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95화 (495/651)

제495화: 깨어나지 못하는 밤(1)

맞다.

정확히 삶의 핵심을 뚫은 말이다.

히죽!

일어선 리페퐁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낚시꾼이 고기가 없어지면 안 되지 않겠나?”

노련한 경찰이 아니고서는 결코 뱉어 낼 수 없는 말이다.

갱들이 있고 그들로 인해 경찰이 살아간다.

리페퐁은 음과 양의 이치마냥 세상이 어느 한 방향으로만 살고 흘러간다면 그건 더 위험하다는 의미로 오늘의 사건을 갈무리한 것이다.

‘멋진 말이긴 한데’

올리비에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사막의 흑새가 엄청난 두통거리 하나를 제거해 주었군’

만족이다.

일 년에 르 밀리유 갱단들에게 희생된 경찰관만 평균 십여 명이다.

서열 다툼이 일어나면 당분간 그들의 총구는 안으로 향하지 밖으로는 돌려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평화가 오는 건 맞다.

CIA 프랭크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물론 맥보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권총수 또한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또 CIA에 신세를 졌다.

프로의 세계에서 공짜는 없으니 언제 어떤 형태의 도움을 요구할지는 모른다.

“두 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프랭크는 오민철과 지소현을 향해 웃었다.

어차피 삶은 아찔한 것이다.

온실 속에서만 성장한 지소현에게 이번일이야 말로 지워지지 않을 상처이면서 삶의 치열함을 알게 해준 사건인지도 모른다.

오민철은 가만 손을 뻗어 지소현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행은 헤어졌다.

***

한국의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는데 족히 수십 명이다.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오민철의 누님이었다.

이어 휠체어를 탄 어머니와 자형들이 오민철을 끌어안았다.

입국장은 금방 눈물 바다가 되었고 권총수는 한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권 대표, 다친데는 없어?”

채명천이 다가와 묻는다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뒤이어 다가온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셨군요.”

직원들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나타난다.

“걱정들 많이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운 좋게 오이사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신문 보셨습니까 대표님?”

강순태 경리과장이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슬며시 건네준다.

신문이다.

국내 유명일간지였는데 파리 사건을 사회면 전체를 할애하여 보도했다.

권총수는 대충 머릿기사만 살폈는데 한국인 A씨라는 알파벳 표기로 자신을 지칭했다.

하지만 거대 용병회사 대표라고 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은 누군지 알 것이다.

“총수야. 아니지 이제 대표님이지.”

둘째 누님 오민심이 다가와 손을 잡는다.

“대표님께 이 고마움을 어떻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오민심은 눈물을 흘렸다.

이어 오민철의 어머니가 다가왔고 가족들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권총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민철이 서둘러 식구들을 데리고 떠났다.

일찍 비켜주는 것 만이 권총수가 편안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시죠!”

강순태 경리과장이 앞장을 섰다.

채명천이 옆을 따르면서 그동안 있었던 회사업무에 대한 보고를 했다.

흰색 밴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채명천은 물론 돌아가면서 각 부서 책임자들이 보고를 했다.

한 시간여 가까운 보고가 끝나고 권총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악수의 8.15특사는 분명하다는 보고가 가장 귓가에 남는다.

천왕물산은 이미 권악수의 손을 떠나 헤지펀드 손에 들어갔다.

현재 천왕물산의 경영을 지휘하는 사장은 전철해이다.

물론 권총수측에서 두 명의 이사를 투입하여 회사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와 계획에 관여하고 있다.

‘8.15’

광복절까지는 두 달 조금 더 남았다.

천왕그룹의 상당수 계열사는 지금 여러 투기자본들의 표적이 되어 있다.

권악수가 나온다고 해도 워낙 기울어져 있어 회사를 바로 세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때는 국내 재계서열 1위를 유지하며 독야청청했지만 오늘날은 공중분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흘러다닐 만큼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대표님.”

강순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능울력이라는 놈 말입니다. 중국 대사관.”

팟!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아직 서울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에 대한 우리의 조사가 진행되었다는 건 모르는 눈치입니다. 어떡할까요?”

차안의 간부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어떡하긴, 전쟁에서 패하면 죽어야지.”

권총수가 사무적으로 내뱉었다.

한 달 남짓 집을 비웠을 뿐인데 마치 몇 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다.

그 만큼 이번 사건이 미친 충격의 강도가 권총수에게 크다는 뜻이다.

되돌아보기가 싫을 만큼 너무 섬뜩한 사건이었다.

결혼으로 새로 꾸려진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을 아찔한 일이었다.

마당 가운데 놓인 바위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피로가 일시에 밀려오며 순식간에 운기조식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눈을 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주천 하는데 대략 20여분 내외가 소모되는데 오늘은 40여분 가까이 흘렀다.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 피로도가 깊다는 뜻이었다.

눈을 떴으나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무념무상이다.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이 없고 깨어 있지만 어떤 것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어둠속에 있지만 어둡지 않고 하늘과 땅이 모두 내 몸속에 들어왔다.

