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잿더미(1)
누구도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는 사람이 없었다.
“데샹!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자 그리즈만이 직접 지목을 했다.
데샹의 안색이 굳어진다.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 쳤다가 큰일 날 뻔 했는데 이제는 자신더러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만한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입을 잘못 놀려 설화(舌禍)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괜찮네. 조직을 위해서 하는 말에 누가 뭐라고 하겠나?”
기탄없이 말해보란 뜻이다.
그렇다고 기탄없이 까발렸다가는 대문을 나가기도 전에 시체가 될 것이다.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몇 번에 걸친 우리의 공격을 쥐새끼처럼 빠져나갔네. 덫을 놨는데도 걸리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다면 놈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 않을까요?”
“알고 있나?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말이야?”
“저는 모릅니다.”
“나는 알 것이라고 하는 말 같은데 나도 모른다네.”
“그...그러면.”
말문이 막혔다.
데샹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는데 누군가 이 난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편 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샌강이 흐르고 있었다.
저택은 샌강 하류인 푸아시 인근에 있었는데 파리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지역이다.
도심을 관통할 때와 달리 강에서는 고기를 잡는 배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두 명의 낚시꾼도 그때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양버들 아래 앉아 낚싯대를 펼쳤다.
“저 곳이라고?”
벙거지 모자를 쓴 오민철이 물었다.
낚싯대를 펼쳐 던지던 권총수가 빙긋 웃었다.
“사람들 많은데.”
천리지청술은 저택 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각 지역들을 불러 회의를 하는 모양이군.”
권총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민철은 움찔했다.
웃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긍정적이며 즐거운 감정의 표시가 아니다.
특히 지금 권총수의 웃음은 섬뜩했다.
강호무사들은 분노가 극에 이르면 웃음을 흘리는 모양이다.
권총수는 살기를 가득 머금을 때마다 지금처럼 웃는다.
“형 전쟁은 흥분하면 안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민철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운이 우리 쪽이야. 아무리 르 밀리유가 강한 갱단이라고 하지만 오늘 저곳을 불바다 만들어 버리면 웬만해서는 재기하지 못할 거야.”
“그렇잖아도 죽일 놈들이 많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지역 보스들까지 모였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게 없지.”
억지로 참고 있다.
권총수는 수시로 무형의 경기를 쏘고,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하며 오민철의 끓는 피와 감정을 가라앉힌다.
오민철이 평소와 달리 이토록 흥분한 건 지소현 때문이다.
자기 인생 조각나는 건 개의치 않으나 한 여자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길 뻔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참을 수가 없다.
스윽!
낚싯줄은 있지만 바늘은 없다.
그건 고기를 낚기 위해온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슥!
권총수가 담배를 피워 물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즈만은 점심을 항상 12시 정각에 먹는다고 했던가.”
20년 가까이 르 밀리유를 지배해 오면서 정오에 점심을 먹는 습관은 아직 변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15분여 정도 남았다.
보스의 점심시간에 맞추기 위해 모두가 아침을 비웠을 가능성이 높다.
너무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식사 조절을 잘해야 한다.
오랜만에 보스와 식사하는데 왕성한 식욕을 보이지 못한다는 건 자칫 그리즈만의 분노를 유발 할 수 있는 일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리즈만이다.
자신은 맛있게 먹는데 지역 보스들의 포크나 나이프가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다는 건 상황에 따라서는 패죽일 만큼 기분 나쁜 동작들일 수 있었다.
존경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결코 깨작거리지 않는다.
보고 판단하는 건 보스의 마음이다.
그가 어떤 결과를 내놓든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법이다
별것 아닌 걸 꼬투리 잡아 신경쓰이는 부하를 제거하는 것이 시칠리아 마피아의 단골수법인데 그대로 배워 온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나 짐승이나 밥 먹을 때가 주변에 대한 집중력이 가장 떨어진다.
권총수의 모든 감각기관은 저택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택과의 거리는 오백 미터가 채 안 된다.
육식귀원의 내공 소유자라면 충분히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두 가지 형태의 숨소리가 체크되고 있었다.
이동하는 숨소리와 고정된 숨소리다.
이동하는 숨소리는 경호원들일 가능성이 높고 한자리에서 계속 생기는 숨소리는 앉아 있다고 봐야한다.
팟!
권총수의 눈이 다시 빛났다.
제3의 기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경비원도 아니고 2층 회의실에서 회의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간부들도 아니다.
‘누구지’
이들이야 말로 호흡이 고르다.
움직이지도 않고 활동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숨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문득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한 명’
지역 보스들과 숫자가 일치한다.
지역 보스들의 운전사이자 경호원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
“갑시다!”
권총수가 조용히 오민철을 부른다.
저택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말하면서 낚싯대를 접었는데 1미터 정도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스윽!
손잡이 부분을 잡고 잡아당기자 거울처럼 투명에 가까운 칼날이 뻗어 나왔다.
일반 장검보다 검신의 폭이 좁았지만 완전한 칼(刀)이었다.
전쟁에 나가기 전 장수가 자신의 장비를 마지막으로 체크하듯 검날을 잘 살피고 다시 집어넣었다.
오민철은 소음기를 끼운 MP5기관단총 모델인 MP5SD 한 정을 들고 있었다.
물론 돌발사태를 대비해 품속에 권총도 들어 있다.
