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몽마르뜨의 눈물(3)
권총수가 들었던 건 소음기 소리였다.
거리는 멀었으나 메아리치듯 울리는 쇳소리는 오랜 경험상 소음기가 내는 소리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금강부동신법이 전력으로 펼쳐졌고 순식간에 1킬로 가까이를 날아갔다.
부우웅!
그때 골목에서 두 대의 자동차 불빛이 나타났고 번개처럼 옆을 스쳐 사라졌다.
멈칫하며 사라지는 승용차를 한 번 주시 했다가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멈칫!
어둡지만 대낮보다 더 훤히 주위를 볼 수 있는 권총수의 눈이 왼쪽으로 돌아가고 날아가던 몸이 급히 멈췄다.
‘사람이다’
그리고 피 냄새가 흘러나온다.
권총수는 두 대의 승용차가 사라졌던 곳을 향해 몸을 날리려다 멈췄다.
골목에서의 속도라면 쫓아가볼 만 했으나 넓은 도로에 진입하면 따라 잡는 건 불가능하다.
권총수는 프랭크로부터 지급 받았던 무전기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망자 발생, 11-2번지’
권총수는 흥건한 바닥의 피와 캐빈의 앞 가슴을 살폈다.
그리고 조금 옆에 떨어져 있는 벽돌을 발견했다.
벽돌에 맞아 쓰러진 캐빈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요원들이 나타났다.
캐빈의 죽음을 발견한 동료요원들이 신음을 터뜨렸으며 마지막으로 프랭크도 도착했다.
프랭크는 핸드폰으로 응급센터 15번을 눌러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권총수가 범인을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차량이 특정됐으니 이 골목 어딘가에 CCTV 한 대 없지는 않겠죠. 아니면 본선도로 합류지점 근처 교통신호용 카메라에 잡혔을 가능성도 있고.”
그러면서 자신이 이곳을 향해 오면서 급히 빠져나가는 두 대의 승용차를 보았다는 얘길 해주었다.
프랭크 눈에 불꽃이 튄다.
프랭크는 17번을 눌렀는데 파리 경찰비상센터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미국대사관 프랭크 서기관이오.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을 추적하고 있소. 빅토르 위고가 11번지 골목과 본선 도로에 진입한 차량 두 대의 넘버 확인을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권총수를 보았는데 정확한 시간을 추정해 달라는 뜻이다.
“십 분 전이므로 2시 40분입니다.”
“차량 움직임은 2시 40분이오. 파리주재 미국대사 크리스씨 명의로 파리경찰청에 긴급으로 요청합니다.”
아는 사람을 통한 개인적 부탁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미국 대사를 통하면 그건 곧 미국정부의 입장이 된다.
그렇게 되면 무게가 달라지고 경찰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급기야 프랭크는 자신의 외교관 코드까지 불러주고 말았다.
외교관 코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구체적인 지위와 임무 소속기관을 알 수 있는 암호다.
물론 긴급센터에서 불러준 프랭크의 코드를 치면 그의 사진이 나타날 것이고 백프로 신뢰가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정보에 대한 노출이 된다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정보원에게 신분 노출은 자살행위에 가까운데도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한다는 건 작금의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
사건 종료 후 기존의 코드를 버리고 새로운 걸 받아야겠지만 당분간은 노출 될 수밖에 없었다.
‘확인 됐습니다. 즉시 작업 들어갑니다’
전화기에서 긴급센터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요원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권총수는 또렷하게 들었다.
“차량 준비해!”
요원들이 여기저기로 전화를 걸었다.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10분도 되지 않아 세 대의 차량이 나타났는데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지이잉!
그때 다시 프랭크의 전화기가 울렸다.
“차량확보, 2시40분경 빅토르 위고가 11번 골목을 빠져나간 차량은 두 대이며 차종은 벤츠.”
프랭크의 눈이 빛난다.
