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화장(2)
숨소리를 보면 대략 스무명 정도 되어 보이지만 직접 확인을 해봐야 정확할 것이다.
권총수는 내공을 끌어올려 잡아 당겼는데 강력한 힘에 의해 잠금쇠가 망가지면서 문이 열렸다.
덜컹!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그때 밖이 시끄럽다.
끼이익!
덜컹!
자동차가 멈추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몰려온다.
세 사람이 나타났다.
프랭크를 포함한 두 명의 CIA요원들이었다.
조금전 꽃집에 들어서기 전 프랭크에게 작업실을 알아냈다는 전화를 해주었다.
파리를 여행중인 젊은 미국 여성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가끔씩 일어난다.
그동안 FBI와 연계하여 수사를 해왔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르 밀리유가 개입한 사건이라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또다시 파리를 여행하던 미국 여성들이 실종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권총수에게 지소현 추적과정에서 혹시라도 어떤 단서가 잡히면 연락을 부탁한 것이다.
슥!
계단 입구 왼쪽 벽에 붙은 스위치를 키자 천장에 달린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고 훤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이번에도 내공을 이용해 거칠게 당겼고 문이 열렸다.
탁!
문설주 옆에 붙은 스위치를 켜자 지하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이십 여명의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
지친 얼굴로 바닥에 누워있는가 하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다.
여자들은 갑자기 환해진 불빛에 모두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권총수 뒤를 따라 프랭크와 CIA요원 둘이 들어섰다.
“미국인 있습니까?”
프랭크 질문에 네 명의 여자가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랭크는 미리 준비해 온 듯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읽었다.
“엠마!”
“네!”
“조이!”
흑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밀리아, 샬롯.”
두 여자가 손을 들었고 프랭크는 말했다.
“난 파리주재 미국대사관 2등 서기관 프랭크입니다. 미국정부를 대신하여 네 분을 대사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오 마이갓!”
“아아!”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릴 질렀고 조이라는 흑인여자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절을 해 버렸다.
그때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연락을 받은 프랑스 경찰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권총수는 여자들을 살폈다.
거의가 백인이고 흑인은 몇 명되지 않았다.
팟!
여인들을 살피며 들어간 권총수의 고개가 왼쪽 구석에 박혔다.
백인과 흑인들 틈에 내동댕이 쳐지듯 있는 왜소한 체구의 한 여자가 보인다.
삶을 포기한 듯 그녀는 뒷머리를 벽에 대고 초점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누군가 들이 닥쳤고 미국대사관 운운하며 프랭크가 떠들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후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눌러 참으며 다가갔다.
“형수님.”
조용한 목소리로 불러서일까 듣지 못한 모양이다.
권총수는 그녀 앞에 천천히 쭈그리고 앉았다.
시선을 수평으로 맞췄으나 지소현은 그 상태로 꼼짝 않고 있었다.
“형수님! 형수님 그만 날 보세요.”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내공을 실었기 때문에 그녀의 혼을 두드린다.
움찔!
뭔가에 깜짝 놀란 사람처럼 몸을 떨더니 시선을 돌렸는데 권총수를 빤히 보았다.
권총수도 지소현을 마주 보았다.
파팟!
지소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권총수를 알아보았으며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것이다.
“초...총수씨?”
“맞습니다. 이것 꿈 아닙니다. 내가 파리에 왔고 지금 이렇게 형수님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지소현이 화들짝 놀란다.
아직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빡 거리더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잡혀 들어올 때 그대로인데 지금 막 프랑스 경찰들이 지하실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
지소현이 눈물을 쏟았다.
권총수는 지소현을 끌어 당겨 안아주었다.
“형수님 이제 집에 갈수 있습니다.”
“앙아아앙!”
그야말로 대성통곡이다.
막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떠난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투박한 울음소리다.
극한으로 치닫던 공포가 사라지면서 일거에 들이닥친 생의 한 자락에 완전히 잠겨 버린 것이다.
권총수는 내버려 두었다.
이때 울지 않으면 언제 울 것인가.
더 이상 한국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꿈꿔왔던 눈부신 미래와 행복이 한순간 조각나고 부서졌다.
나중 고백하듯 말했는데 만약 사창가로 끌려가면 목을 멜 생각이었다고 했다.
“민철씨는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권총수는 웃으며 말했다.
“병원에 있습니다. 다행히 몸에 문제가 생길 만큼 위험한 상처는 없다고 합니다.”
“어디 병원이죠?”
“파리대학병원입니다. 일단 나가시죠.”
권총수는 지소현의 손을 잡고 다른 여자들과 같이 지하실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꽃집은 물론이고 길가에도 수많은 취재차량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이곳 꽃집 사건이 보도되었다.
프랑스는 물론 해외언론에서까지 크게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르 밀리유란 갱조직에 대한 경계의 조명이 다각도로 펼쳐졌다.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환자복의 오민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무자비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한 여자의 삶이 망가질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불행해지면 처가쪽 사람들의 남은 삶도 망가질 것이다.