1분에 800발을 쏟아내는 명중률 높은 기관단총을 CIA로부터 지원 받았다.
강가는 숲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수목들 사이로 움직여 저택으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15미터 정도 높이의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는데 저택은 그 위에 지어져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절벽이지만 완벽한 수직인데다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설혹 누군가 위에서 밧줄을 내려 준다고 해도 너무 미끄러워 오르기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스윽!
권총수는 오민철의 팔을 어깨에 두르며 그대로 솟구쳤다.
둥실!
부드럽게 떠올라 순식간에 절벽을 올라 담장을 넘어갔다.
웬만한 산악인들도 오르기가 쉽지 않을 만큼 난이도 높은 절벽인데 CCTV까지 지천이다.
부우웅!
CCTV각도를 벗어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담장 안으로 내려섰다.
처억!
오민철은 MP5 기관단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형, 대략의 인원은 파악되어 있으나 이들이 보유한 화력은 나도 정확히 몰라. 가장 좋은 방법은 무성무기에 의한 제거야. 나중에 정체가 드러나 총격전이 벌어질지라도 그 전까지는 은밀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권총수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오민철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물론 방아쇠를 당겨야 할 상황이 생기면 미련없이 당기고’
우선 권총수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보고 상황에 따라 오민철을 부르겠다는 뜻이다.
스으윽!
우거진 나무사이로 권총수가 이동했다.
초상비다.
소리도 없고 그렇다고 빠르지 않다.
귓가에 경비원의 움직임이 정확하게 포착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먼저 발각당하는 일은 없다.
쉭!
포플러나무 아래 AK를 들고 서 있던 두 사내가 가벼운 트림을 했다.
칼이 목을 관통하면서 내는 호흡이 막히는 소리였는데 두 사람 모두 권총수가 뻗어내는 무형의 강기에 조종되면서 천천히 지면에 눕는다.
누군가 쓰러져도 이목을 끌어모을 만큼 집안은 조용했다.
커다란 향나무 아래에 한 명이 있고 그곳에서 좌측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수영장 가에 두 사내가 서 있다.
툭!
권총수는 오른발로 땅바닥에 있는 주먹만한 돌을 찼다.
츄우욱!
돌멩이가 날아가 사내의 관자노리를 파고들어갔다.
퍽!
하는 소리에 수영장 가에 있던 두 경비원이 고개를 돌렸다.
싹!
그러나 그들은 동료가 죽는 걸 볼 수가 없었다.
눈 앞으로 흰 섬광이 번쩍하며 목이 따끔했다.
주르륵!
목이 잘리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머리가 어깨위에서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권총수는 왼손을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렸고 그에 따라 두 사람의 시신 역시 수영장에 소리없이 잠긴다.
파란 물이 넘실대던 수영장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남은 사람은 셋, 물론 지역 보스들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을 제외한 숫자다’
수유육!
워낙 빨라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마당을 가로질러 저택 뒤로 돌아갔다.
세 사람이 있다.
숨 막힐 정도로 긴장된 앞 마당쪽과 달리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인다.
더욱 좋은 건 세 명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에 세 명의 사내들이 바라본다.
번쩍!
그들이 심상찮다고 판단하며 들고 있던 총구를 들어 올렸지만 반박자 늦었다.
권총수의 손을 떠난 칼이 세 사람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슈으으으!
칼은 그들의 목을 베고 다시 돌아왔다.
이기어도(以氣馭刀)
도법이나 검법 최고의 경지이다.
막강한 내공을 운용하여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속도가 워낙 빨라 한 번 펼쳐지면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강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현대인은 이기어도 앞에서 결코 살아날 수 없다.
퍽!
쿠쿵!
세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숨이 끊어졌다.
그때 무전기 소리가 들린다.
“오망스, 뒤쪽은 어때?”
권총수는 몸을 돌려 죽은 세 사내를 살폈다.
맨 오른쪽에 죽은 사내의 왼쪽 가슴에 담뱃갑 크기의 근거리 무전기가 있었다.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권총수는 무전기를 주워들었다.
“오망스 그곳 상황 어때? 이상 없나?”
경호팀장 라비오였다.
권총수는 잠시 무전기를 내려다 보다 그대로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반응이 없으면 찾아온다.
“오망스!”
세 번째 호출을 했는데도 대답이 없자 뭐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뒤뜰은 다시 조용해졌다.
권총수는 우뚝 서 있었다.
현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발자국 소리에 이어 권총을 찬 라비오가 나타났다.
흠칫!
권총수를 정면으로 발견한 라비오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차고 있는 권총을 뽑지는 못했다.
“어어!”
스스로도 놀란다.
밧줄에 묶인 듯 옴짝 달싹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총수의 몸에서 풍기는 가공할 고수의 기도는 순식간에 라비오의 정신을 얼려 버렸다.
고수가 무서운 건 바로 그런 점이다.
권총수가 의도적으로 묶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고수만이 갖고 있는 기도가 상대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호랑이를 보면 뭇 짐승들이 이른바 겁을 먹고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것과 같다.
빙긋!
권총수는 웃었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라비오를 향해 걸어왔다.
사람이 온다.
더욱이 권총을 갖고 있는데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총보다 빠른 이는 없다.
‘뽑아야 한다’
라비오는 손을 뻗어 권총 손잡이를 잡았다.
‘우웃!’
수백근짜리 돌덩이를 들어 올려도 이렇게 무겁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