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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94화 (494/651)

제494화: 잿더미(3)

하지만 창문은 멀쩡했는데 혹시 모를 외부에서의 총격에 대비해 전부 방탄유리로 대체했다.

그것도 통유리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탈출구는 창문뿐이었으므로 모두가 필사적으로 찍고 박고 때렸다.

탕탕!

그리즈만 역시 창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흔적만 남을 뿐 깨지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적이 바깥에서만 들어올 줄 알았지 현관문을 통해 들어와 안에서 자신을 몰아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왕좌왕.

프랑스의 밤하늘을 수놓는다는 그야말로 어둠의 스타들이 실성한 사람처럼 날뛴다.

사람을 쫓고 죽여봤을 뿐 아직까지 공포라는 것을 체험해 보지 않은 탓에 언더 보스들의 살고자 하는 욕구는 컸다.

쾅!

퍼퍽!

깨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잃지 않고 던지고 부수고 두들겼다.

하지만 창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즈만의 권총이 만들어낸 흠결 말고는 터럭만한 스크래치도 없다.

헉헉헉!

일부 언더보스들은 지친 듯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 거렸다.

“안 되겠어 일단 출입구를 더 단단히 막아야 돼!”

데샹이 소리쳤다.

회의를 했던 직사각형의 긴 탁자를 출입문에 가져다 붙였고 쌓을 만한 물건은 모조리 가져다 놓았다.

더 쌓고 싶지만 쌓을 물건도 없다.

회의 용도로만 사용하는 방이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가로막을 무거운 가구는 없었다.

들썩!

문이 꿈틀하는 것이 밖에서 누군가 미는 모양이었다.

그리즈만은 입구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아직 십여 발의 실탄이 남았고 떼거리로 몰려온 것이 아니라면 희망을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바로 그때였다. 문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전체로 불이 번져갔다.

문 앞을 쌓아 놓은 물건들이 대부분 목조였기 때문에 불은 삽시간에 활활 타올랐다.

화르륵!

쿠쿵!

불길은 순식간에 실내로 번졌다.

특히 바닥에 깔아놓은 페르시아산 양탄자가 타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쿨룩쿨룩!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일제히 창문 쪽으로 몰려갔으나 거기까지가 대피의 한계였다.

화아아아!

그리즈만의 눈이 붉게 변했다.

연기를 마시면서 호흡 곤란과 더불어 눈이 쓰리기 시작한 것이다.

탕탕탕!

발작적으로 출입문 쪽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쿵쿵쿵!

몇 명의 언더보스들은 창문을 깨기 위해 급기야 자신의 머리로 창문 유리를 들이 받았다.

결코 인간의 머리에 의해 부서질 방탄 유리가 아니다.

사내들은 풀썩 주저앉으며 절망의 표정을 했다.

끝이다.

모든 것이 끝이다.

전화도 불통이다.

잘되던 전화가 갑자기 잡음만 일어나고 통화가 되지 않는 건 누군가 통화 전파 방해장치를 이용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

그때 비명이 터졌다.

천장에서 녹아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맞았는데 몸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을 끄기 위해 처음에는 손으로 두들기다 급기야 바닥을 뒹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르륵!

사내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다 불길에 완전히 파묻히더니 잠잠해졌다.

코 끝을 파고드는 살타는 냄새에 모두가 공포에 젖는다.

으악!

꺼억!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불에 타고 있었다.

옷을 벗어 던지며 최대한 불길에서 피해보기 위해 몸부림 쳤으나 금세 한계에 부딪쳤다.

심지어 팬티까지도 벗어 버렸는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옷을 벗음으로 인해 열기가 직접 피부에 닿아 더욱 뜨거울 뿐이었다.

아아!

누군가 허무한 신음을 흘리며 숨을 거둔다.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자의 관이 1,300도 화장로에 들어가 재로 변하는 건 보았지만 산채로 불에 태워지리라는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헉!

살려...줘!

최대한 창문쪽에 붙었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불덩이다.

온 몸에 불을 감고 바닥을 나뒹구는 언더 보스들을 보는 그리즈만의 눈이 심하게 떨린다.

차라리 총에 죽는다면 이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와르르르!

그때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입구가 갑자기 좌우로 갈라진다.

마치 거센 물결처럼 엄청난 기세의 바람이 들이닥쳤다.

파아아아!

워낙 강한 바람에 불길이 춤을 추더니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불은 꺼졌지만 실내엔 연기가 가득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어엉!

던지고 찍고, 머리로까지 박아도 꿈쩍 않던 방탄 유리가 통째 날아가 버린다.

순간 실내를 가득 메운 연기가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시야가 확보되었는데 드러난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바비큐를 떠올렸다.

언젠가 양 한 마리를 통째 바비큐 해먹은 일이 있었다.

맛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새카만 숯덩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검게 탄 부분은 칼로 도려내고 안에 있는 속살만 먹었지만 지금 눈앞의 풍경이 그 양을 떠올리게 했다.

새까맣게 타서 죽은 이들도 있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고 꿈틀거리는 이도 있었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실내를 쭉 훑었다.

“열둘, 정확하네!”

오민철이 숫자를 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민철은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툭!

투툭!

