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칼바람(2)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이 묘했다.
가슴 서늘한 공포다.
“물론이다!”
뒤부아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힘껏 소리쳐 말했다.
빠악!
권총수는 깔고 앉아 있던 쇠로 된 의자를 들어 뒤부아를 내리쳤다.
“테러범들이나 갱들은 왜 인간적인 면모로 접근하려 들면 자꾸 거절을 하는건지 모르겠군.”
퍽!
퍼퍼퍽!
인정사정 없다.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철제 의자 말에 찍히면서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사건은 진행중이다.
르 밀리유는 오민철과 지소현 부부를 볼모로 사막의 흑새를 잡으려 하고 있다.
어쩌면 오민철보다 지소현이 더 분명한 인질이다.
그런 인질을 아직 사건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창가에 넘긴다는 건 납득이 안간다.
만약의 사태, 즉 오민철을 이용해 효과가 없을 때를 대비해 어디론가 깊이 숨겼다면 이해할 수 있다.
부부를 격리시키면 공포의 강도는 더 커진다.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만 느낀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훨씬 커지고 확대 재생산 하면서 공포는 배가 된다.
페이스를 완전히 쥐는 것이다.
탁!
다시 두들겨 팬 의자를 놓고 앉는다.
우당탕!
그때 문소리가 요란해지더니 사내들이 들이 닥쳤다.
보지 않아도 CIA요원들일 것이다.
“맙소사!”
오민철을 발견한 프랭크가 소스라쳤다.
“병원으로 좀 데려가 주시죠.”
권총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옮겨!”
프랭크의 지시를 받은 두 명의 요원이 오민철을 부축하여 나갔다.
파파파!
권총수가 상체를 돌리고 오른손을 뻗었다.
상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폐혈한 오민철의 혈도를 해혈한 것이다.
“뒤부아란 친구입니까?”
프랭크가 다가와 내려다 본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뒤부아씨!”
권총수는 안쪽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되는 것 같군요. 난 강호무사입니다. 당신은 강호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그 바닥은 혈채를 갚는데 있어 뿌리까지 뽑는걸 원칙으로 하죠.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짐승들까지 완전히 불태워 버립니다.”
움찔!
프랭크가 권총수를 보며 놀란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뒤부아는 입술을 달싹 거렸다.
“미술관.”
“미술관?”
파리에 유명 미술관이 많다.
설마 그 미술관에 지소현이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권총수는 뒤부아의 말뜻을 몰라 눈살을 찌푸렸는데 옆에 있던 프랭크가 설명했다.
“르 밀리유는 프랑스 성매매시장의 8할을 장악하고 있죠. 미술관은 여자를 성매매 시장으로 내보내기 전 잠시 보호하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장소가 어디죠?”
“난 모른다!”
“모를 겁니다. 미술관은 르 밀리유가 저지르는 모든 범죄의 증거가 있는 곳인데 아무나 알려줬다가 배신이라도 당한다면 꼼짝 못하죠.”
프랭크는 뒤부아의 말을 신뢰해도 좋다는 듯 설명을 곁들인다.
“허면 누군가 와서 데려간다는 얘기오?”
“우리가 연락을 하면 배달부가 온다.”
“배달부?”
뒤부아는 더듬거리며 질문에 대답했다.
배달부는 르 밀리유 최상위 기관이다.
3명에서 5명을 넘지 않으며 조직에서 벌이는 여러 사업을 직접 관여하고 관리한다.
그리즈만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로 충성심이 대단하다.
“당신에게서 여자를 데려간 배달부 얼굴은 기억합니까?”
“기억은 하지만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서기관님!”
권총수가 고개를 들어 불렀다.
“정보국(CIA) 파일에 르 밀리유 조직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프랭크 그렇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중요 인물들 사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미국 내에서가 아닌 CIA 해외 활동에는 주재국 범죄집단의 동향 파악도 업무중 하나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죠.”
“빨리 좀 부탁 드립니다.”
프랭크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데빈 르 밀리유 파일좀 당장 전송해주게. 고맙네.”
프랭크가 전화를 끊고 권총수를 돌아보았다.
권총수는 담배만 피웠다.
뒤부아도 죽은 듯 조용했고 프랭크도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우두커니 기다렸다.
20분쯤 지났을 때 프랭크가 핸드폰을 꺼내 살폈다.
그러더니 권총수에게 내밀었다.
“파악된 인물들 사진입니다.”
권총수는 프랭크로부터 핸드폰을 넘겨 받아 대충 사진을 살핀 뒤 말했다.
“내 폰으로 보내주시죠.”
권총수는 핸드폰을 건네 주었다.
잠시 후 사진이 온 걸 확인한 권총수가 쓰러져 있는 뒤부아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꼼짝도 않고 있던 뒤부야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파파팟!
갑자기 뒤부야의 신체 몇 곳에 지풍을 날렸다.
까흑!
그런데 뒤부아가 단발마의 비명을 흘리더니 온 몸을 비틀었다.
입에서 조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거품을 내뿜고 온 몸이 물결처럼 요동을 친다.
뒤이어 목이 옆으로 돌아가고 손톱이 시멘트로 된 바닥을 파고들었다.
‘저런!’
지켜보던 프랭크의 눈이 커졌다.
언뜻 전기 고문을 가했을 때의 신체 반응인 듯 보이지만 강도(剛度)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놀라운 건 뒤부아의 목이 조금씩 계속 돌아가고 손톱이 벗겨져 피가 나는데도 계속 시멘트로 된 바닥을 판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뒤부아의 몸이 꼬이며 휘어진다.
파파팟!
권총수는 재빨리 점혈했던 혈도를 해혈했다.
