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파리의 날씨(3)
그는 지금 예편했고 파리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 보안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모르간 내일 파리에 갑니다. 그런데 그 전에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파리에 온다는 말에 모르간은 뛸 듯이 기뻐했다.
권총수는 자신이 파리에 가는 이유와 오민철이 처한 사정을 설명했다.
“오오, 세니어(주님)!”
모르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모르간 상사는 부대 팔씨름대회 3판 2선승제 결승에서 오민철에게 아깝게 패했다.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우람한 자신을 이기는 것에 그는 불가사의 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전화를 내린 권총수는 후우하며 길게 연기를 뿜었다.
지금까지 오민철은 서너 차례 위험에 처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아내 지소현이 같이 잡혀 있는 것이다.
전화 통화가 불가능한 걸 보면 납치범들에게 크게 당했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신들이 전화를 받을 필요가 없다.
오민철은 더 이상 자신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또 버텼음이 틀림없었다.
‘형 내 생각 할 것 없어. 미안해 할 건 더욱 없고, 나에 대한 모든 걸 말해줘도 돼.’
권총수는 처음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소현 때문이다.
날이 밝지 않은 캄캄한 새벽인데 많은 회사 관계자들이 공항에 배웅을 나왔다.
채명천이 오민철의 납치 소식을 간부들에게 전달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굳은 표정이었는데 권총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일 없을 것입니다. 오 이사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평소처럼 일들 하세요.”
비행기 뜰 때까지 있겠다는 사람들을 강제로 보내다시피 하고 채명천만 남았다.
“별일 없겠죠?”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잘 될 것입니다.”
권총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지소현이었다.
자신과 오민철은 워낙 피를 많이 뿌려놨기 때문에 복수가 곳곳에서 들어올 수 있고 충분히 이런 일을 예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소현은 다르다.
아무 죄도 없다.
지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면서 동영상이 왔다는 글씨가 뜬다.
이어 전화가 울렸는데 강순태 경리과장이었다.
“대표님 조금전 호텔 지배인과 통화가 되었고 영상을 받아 지금 보냈습니다. 저희도 살펴 보겠지만 직접 보시죠.”
“수고했습니다.”
권총수는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영상을 돌렸다.
가장 먼저 나오는 화면은 축의금을 받는 로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권총수의 눈이 영상을 훑기 시작했다.
축하객과 어떤 불손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태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반인들 눈으로는 찾아 내지 못하겠지만 권총수의 눈은 절대 피할 수 없다.
권총수는 오민철을 중심으로 흩어지고 만나는 사람들 중심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장 안으로 화면이 바뀌자 가족들이 앉은 곳을 집중 살폈다.
적이라면 축하객들이 있는 곳 보다는 가족을 포함한 친인척들이 앉아있는 곳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곳에 앉아야 오민철의 신혼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량은 30여분 정도 되는 양이지만 권총수의 훑는 속도가 빨라 비행기 탑승 전까지 무려 세 번을 보았다.
같이 보던 채명천은 전혀 의심스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듯 권총수를 돌아보았다.
“흐음!”
권총수는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그러더니 두 곳의 영상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는 오민철이 벌교에서 올라온 삼촌과 악수를 하면서 무슨 말을 나누며 웃었는데 그 순간 옆에 바짝 붙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내였다.
“눈 여겨 보세요.”
이어 영상을 빠르게 돌리더니 식장으로 바뀌었고 친인척들이 앉은 줄 가운데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조금전 보았던 사내인지 알 수는 없다.
처음 사진은 뒷모습이었고 지금은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동일한 건 남색의 양복이었다.
“영상을 채 이사님께 보내줄 테니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동일인이지 확인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권총수는 동영상을 채명천에게 보냈다.
사를드골 공항에 도착한 대한항공의 승객들이 하나둘 입국장을 들어섰다.
가방 하나 달랑 맨 사내가 들어섰다.
약간은 헐렁한 청바지에 옅은 그레이 계열의 자켓을 걸쳤는데 짧은 스포츠 머리를 했다.
‘하나!’
사내는 입국장을 걸어 나오며 중얼 거렸다.
‘둘, 셋...모두 네 명!’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저 멀리 화장실이라는 안내 표시를 발견하고 급한 듯 걸음을 빨리했다.
사내는 화장실로 급히 사라졌고 채 30초도 되지 않아 네 명의 사내들이 다급한 걸음걸이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조용했다.
소변기 앞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금 전 들어온 사내는 소변이 아닌 문 안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화장실 문은 모두 다섯 개였다.
사내들은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닫힘과 열림 상태를 고개를 숙여 살폈다.
네 개의 문은 열림 상태에 있는데 마지막 안쪽 문이 닫힘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들어온 사내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윽!
툭!
두 명은 권총을 꺼냈고 두 명은 PMX9mm 기관 단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과 기관단총에는 소음기가 끼어져 있었는데 네 명의 사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르!
푸슉!
네 개의 총구가 쏟아내는 총알은 순식간에 화장실 문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스윽!
