 누운 사람들도 있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무전취식 운운하며 가벼운 벌금형에 그친다.
매상을 올리는 만큼 김진국의 몫이 높아지지만 오늘처럼 수직 상승하다 보면 은근슬쩍 걱정이 된다.
잘못되면 자신이 모든 것을 토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천왕물산 전철해 대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김진국은 과감히 30년산 한 병을 써비스로 넣었다. 그러자 대뜸 백만원 짜리 수표가 팁으로 나온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김진국은 넙죽 허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김진국이 방을 나가고 1분이 채 되지 않아 전철해가 화장실을 간다며 나섰다.
룸 안에 화장실이 있지만 앞서 여종업원이 들어간 것이다.
전철해는 닫힌 화장실 문을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저년 뭐하는데 이렇게 안 나오냐. 아 이년아 애 낳냐.”
그러면서 밖으로 사라졌다.
화장실은 조용했다.
거의가 각자 룸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기 때문에 공용화장실은 주로 웨이터들이 사용한다.
마치 백화점 화장실에 온 듯 고요한 화장실로 들어선 전철해는 소변기 앞에 서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신 술의 양이 많은 탓인지 소변 줄기는 좀체 멎을 줄 모르고 전철해는 취기로 약간 상체를 흔들거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달아오르긴 했어도 초췌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지난 시절은 말이 재벌가 사위였지 차라리 하인이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