그건 한 가정뿐만이 아니라 두 가정 세 가정을 파괴하는 세상의 지옥이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살아왔고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회진 차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
속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을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씨익 웃는다.
프랑스 사회에서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일이 무슨 대단한 사건인가.
그래도 권총수는 재빨리 유창한 불어로 오민철과 지소현이 파리에 와서 겪은 사건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오 몬듀우(Oh, mon Dieu: 오 하느님 맙소사).”
간호사가 소스라치며 들고 있던 약통을 떨어뜨렸다.
의사 또한 표정이 굳어졌다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오민철의 상태를 살폈다.
외인부대에서 근무를 했기에 불어로 묻는 의사의 질문에 오민철은 능숙하게 대답했다.
권총수도 의사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몸 상태가 급속하게 좋아지고 있으며 이 상태로 일주일 정도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고 오민철이 답답한 듯 휠체어를 태워달라고 했다.
권총수는 가볍게 오민철을 안아 휠체어에 태웠다.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권총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천천히 다가갔는데 문 밖에서부터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권총수는 문을 열었다.
“왔군. 들어와요.”
두 명의 건장한 한국인 사내였다.
오민철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에서 활동중인 블랙잭 용병 두 명을 불러들인 것이다.
파리에도 경호회사가 있지만 그들은 믿을 수가 없다.
특히 르 밀리유라는 무자비한 갱 조직에 맞서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회사 직원을 부른 것이다.
“직접 소개하죠.”
권총수의 지시에 두 사내가 오민철을 보며 말했다.
“이창덕입니다. 707 제대했죠. CCT출신 공태성이라고 합니다.”
CCT라는 말에 오민철이 눈을 크게 떴다.
정확한 표현은 ’공군특수 임무대(ROK Air force Combat Control Team)로 부른다.
공군 공정통제사라고도 하는데 특전사나 유디티 씰처럼 숫자가 많지 않는 소수이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다.
‘가장 빨리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온다.’
적지의 기상 정보를 아군 수송기에 알려주고 수송기가 목표 위치에 진입 시 고도와 방위각 등을 관제(管制)해주어 수송기가 원하는 위치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한 마디로 이동식 항공관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이다.
관제 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뿐 아니라, 적지의 공항을 아군이 점령한 뒤라도 민간 관제사들이 없으면 재빨리 투입되어 대신해서 임시로 관제를 해주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또한 전투기 폭격을 유도하기도 하는 매우 위험한 부대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지로 침투하여 물자가 투하될 정확한 낙하의 위치 등 여러 정보를 수송기에 제공해야 한다.
항공관제뿐만 아니라 공중 및 수상 침투, 장애물 제거를 위한 폭발물 설치 등의 능력까지 갖춰야 하는 매우 고달픈 부대.
우리나라처럼 복잡한 산악 지형에서 이뤄지는 공중 보급·공중 강습에는 골바람과 옆바람(측풍)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람의 영향 아래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류(air current, 氣流)를 읽는 능력까지도 요구된다.
한 마디로 전투 전술 전략 모두 만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CCT출신답게 공태성의 뉴저지주 훈련성적은 좋았다.
자신의 기수 150명중 1등으로 수료했다.
연봉 또한 80만 달러로 책정이 되었고 이집트 시나이반도 인근에서 IS잔당과 소수민족인 누비아족 반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권총수가 급히 불러들인 것이다.
권총수는 침대 밑에 놓인 가방을 열어 글록 19 두 자루와 탄창과 소음기까지 건네주었다.
“허가되지 않은 손님은 받지 않아야 하고 강제로 들어오려고 하면 쏴버리세요.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예!”
두 사람은 휠체어 뒤를 따랐다.
휠체어는 권총수가 밀었고 지소현은 왼쪽에서서 오민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휠체어 뒤로 이창덕과 공태성이 따라오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일행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병원 옥상은 또 하나의 면회실이었다.
적지 않은 환자들이 가족들과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눈 아래로 보이는 파리시내의 일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권 대표!”
조금 떨어져 경호원들이 있음을 의식해서인지 직함을 불렀다.
오민철은 표정없는 얼굴로 파리시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기다려 줘.”
권총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오민철이 무엇을 기다려 달라고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 흔적은 남겨 둬야 할 것 아냐. 날 공격하는 건 충분히 이해해.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해 왔으니 당연히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놈들이 한 둘 이겠어. 그러나 이건 아니지.”
오민철은 환자복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는다. 노인들과 여자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는다. 마피아뿐만 아니라 우리 용병들 세계에서도 도리라는 게 있잖아. 신혼여행 가는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멈칫!
권총수가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런 규칙도 있었냐는 시선이다.
“의사 말 들었지? 일주일이면 퇴원 할 것이라고.”
권총수는 지소현을 슬쩍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회복이 우선이야.”
지소현이 오민철의 손등을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