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몽마르뜨의 눈물(1)
파르르!
랑글레의 눈썹이 떨린다.
저렇게 치밀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사내를 상대로 너무 어설펐다.
너무 쉽고도 간단하게 제거하거나 생포할 자신이 있었다.
입국 하자마자 따라가 정리하면 된다.
아무리 살펴도 위험할 일이라고는 일어날 수도 없고 발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너무 편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했는데 상대는 이쪽의 수법을 훤히 계산하고 있었다.
랑글레는 신음을 흘렸다.
상당한 거물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이건 소름끼칠 일이었다.
“누가 시켰나?”
모르간이 물었다.
“참고로 내가 이 친구에 대해 잘 아는데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지. 평화주의자이고 세상을 부드럽게 보는 사람일세. 그런 인물을 죽이려 하다니 소속이 궁금하군?”
“르 밀리유(Le Milieu).”
르 밀리유라는 말이 나오자 모르간이 깜짝 놀란다.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갱 조직이다.
2012년에는 유명한 프로축구팀 올림픽크 마르세유 단장의 아들을 살해하여 유럽이 떠들썩했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들은 그를 불에 태웠는데 이른바 바비큐 수법인 것이다.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거점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파리를 비롯한 전국적 조직으로 촘촘한 연결망을 갖고 있다.
권총수도 르 밀리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미 외인부대 시절에 들었고 마르세유로 외출을 나왔다가 그들이 벌이는 총격전을 구경한 적도 있었다.
권총수는 시계를 보더니 전화를 걸었다.
4시59분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20여분 일찍 도착하여 약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훗훗! 왔나?”
서울서 통화했던 목소리다.
“역시 대단하더군. 오자마자 내 부하들을 보내 버리고 말이야. 랑글레 시신이 어딨나? 안보이던데 추궁하기 위해 산채로 끌고 가셨나?”
권총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나?”
“당신이 하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소. 너무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어 내가 추가할 말이 없을 뿐이오. 미스터...?”
질문을 던지며 슬쩍 시계를 본다.
통화 시작한 지 1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오민철의 전화가 수신되는 지역으로 CIA요원들이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뒤부아!”
“뒤부아 씨 우리 오 이사를 좀 바꿔주시겠소.”
“살아 있네.”
“죽었다는 생각은 않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그렇소.”
잠시 무슨 소리가 들리듯 하더니 갑자기 수화기 속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호의 고수다.
전화기를 바꿔 준 것 같은데 곧바로 말을 못하며 거친 숨소리만 내고 있다.
사람 노릇을 할 수 없을 만큼 두들겨 맞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됐을 때 이런 숨소리를 흘린다.
“형!”
권총수의 목소리가 떨린다.
“초...총수야...돌아가 난 죽어도 돼.”
오민철은 온 힘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나...죽을거야. 놈들한테 굴복 안해...그래서 너한테 전화 안 한거야.”
“형수님은?”
“끄르륵! 모...몰라 어디로 데려간 것 같은데.”
질근!
권총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때 사내가 전화기를 빼앗았다.
“좋은 시간 나눴습니까?”
“원하는 걸 말해 보시죠?”
권총수는 마음을 가라 앉혔다.
“잘 아시잖습니까? 내일 오후 5시 비르아켐 다리에서 보죠.”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비르아켑 다리?”
모르간을 바라보았는데 그건 질문이었다.
“샌강 다리중 하나지.”
모르간은 사태가 생각보다 엄중하다는 걸 느낀 듯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거야 원!”
자신은 프랑스 사람이고 외인부대에서 상관이었는데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음에 답답해 했다.
지잉!
전화가 왔다.
채명천이다.
“예 이사님!”
“맞습니다. 대표님이 찍어준 그 친구 손님 아닙니다.”
“누구였습니까?”
“중국대사관 직원이었습니다. 능울퍽이라는 서기관이더군요.”
채명천이 설명을 했다.
권총수로부터 사내에 대한 신원확인 지시를 받은 채명천은 우선 오민철의 가족을 포함한 친 인척들에게 사내의 사진을 돌렸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뒤이어 초등학교 동창회원들에게도 사내의 사진을 보냈는데 역시 알지 못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그날 결혼식에 참석한 회사 직원들을 포함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냈고 똑같은 대답을 얻었다.
‘우린 모른다’
그러자 의심이 점점 깊어졌는데 채명천은 한 곳을 떠올린 것인데 바로 중국 대사관이었다.
결혼식 전에 이라크에서 보여준 블랙잭과 설표돌격대의 전투는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중국 인민해방군 정예부대가 한낱 용병부대에게 궤멸되었다는 건 충격을 넘어 비아냥거리로 전락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영국과 아편전쟁 당시 병력의 숫자만 많았지 형편없는 병기와 전술로 무릎을 꿇었던 당시의 역사까지 꺼내 중국을 조롱했다.
중국은 아직 멀었다.
어떤 훈련과 장비로 무장을 했기에 고작 서른 명이 되지 않은 블랙잭 용병들에게 대대병력이 몰살을 당하느냐는 것이다.
“외교부 아는 지인을 통해 부탁을 했죠. 중국쪽 관련자 얼굴 사진과 비교 좀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동영상 속의 사내가 나왔습니다. 서기관 신분이지만 국가안전부 소속 화이트 요원으로 드러났습니다.”
“능울퍽?”
“예 2등 서기관입니다.”
“일단 감시에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권총수는 다시 번호를 눌렀는데 이번에는 맥보란이었다.
“캡틴!”