“현재 두 대의 차량은 마들렌 사원을 지나고 있음. CCTV결과 중간에 타고 내리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관측됨.”
“끊지 말고 계속 통화를 요청한다.”
“오케이!”
“출발해. 마들렌 사원이야.”
일제히 사내들이 차에 올랐고 승용차들이 굉음을 내며 골목을 달려 나갔다.
경찰에도 비상이 걸렸다.
문제는 그 사실이 경찰 밖으로 흘러나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경호팀장 라비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파리 경찰이며 자신들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봉사를 한다.
그런데 지금 놀라운 소식이 지금 막 전달된 것이다.
라비오는 2층 저택을 바라본다.
불이 꺼져 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지금 깊은 잠에 취해 있다.
어제 밤 초저녁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파리의 정재계 인물들과 만찬이 있었기 때문에 술까지 취해 있다.
깨울까 말까.
상황은 여유롭지 않다.
꿀꺽!
할 수 없다.
아무리 취한 상태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해도 이런 일은 보고해야 한다.
라비오는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웅장한 기둥들이 서 있는 마들렌 성당 앞이었다.
경찰의 협조를 받아 달리는 내내 신호 한 번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150킬로 이상을 밟고 온 것이다.
“두 대의 승용차는 오쓰만 가로 꺾어 들어 감.”
휴대폰이 아닌 차량에 설치된 무전기에서 긴급센터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려 주시오!”
권총수는 프랭크차에 동승했는데 왜 그러느냐는 듯 프랭크가 바라보았다.
“서기관님께서는 차로 이동하시죠. 난 허슬리유 가를 돌아 갈테니.”
차량은 좀 더 지나 마들렌 성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고 권총수는 오른쪽으로 뻗은 허슬리유 가를 달리면 나중 오쓰만 가에서 만나게 된다.
벌컹!
문이 열리자마자 어둠속으로 빨리듯 사라져 버리는 권총수를 보며 눈이 커진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백번을 봐도 불가사의다.
더욱이 영상이 아닌 직접 보긴 지금이 처음이다.
“어서 가자고!”
놀랄 틈이 없다.
차는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밤중이었고 길가 행인도 거의 없어 권총수는 마음 놓고 금강 부동신법을 펼쳤다.
슈우우욱!
엄청난 속도의 윙슈트 플라잉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날아갔다.
“엇!”
신호 대기중이던 어느 화물차 운전사가 번쩍하며 자신의 차 위를 날아 사라져버린 권총수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피곤에서 온 착시인가 싶은 듯 눈을 비볐다.
사거리다.
권총수는 좌측으로 틀었는데 그곳이 오스만 가였기 때문이다.
팟!
200여 미터쯤 왼쪽 골목으로 차량 한 대가 들어가는 브레이크 등이 설핏 보였다.
그것 말고는 도로에 단 한 대의 차량도 없었다.
슈우우!
단번에 날아간 권총수는 골목입구에서 내렸다.
두 대의 승용차가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것도 벤츠였다.
권총수는 추적차량이라는 걸 간파했다.
우선 프랭크와 통화할 수 있는 무전기 전원을 껐다.
갑자기 무전이라도 걸려 온다면 골치 아프고 오히려 이런 일은 혼자 단독으로 정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두 대의 승용차가 멈추고 사내들이 내렸다.
그리고 뒷차 트렁크가 열리더니 축 늘어진 사내를 끌어냈는데 권총수는 터지는 신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오민철이었다.
‘형!’
갑자기 목이 멘다.
사내들은 모두 여섯이었고 오민철을 끌고 불이 켜진 조그만 슈퍼로 들어갔다.
권총수는 발자국 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차량으로 다가가 뒷문을 열었는데 닫혀 있었다.
탁!
유리에 손바닥을 대고 내공을 끌어 올리자 순식간에 유리가 흘러내렸다.
차 안은 텅 비었다.
이번에는 앞차로 다가갔다.