맨 오른쪽 사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사격이 멈췄다.
문은 거의 걸레조각이 되었고 잠금 장치가 풀려 반쯤 열려 있었다.
투툭!
총구로 문을 밀었는데 네 사내는 소스라쳤다.
당연히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여긴 화장실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변기가 부서지며 들어있던 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싸아악!
바로그때 무엇인가 베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이어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쿠쿵!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기겁했다.
바닥에 떨어진 건 조금전 자신과 같이 방아쇠를 당겼던 세 부하들의 목이다.
쿠쿠!
퍼억!
뒤이어 목을 잃은 부하들의 몸뚱이가 화장실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무 놀란 사내는 얼어붙어 아무소리도 하지 못했다.
도무지 불과 몇 초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혼이 빠진 시선으로 바라보던 우두머리 사내는 또 놀란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사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죽은 세 사내를 자신처럼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살려둬야 할 것 같아서.”
우두머리 사내는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지만 방아쇠를 당길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여기서 나와 얘기 하겠소? 아니면 커피숍 같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고 있었고 부하들이 목이 잘려 죽었는데도 자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사람의 목이 두부도 아닌데 이렇게 잘릴 수 있는 건지 불현 듯 의심이 든다.
무엇으로 벴는지 사용된 무기는 뭔지 어떻게 강력한 목뼈가 있는 사람의 목을 이리도 간단하게 벨 수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되는 것이 없다.
“갑시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복잡해 질텐데.”
사내가 등을 돌렸다.
우두머리 사내는 그제 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듯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권총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엇!”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방아쇠에 끼어진 검지를 아무리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다급히 중지를 이용해 당기려는데 그것도 꼼짝 않는다.
‘맙소사!’
자신의 좌우 열 개의 손가락중 움직이는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사내는 재빨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 만큼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는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서둘러 쫓아가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는 자꾸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두 사내를 흘깃 거렸다.
분명 일행 같은데 승차 후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일행이 아니라면 나란히 승차할 이유도 없으므로 은근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살폈다.
‘혹시 게이?’
언젠가 게이 부부 둘을 태웠는데 공항에서 대판 싸운 듯 집에까지 가는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워낙 살벌했기에 자신까지도 숨죽이며 운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틀림없다’
운전사는 두 사람이 부부이며 공항에서 한바탕 싸웠다고 결론 내렸다.
남자는 오른쪽에 앉은 프랑스 사내고 왼쪽에 앉은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아내라고 판단했다.
분명한 것은 남편 쪽이 뭔가 큰 잘못을 했는지 안절부절이다.
운전사는 답을 얻은 것에 만족해하며 가속 폐달을 밟았다.
택시는 파리 중심가에 있는 ‘랑떼르 초등학교’ 앞에서 멈췄다.
권총수가 내리자 사내도 재빨리 따라 내렸다.
부우웅!
권총수는 사라지는 차를 잠시 바라보더니 굳게 닫힌 학교 정문으로 다가가 기둥에 붙은 벨을 눌렀다.
그러자 경비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구의 흑인이 나타났는데 교문 밖에 있는 권총수를 보며 깜짝 놀랐다.
“총수!”
흑인 사내는 외인부대에서 만났단 모르간 상사였다.
딸칵!
작은 샛문을 열고 나온 모르간은 권총수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게 얼마만인가. 미치도록 반갑군.”
키가 큰 모르간의 시선이 권총수 뒤에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묻는다.
“누군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에 우두머리 사내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열 손가락은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권총수가 아니면 누구도 정상으로 돌려놓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그건 곧 권총수가 이렇게 만든 것이므로 오직 그 만이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닙니다. 난 이 분을 잘 압니다.”
사내 랑글레는 항의하듯 눈을 빛냈다.
모르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는데 권총수가 입을 열었다.
공항에서 있었던 얘기를 자세히 설명하자 모르간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손가락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놨단 말인가?”
랑글레라는 사내의 손가락을 보았는데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오른손에 권총이 있다.
총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 없어 주머니에 찔러 넣은 것이다.
“총수, 들어서자마자 이들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그런 멋진 반격을 했는가?”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다 멈칫했다.
학교 앞 금연구역이라는 글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 흡연은 경찰이나 시청이 아닌 보안요원이 통제를 하지. 내 권한으로 자네의 흡연을 허락하겠네.”
“내가 이래서 프랑스 축구를 좋아하죠.”
딸칵!
담배를 피워 문 권총수가 말했다.
“인천에서 파리 직항이 12시간 걸립니다. 오늘 5시에 전화를 걸어오지 않으면 오 이사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럼 계산해 보죠. 항공사를 통해 인천에서 파리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비행기가 몇 시에 있는가? 내가 그들과 통화 했을 때 서울 시간으로 9시 10분 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인천에서 파리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시간이 새벽 2시반 대항항공이었죠.”
모르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도착 시간이 정확히 알려지는군.”
“다행히 비행기가 평소보다 20분 빨랐지만 어쨌든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이들의 계산을 읽어냈다는 것입니다.”
권총수는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