“서울 주재 중국대사관 2등 서기관 능울퍽에 대한 정보 조회 좀 도와주시죠.”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얘깁니까?”
권총수는 동영상 속 인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결국 중국 정부와 오 이사님 납치가 연결되었군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캡틴, 오 이사님 전화기 수신 지역을 추적했는데 한 발 늦었습니다. 우리 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었다는 몇 가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더군요.”
권총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국가기관도 아닌 갱단에서 통신 감청과 수신신호에 의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군요. 여기에서도 중국이 개입하고 있군요.”
“맞습니다. 중국 공안기관에서 우리의 추적을 르 밀리유측에 제공한 모양입니다.”
권총수는 몇 마디 더 통화를 나누고 끊었다.
째르르릉!
그때 학교에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고학년 수업이 끝난 모양일세. 들어가봐야 하네.”
모르간은 재빨리 학교 안으로 사라졌다.
단 둘만 남자 랑글레가 입을 열었다.
“죽여주시오.”
권총수의 눈이 좁혀졌다.
조직에 의해 어차피 죽게 될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가족은 보호 받는다.
랑글레는 죽여 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난 아직까지 내게 협조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둔 적이 없소. 어떤 사람은 성형수술을 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했고 또 누군가는 가족을 모두 국외로 이주시켜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소.”
랑글레 눈이 흔들린다.
스으윽!
권총수 오른손이 앞으로 저었다.
마치 날아오는 먼지를 치워내기 위한 동작 같았는데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꿈틀했다.
“어어!”
열손가락이 움직이면서 랑글레 얼굴은 흥분이 차올랐다.
그때 권총수가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랑글레는 슬쩍 어깨너머로 훔쳐 보았다.
키가 컸기 때문에 충분이 건너 볼 수 있었는데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랑글레 가족을 당장 안전가옥으로 대피 시켜 주시죠’
랑글레의 눈이 커졌다.
두 눈에 불길을 담고 어떤 대답이 돌아오는지 집중했다.
‘그러죠’
라는 대답 문자를 확인한 랑글레는 재빨리 자세를 고치며 불안한 얼굴을 했다.
불쌍한 표정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는데 랑글레가 엿본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인데 난 당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괴롭힐 생각은 더욱 없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소.”
“그...그것이 뭔지?”
“이번 사건에 대해 아는 것만큼만 내게 말해주면 되는 것이오. 나 또한 반드시 답례를 하겠소? 아까도 얘기 했지만 사막의 흑새는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미 문자를 훔쳐봤다.
수신자가 누굴까.
자신의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할 역량이 있는 쪽이거나 사람이어야만 한다.
“어떤 식으로 날 도와 줄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극 공손으로 돌아선다.
“난 CIA와 MI6과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소.”
그건 조금 전 보낸 문자의 수신자가 그 두 곳 중 하나라는 의미였다.
랑글레의 눈이 타오른다.
그렇다면 마음 놓고 아는 걸 털어 놓아도 된다.
무르타르거리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몽쥬역 근처에 있는 이곳 무르타르거리는 조그만 카페와 작은바 식당들이 좌우로 빼곡하여 저녁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하지만 자정이 넘어가면서 간판 불빛들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거리를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고 행인들 발걸음도 줄어들었다.
권총수가 불쑥 나타났다.
옆에는 모르간이 따르고 있었는데 현지인답게 그는 이곳 무르타르 거리는 훤히 꿰고 있었다.
“11번지면 저길세!”
1층 상가 위로는 아파트였다.
아파트라고 해도 5층을 넘지 않는 낮은 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쭈욱 이어진다.
권총수의 시선은 ‘도즈(dose)’라는 카페 간판에 머물렀다.
시선은 이곳 거리에서 유명하다는 도즈 카페 위쪽 3층에 머물렀다.
창가에 작은 촛불 같은 붉은 전구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올해 여든을 바라보는 뒤부아 아버님이 혼자 살고 있죠. 그런데 심한 불면증으로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팟!
모르간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권총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럴수가.”
프랑스 언론도 사막의 흑새가 마법을 부린다는 기사를 썼다.
물론 기사 말미에는 과학의 시대에 비과학의 현상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마무리했다.
사실 권총수의 전화를 받고서 가장 흥분되었던 건 언론과 소문에 대해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런데 지금 이건 뭔가.
불면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습관 갑작스런 환경변화등 여려 이유가 있는데 아직까지 치료법이 명확하게 나온 건 없다.
벨소리에 노인 사바니에는 현관문을 열어 주었는데 실내인데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멈칫!
가끔 아들인 뒤부아가 밤늦게 찾아오기 때문에 생각없이 열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권총수가 서 있었는데 손에 자색빛 나무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누구시오?”
사바니에 질문에 권총수는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바니에 저를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사바니에는 빤히 바라보았다.
“우선 이것 받으세요. 제가 주니퍼(Juniper)로 만든 지팡이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두송자(杜松子)로 불리는 유렵향나무로 향기도 좋지만 호흡기 질환 두통 오한 치료에 효과가 있어 노인들 지팡이로 인기가 높은 고가의 물건이다.
사바니에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주니퍼 지팡이는 워낙 귀할 뿐 아니라 어지간한 노인들은 구입할 엄두를 낼 수도 없다.
나무 자체가 다량 번식하는 못하는데, 기후에 민감하여 잘 죽기 때문이다.
더욱이 권총수가 들고 있는 지팡이 표면에 장수를 상징하는 사슴이 조각되어 더욱 운치와 기품을 풍겼다.
“누구시라고 했죠?”
“뒤부아 친구 토뱅이라고 합니다.”
“토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