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잿더미(2)
끙!
권총을 뽑기 위해 노골적으로 힘을 썼다.
뽑았다.
덜덜덜!
그런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현상인가.
권총을 들어 올려 권총수를 겨누려고 하는데 팔이 떨린다.
기타줄도 이렇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급기야 왼손으로 떠는 오른손을 부축할 겸 거머쥐었지만 소용없이 양팔 모두가 떨린다.
“2층에 몇 명이 있습니까?”
“여...열둘...열셋, 경호원 셋.”
“합이 열여섯?”
라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오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권총수 자신의 감각에도 열여섯 명의 사람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권총수의 왼손이 뻗어나갔다.
푹!
라비오의 미간에 소림의 탄지신통이 틀어박혔다.
즉사!
무쇠도 뚫는 탄지신통이 라비오의 미간을 부서버린 것이다.
그는 힘없이 무너졌고 권총수는 뒤뜰을 걸어 저택을 오른쪽으로 돌았다.
대문이 있는 저택 입구를 중심으로 주차장인데 지역보스들이 타고 온 승용차들이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과 저택 앞마당 사이에는 일 미터 오십 센티 높이의 황금사철나무가 담장역할을 하며 가로막고 있다.
거기다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어 수영장은 물론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을 주차된 차 안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사내들은 담장너머는 자신들 영역이 아니라는 듯 각자 일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해온 차량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차량들은 마치 군대에서 수송대 사열하듯 정확히 앞바퀴를 주차 끝선에 물고 반듯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커다란 소나무 아래 서서 자로 잰 듯 나란히 서 있는 차량들을 보며 권총수는 중얼거렸다.
“내 수고를 덜어주겠다는 건가.”
슉!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이 날아갔다.
날아간 칼은 첫 번째 조수석 창문을 뚫고 들어갔다.
팍!
이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경호원의 목을 관통하며 유리를 뚫고 나갔다.
퍼억!
푹!
칼은 두 번째 차량의 유리문을 뚫고 들어가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내의 목을 다시 관통했다.
뭔가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비명이 없다.
요란하지도 않았다.
이기어도술은 말 그대로 기를 이용해 칼을 말(馬) 부리듯 한다는 뜻이다.
내공을 이용해 마음대로 칼이나 검을 조종하는데 이기어도술을 펼치는 이 보다 무공의 경지가 낮으면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도주도 불가능하다.
단지 흠이라면 강력한 도법인 만큼 내공소모가 많다는 것인데 권총수는 작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휘이이!
날아갔던 칼은 다시 돌아왔고 탁 손잡이를 낚아 쥐었다.
‘11번째’
칼은 11번째 인물까지 공격했다.
스으으으!
하지만 권총수는 몸을 날려 맨 끝에 있는 승용차를 향해 갔다.
무공을 모르는 11명이다.
내공소모가 클 이유는 없으나 한 가지 강력한 장애가 있었다.
승용차 창 유리문이었다.
썬팅까지 된 창문은 단단할 수밖에 없고 한 명을 제거하는데 좌우 두 번의 유리를 뚫어야 한다.
선팅 된 창문의 강도는 노화순청의 경지에 오른 고수급 정도 될 것이다.
웬만한 칼로는 찌를 수 없는 강도다.
깨진 창문으로 보는 운전석 사내는 움직이고 있었다.
목에서 피가 흘렀지만 10명째 까지는 칼이 목의 정중앙을 통과하며 단번에 숨통을 끊었지만 마지막 11번째 창문을 뚫고 들어오면서 더욱 약해진 칼은 목을 베듯 지나갔다.
그래서 아직 살아있었고, 핸드폰 번호를 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파르르르!
눌러지지 않는 모양이다.
덜컹!
권총수는 차량의 문을 열었다.
사내는 비몽사몽인 듯 권총수가 문을 열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계속 번호 하나를 누르기 위해 애썼다.
권총수는 말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주루룩!
목은 상당히 깊숙하게 베어졌고, 피는 계속 흘러나왔다.
툭!
사내는 끝내 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보아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보였으나 들리지는 않는다.
퍼억!
결국 사내는 옆으로 쓰러졌고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잠시 사내를 바라보던 권총수는 몸을 돌렸다.
“형 현관입구로 와!”
권총수는 전음을 날리고 황금사철 울타리를 넘어 저택 현관을 향해 날아갔다.
스으으!
혹시 놓친 사람이 있는지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최소한 마당에는 없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오민철이 기관단총 MP5를 들고 다가왔다.
“별일 없었지.”
혹시 생존자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안 보이던데, 밖은 거의 처리 된 것 같아.”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문은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그다지 경계하지 않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1층 거실에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문이 열린다고 해도 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개를 돌려 적이라는 걸 확인 했을 때는 늦다.
오민철이 앞서 들어갔는데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아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무슨 일이냐는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오민철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드르르륵!
MP5 기관단총 소리가 울렸다.
소음기를 끼웠지만 닫힌 공간인 탓에 소리는 제법 컸고 세 사내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오민철은 걸어가 사내들의 생사를 확인한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흘긋 바라보았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야?”
오른쪽 소파로 엎어진 사내 옆에 놓인 무전기가 울렸다.
오민철은 무전기를 들었는데 거친 외침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켐부 왜 말이 없어. 이런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무전기속 목소리 주인공일 것이었다.