MP5기관단총의 총구로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살핀다.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지.”

왼손에 그리즈만을 비롯한 언더보스 열한 명의 사진을 갖고 있었는데 화상을 입은 시신과 얼굴들은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아무튼, 한 놈, 두 놈, 셋!”

오민철은 총구로 확인을 해가며 숫자를 세었다.

“일곱! 뒈진 놈.”

“으음!”

“꾹!”

여기저기서 쥐어짜는 신음을 흘린다.

칼로 찌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화상을 입었을 때의 통증만큼 무자비한 것은 없다.

밟아 버린 지렁이처럼 언더보스들은 꿈틀거렸다.

척!

권총수는 그나마 가장 상태가 나은 그리즈만을 향해 걸어가 섰다.

그리즈만은 구석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머리 일부가 불길에 타버렸고 얼굴과 왼쪽 어깨에 수포가 나타나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본다면 2도 화상 정도에 해당한다.

권총수를 잠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리즈만을 내려다 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반쯤 타다 만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슥!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권총수는 한참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스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그리즈만씨, 그래도 보스가 낫겠죠?”

“나...담배 하나만 주게.”

권총수는 담배 한 개비를 물려주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아기를 아십니까? 뱃속에 있는 아이 말입니다. 아이가 생기고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아이는 크게 성장하죠. 그러다 열 달이 가까워 오면 발로 차기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한마디로 클 만큼 컸으니 세상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사인이죠.”

권총수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무릎 위에 양 팔꿈치를 짚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험난한지 모르는 아이는 나가고 싶어 안달하죠. 엄마의 뱃속이야 말로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이라는 걸 모릅니다. 그렇게 태어나 아이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도중 힘들어 자살하기도 하고, 아니면 사고로 죽고, 병으로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볼 때 큰 고생 없이 잘 살다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리즈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얘기한 뱃속의 아이는 그리즈만 자신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갱 노릇이나 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면 만고에 편하고 행복할 텐데 왜 뒷골목이 아닌 다른 세상속 일에 손을 댔느냐는 것이다.

엄마의 뱃속으로 대변되는 뒷골목에서만 살았으면 누구도 건들지 않고 큰소리치며 살 것이었다.

“미국의 마피아도 그렇고,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들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 내 손에 많이 죽었죠.”

말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권총수는 다시 허리를 바로 세웠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음!

아아!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권총수가 말했다.

“형 빨리 보내세요.”

권총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민철은 살아 꿈틀대는 생존자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터텅!

총소리가 들리며 고통스러워 하던 언더보스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편한 죽음도 큰 자비라고 했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그리즈만 혼자다.

그리즈만은 담배를 필터까지 태우고 있었다.

담배를 놓는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는 걸 아는 듯 악착같이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필터는 그가 살아온 인생처럼 뜨겁다.

툭!

끝내 필터를 떨어뜨린다.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감히 복수를 시도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 사막의 흑새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쭈그리고 있는 그리즈만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보스.”

권총수가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 오민철의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두두두두!

그리즈만의 몸이 벌집이 되었고 딱 하는 마지막 총알이 나간 소리가 들리고 오민철도 돌아섰다.

경찰들이 몰려들었다.

소방차는 왔다가 20여분 정도 대기만 하고 다시 돌아갔다.

정 사복 경찰관들이 저택을 가득 채웠는데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딸칵!

리폐퐁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방안을 한 번 살피더니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수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수영장에 시신은 건졌지만 핏물은 그대로이다.

이건 살인이 아니라 완전한 청소였다.

‘도대체가’

담배를 문 입술을 비집고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40년 동안 프랑스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거대 갱단이 하루 아침에 이 꼴이라니’

영화라고 해도 이런 연출은 어려울 것이다.

“골치 아프게 생겼습니다.”

생활안전과 올리비에 과장이 걸어왔다.

그도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심각한 표정이다.

“우두머리에서부터 언더보스들까지 완전하게 몰살당해 버렸는데 괜찮을까요? 당분간 피가 강물처럼 흐를텐데.”

공석인 보스 자리를 얻기 위해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든 말든 경찰이 무슨 걱정인가?”

리폐퐁이 쭈그리고 앉더니 오른손으로 붉게 변한 수영장물을 휘젖는다.

물살이 생기면서 작은 파도가 일었다.

“뒷골목 덕분에 우리도 밥을 먹는 것 아니던가? 죽일놈 나오면 죽이고 체포해 교도소에 보낼 놈 보내면 되는 거지.”

자신들끼리 어떤 짓을 저지르던 신경 쓸 것 없다.

우린 법을 위반하는 놈들만 부지런히 잡아들이면 된다는 얘기였다

무책임하게 뱉어낸 말 같았지만 그 안에는 상당한 뜻이 있었다.

견제(牽制)와 공존이 담겨있는 말이다.

어차피 악은 끊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둠이 사라지면 세상이 평화로울 것이라고 믿는다.

평화는 균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면 또 다른 독버섯이 자라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통제를 하고 선을 넘어서면 그때 잡아들이면 될 일이지 넘지도 않는 선을 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더군.”

어느 한곳이 득세를 하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모자라서 서로 충돌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치 아니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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