같은 방법으로 유리를 녹이고 허리를 넣어 차 안을 살폈다.
문을 열면 소리가 나고 조용한 시간이기 때문에 눈치 챌 위험이 있다.
별다른 걸 발견하지 못하고 상체를 빼내려다 안전벨트 옆으로 끼어진 한 자루 회칼을 발견했다.
총이라는 과학적 무기가 있으나 어둠의 세계에서 칼은 여전히 중요한 장비로 취급된다.
야쿠자들이 갖고 다니는 회칼 보다 더 예리하고 길이는 40센티 정도 되었다.
권총수는 칼을 속 주머니에 넣었다.
권총이 없는 지금 칼은 없어서는 안 될 무기다.
권총수는 10여 미터 앞에 있는 슈퍼를 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골목 오른쪽으로 건물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 간판 이름도 확인 할 수 없었다.
우두둑!
권총수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름살 가득한 칠십 노인으로 변했다.
변체환용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목소리 역시 바뀌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딸랑!
손님이 오는 걸 알 수 있도록 작은 쇠방울을 달아났다.
가게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한 사내가 통로를 걸어 나왔으며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다.
머리를 면도하듯 밀었는데 오른쪽 귀에 해골로 된 귀고리 한 개를 걸고 있었다.
“뭘 드릴까요?”
노인인걸 확인하곤 그다지 경계한다거나 신경쓰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답만 하시오. 조금 전에 들어온 사람들 어디있소?’
사내는 느닷없이 파고드는 전음에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떠억 벌리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안쪽 패거리를 향해 소릴 지르려고 했으나 늦었다.
촤악!
품속에 있던 칼이 번득이고 사내의 턱밑 경동맥을 파고들었다.
권총수는 사내를 뒤로 밀어 의자에 앉힌 다음 칼을 뽑았다.
촤아아!
엄청난 핏줄기가 쏟아졌지만 재빨리 피했다.
권총수는 가게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쪽으로 살림집이 있는 듯 보였다.
소리를 죽여 통로 끝에 있는 문을 밀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예상대로 작은 마당이 있고 벽돌 건물로 된 단층집이 있었다.
지이잉!
바로 그때 갑자기 권총수의 전화기가 요동을 했다.
전화기 액정에 오민철의 번호가 찍혔다.
뒤부아라는 사내가 분명했으므로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시오?”
“CIA까지 끼어들었더군요. 장소를 바꾸겠소. 모네 미술관 오전 12시오.”
권총수는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오?”
“그러죠.”
“모네의 그림을 보며 많은 얘기를 나누죠. 흐흐흐!
상대는 조롱하듯 밝은 웃음을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
‘모네 그림’
권총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나타났다.
‘미안하군. 난 모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권총수는 소리 없이 집 앞으로 다가갔다.
현관문은 열려 있다.
훗!
웃는다.
현관문을 열어 놓았다는 건 추적자들을 충분히 따돌렸고 자신들의 위치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전 자신이 슈퍼를 들어서며 울린 종소리에 주인이 나오며 채 잠그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잠깐이건 오래건 문을 나가면 무조건 잠그는 버릇이 장수의 지름길인데’
프로는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다.
특수부대 출신들의 생존율이 높은 건 훈련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늘 끝만 한 허점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지 수시로 살피고 발견이 되면 즉시 막고 꿰맨다.
발자국 하나까지 지우며 전진하는 그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을 열어 놨다는 건 승산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피아가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는 건 철저한 프로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권총수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오민철까지 포함하면 일곱이다.
그런데 감각에는 네 명 밖에 잡히지 않는다.
일단 잡아 보면 안다.
스으으!
바닥에 뜬 채 들어섰다.
거실에 세 명의 사내들이 앉아 얘길 나누다 들어서는 권총수를 발견했다.
다행히 노인이라는 것에 단번에 권총을 뽑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감 뭐야?”
슈슉!
권총수의 손에 쥔 칼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