다다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던 사내가 흠칫했다.
무전기를 들고 서 있는 오민철을 발견한 것이다.
계단 중간쯤에 선 사내는 그리즈만의 비서 로랑이었다.
“이...이런!”
로랑은 재빨리 다시 뛰어 올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드르륵!
오민철의 총이 가만두지 않았다.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로랑은 계단을 굴러 떨어져 일층까지 내려왔다.
누구든 그리즈만과 만날 때는 비무장이다.
즉 방안의 사람들 모두 총기를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그리즈만이 서랍에만 매그넘 한 자루가 있을 뿐이다. 그리즈만이 그 매그넘을 꺼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각자 자신들의 경호원에게 연락을 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쳐죽일 놈 도대체 전화 안 받고 뭐하는 거야.”
“오숑, 오숑!”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지만 경호원들로부터 응답은 없다.
“저길 봐.”
누군가 창문 너머로 피로 붉게 변해 버린 수영장을 가리켰다.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갔다.
물 위에 두 구의 시신이 둥둥 떠 있었는데 신원확인은 되지 않았으나 온통 시뻘건 핏물이다.
문제는 심각했다.
마당에 움직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한편 파리 경찰청장 생활안전본부장 리폐퐁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생활안전본부장이면 경찰청내 서열 3위이다.
정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육개월 전부터 휴가를 허용한 것은 다른 직업을 찾아 거기에 익숙해지도록 하려는 국가적 배려이다.
하지만 리폐퐁은 퇴직하고 어딘가에 취직을 할 마음은 전혀 없다.
아내는 3년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과 딸 둘이 있는데 모두 출가했다.
떠난 아내가 그립긴 하지만 이제는 혼자 살고 싶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다달이 나오는 연금을 받아 등산도 하고 낚시도 다닐 예정이다.
똑똑!
노크소리에 이어 마흔 중반 정도 되는 사내가 들어섰다.
생활안전부 올리비에 과장이다.
생활안전부는 민생에 관련된 모든 사건을 담당한다.
강력 사건에서부터 갱단들을 상대하는 조직폭력등 시민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범죄를 다룬다.
“그만 두는 사람에게 아직도 보고할 일이 있는가?”
“전화 한번 받아 보시죠?”
“누군데 그러나?”
근무 중에는 절대 사적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건 철칙이고 특히나 퇴직을 코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청탁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전화기를 꺼놓을 때가 태반이다.
자신의 핸드폰은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데 다가가 꺼내 액정을 보았다.
화면을 터치하여 걸려온 전화를 훑었는데 모두 11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 한 개의 번호였다.
“누군가?”
“그리즈만씨입니다.”
그리즈만이라는 말에 리폐퐁의 눈이 커졌다.
오래됐지만 몇 번 만나 식사를 한 경험이 있다.
뒷골목을 이끌어가는 거물답게 정계와 파리시의 여러 분야에 있는 고위 관료들과 절친하며 특히 현 시장과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리폐퐁이 서랍을 열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즈만의 전화번호는 아직 기록되어 있다.
“알겠네. 자넨 그만 나가보게.”
올리비에 과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리폐퐁은 중얼거렸다.
“거래가 있긴 하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에게 식사 대접을 받으며 승용차 한 대를 선물로 받았다.
물론 지금은 팔아 버리고 다른 차를 타고 다니지만 4만 유로가 조금 넘은 차량이었다.
수첩을 살피듯 저장된 번호를 훑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그리즈만의 연락처를 찾아냈고 번호를 눌렀다.
“나요! 전화를 하셨다고?”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받을 일이 없으니까. 인생 정리하는 수순에서 여기저기 인연을 만들어 봤자 좋을 일 없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도와주시죠. 아주 급합니다. 누군가 총을 들고 쳐들어왔는데 지금 대항할 여력이 없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어느 누가 감히 르 밀리유 두목을 위협한단 말입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 만나서 하기로 하고 어서 경찰을 보내주십시오. 밑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부장님 귀에는 들리지 않나본데.”
“전혀!”
“권총이 아닙니다. 기관단총입니다.”
“부하들 많이 있잖습니까? 당신 명령 한마디면 수십 명의 부하들이 들고 일어날 텐데.”
“리폐퐁 부장님, 그래서 경찰력을 보내줄 수 없다는 뜻입니까? 파리 시민으로 지금 위험을 신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즈만씨 아직도 당신 말 한마디면 내가 쩔쩔매고 기계처럼 움직일 줄 알았소. 우리가 식사한 지가 10년이 넘었죠.”
그 정도면 과거의 인연을 드러내며 이런 부탁 한다는 것이 뻔뻔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흐흐! 당신에게 투자했던 모든 영수증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던가?”
“오호! 그러십니까? 그럼 지금 당장 파리 경찰청 감찰부에 투서 하시지요. 아니면 기자를 불러 기사화하던지, 난 당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지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뭘 안단 말인지?”
“나중에 지옥을 갈지 천국을 갈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 세상에서 만납시다. 우리 경찰은 사막의 흑새가 오늘 당신집을 방문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출동하거나 반응하지 않기로 했죠.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죽일 늙은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리폐퐁은 혀를 찼다.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울린다.
그건 누구도 앞을 막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쾅!
누군가 앉았던 의자로 창문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