꺼어어!
뒤부아는 축 늘어졌다.
툭!
투투투!
뒤틀린 몸들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현상에 프랭크는 어금니를 깨문다.
육체적 고통을 주지 않고 적의 입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흔적없이, 티 안나게, 의학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고문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숨기지는 못한다.
정밀 검사를 하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 권총수가 보여준 기술은 뭘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뒤부아씨, 내 말 들립니까?”
“드...들리오.”
목소리에 힘이 있다.
그건 지금 가한 분근착골이 효과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즉 몸 상태는 분근착골 전보다 더 아프고 부서졌을 텐데 목소리에 힘이 실린 건 권총수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다는 뜻이다.
갑작스럽게 분근착골을 가한 것은 위협이며 경고였다.
앞으로 자신이 지시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고통스럽게 해주겠다는 뜻인데 노련한 갱답게 뒤부아는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잘보시오. 내가 보여주는 사진중 당신에게서 여자를 받아간 사내가 있는지 말이오.”
권총수는 쭈그리고 앉아 쓰러진 뒤부아 눈 앞에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마를 찡그리면서도 뒤부아는 권총수가 보여주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프랭크로부터 전송받은 사진은 모두 32장이다.
반응이 없다.
사진은 이미 열다섯 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진은 조직 서열과 무관하다.
“튀라제라는 이자는 어떻습니까?”
스무 명이 넘어가면서 권총수는 사진 속 이름을 거명하면서 묻기 시작했다.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해 초조했기 때문이다.
출렁!
그런데 뒤부아에게 반응이 나타났다.
미세했지만 권총수는 놓치지 않았다.
“이 친구 인가 보군요?”
권총수는 사진을 약간 확대했다.
“닮았소.”
뒤부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잉투안이란 친구요?”
혹시 안면은 있느냐, 또는 들어본 적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런적 없소.”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아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더 있군. 당신들 스스로가 이번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테고?”
“들은 얘긴데 중국 대사관측에서 사막의 흑새만 잡아 달라는 청부를 했다더군.”
권총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역시 중국이다.
짐작은 했지만 확실히 배후에 중국이 있었다.
잠시 누워있는 뒤부아를 내려다 보던 권총수가 장력을 날렸다.
빠파악!
굉음에 프랭크가 돌아보았다.
흠칫!
없다.
조금전까지 권총수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확인하던 뒤부아의 얼굴이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프랭크 눈이 커졌다.
뒤쪽 벽으로 수많은 핏방울이 붙어 있고 일부는 심어 놓기라도 한 듯 머리카락들이 벽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산산조각이 되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무기를 들어 부순 것 같지도 않은데 인간의 머리가 파편이 되어 사라져 버린 현실에 프랭크는 할 말을 잃었다.
권총수가 혼잣말처럼 나직히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날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오민철은 그런 인물이다.
친구이고 스승이며 때로는 어떤 핏줄보다 가까운 형이다.
“들으셨죠?”
“르 밀리유 간부중에 잉투안이란 인물이 있는지 조사지시를 내렸습니다.”
“혹시 프랑스 경찰에 도움을 받을 생각을 갖고 있다면 포기 하십시오. 르 밀리유로부터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CIA는 항상 독자적으로 움직이죠.”
권총수는 천천히 오토바이 센터를 걸어 나갔다.
르 밀리유 우두머리 그리즈만의 표정이 굳었다.
뚱뚱한 체격에 올해 예순다섯인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가뜩이나 가느다란 실눈인데 오늘따라 거의 감기다시피 한 채 꼼짝하지 않았고 부하들 모두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분명한 건.”
그리즈만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손가락 사이에 두꺼운 시가를 끼고 있었는데 눈은 여전히 감은 듯 뜬 듯 했다.
“르 밀리유 사상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건 처음이라는 것이지.”
벌컹!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는데 그리즈만의 신변경호를 책임지는 경호팀장 라비오였다.
“뭔가? 라비오?”
“놈을 데리고 왔습니다.”
문이 다시 열리고 두 명의 사내가 한 남자를 부축해 들어왔다.
사내는 정장 차림이었는데 사내들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은 듯 얼굴이 부어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렸다.
꽈당!
사내들은 정장의 남자를 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사라졌다.
후우우!
시가 연기를 길게 내 뿜은 그리즈만이 입구쪽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본다.
“퐁텐 경위.”
“보스 살려주시오.”
“난 자네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네. 아이들 학비도 지원했고 아내 생일 날 다이아 반지까지 선물했지. 그 뿐인가 매월 자네 월급의 두 배가 되는 돈을 통장에 넣어 주었어. 그렇게 열심히 자네를 지원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퐁텐 경위는 파리경찰청 생활안전2계 책임자이자 르 밀리유 조직과 유착되어 있다.
어제 밤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을 하지 않은 것이 오늘 이 자리에 끌려와야 하는 이유였다.
“어제 저녁 경찰의 긴급센터에서는 놈의 동선을 놓치지 않았더군. 그렇다면 경찰에서 처리를 했어야지. 마들렌 성당까지 놈이 달리는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번 사건에 CIA가 개입했다고 알려준 건 퐁텐 경위이다.
지금 그리즈만이 화가 난건 경찰은 화이트 요원 프랭크와 권총수의 차량을 마들렌 사원까지 경찰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소 요소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지켜봤으면 당장 부하 팀원들을 보내 사살하거나 체포했다면 지금과 같은 인명피해는 없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뜻이다
퐁텐경위가 절규했다.
“놈을 잡겠습니다. 내가 잡아 보스 앞에 끌어다 놓겠습니다.”
“좋은 말일세.”
스륵!
그리즈만이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조그만 권총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