피식!

권총수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잡념이 없을수록 정진 속도가 빠르다.

‘놀랍군’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공이 파도치듯 꿈틀 거린다. 출발할 때보다 더 높아졌다.’

한 달이 채 안된 짧은 시간에 육식귀원의 깊은 경지를 지나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설마 반노환동(返老還童)까지 가지는 않겠지’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반노환동의 경지에 들어설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늙음을 돌이켜 아이로 돌아간다는 반노환동.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경지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침 일찍 찾아가 면회 신청을 했다.

성명과 주소를 쓰고 수감자와의 관계에 친구라고 망설이지 않고 써 넣었다.

단지 이름이 권총수, 권악수라는 것에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고 했다.

권총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지 않은 민원인들이 면회를 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남녀노소 찾아 오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다.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도 보이고, 머리를 파랗게 물들인 여자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한다.

그런가 하면 오뉴월 뙤약볕에 타버린 늙은 노인이 시커먼 때에 젖은 와이셔츠를 입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멈칫!

권총수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왜 그럴까.

왜 면회 오는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는 것일까

예전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자신의 행동이다.

‘흐흠!’

권총수는 길게 한숨을 쉰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것이 떠오른 것이다.

가족(家族).

빌어먹을 단어가 다시 가슴을 일렁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더욱 가족이 그리울 것이라는 그 옛날 원장 수녀의 말이 떠오른다.

“권총수씨!”

양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지만 선뜻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장웅철 변호사입니다.”

“아!”

천왕그룹 법무팀장이다.

“장 팀장이?”

권총수는 팔목시계를 보았는데 이제 막 10시 넘었다.

재벌 총수들의 특별 면회에 대한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변호사를 비롯해 측근들이 돌아가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자신들만의 시간을 즐긴다.

누가 더 많은 특별면회를 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소 인심과 비즈니스에 대한 성적이 보인다는데 권총수는 넌지시 물었다.

“자주 오시나 보죠?”

장웅철을 따라가며 물었다.

“예! 한 달에 20일 이상 옵니다.”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법무팀장 한 사람이 한 달에 20일 이상 면회를 올 정도라면 지금 권악수 곁에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세와 경영전략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경영은 회사가 아니라 사람이다.

스르륵!

도어 손잡이를 열고 들어선 권총수는 멈칫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권악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십여 평이 안될 것 같은 공간이다.

권총수는 권악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으며 장웅철은 볼일이 있는 듯 밖으로 나갔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요즘 재미가 너무 좋다고 들었소.”

권악수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속에는 차가운 살의가 듬뿍 들어 있었다.

천왕물산을 삼킨 투기자본속에 권총수의 지분이 적지 않다는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어떤 것을 가져갈 생각입니까?”

M&A로 천왕그룹의 어느 계열사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비아냥이다.

하지만 권총수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우리나라 재벌들 걸핏하면 사람 불러 하루종일 특별면회소에서 노닥거린다더니 아늑하고 좋습니다. 이런 곳에서 교도소 생활을 하니 출소해서도 우리 회장님들께서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또 죄를 짓는 것이군요.”

그때 나갔던 장웅철이 들어왔는데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커피 두 잔을 가져다 놓는다.

“마시면서 얘기 나누시죠.”

한마디 하고는 자신은 다시 자리를 비운다.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자판기 커피가 아닌 테이크 아웃용 흰색 컵에 담긴 유명 브랜드 커피다.

권악수는 커피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자신의 비아냥에 권총수가 교도소가 편하니 또 죄를 짓는다고 맞받아 치자, 권악수의 표정이 처음과는 사뭇 다르다.

“8.15특사로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면회온 이유가 뭔가?”

권총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곧 출소한다고 해서 얼굴 한 번 보러 온거죠. 아픈 곳은 없습니까? 얼핏 듣기로 폐가 나쁘다고 들었는데.”

권악수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눈앞의 권총수는 공존불가의 적이다.

그런 적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진지한 얼굴 표정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 같지 않았고 진심이 느껴진다.

“흔하디 흔한 말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걸 잃는다고 하죠. 담배는 폐에 가장 큰 적입니다. 웬만하면 금연하셔야 할 것입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뵙죠.”

권총수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정말로 내 건강이 걱정되어 왔나?”

권총수는 돌아섰다.

깊은 시선으로 권악수를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옛날 버릇 고치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탁!

문이 닫히고 권총수는 사라졌다.

하지만 권악수는 한동안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옛날 버릇’

마치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권총수라고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누구냐고 물어도 권총수고, 세 번째 누구냐고 물어도 역시 권총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출소하면 그때부터 권총수를 죽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있었다.

그런 권총수가 불쑥 찾아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고 옛날 버릇 버리지 않으면 큰일 날것이라는 충고를 한다.

벌컹!

문이 열리고 급하게 장웅철이 들어섰다.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이어 권악수의 안색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권총수가 빨리 돌아간 것을 보면 특별한 일이 있어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