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1화: 파리의 날씨(2)
권총수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변수였다.
전해철은 부랴부랴 주주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는데 지금와서 권총수의 요구조건을 거절한다는 건 시간적으로 늦었으며 위험하다.
“방법이 없잖소.”
회의는 권총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M&A에서도 경영권에 관여할 권한은 발행주식의 몇 퍼센트를 매입하느냐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평균 5퍼센트를 쥐어야 한다.
그런데 워낙 승부처였기 때문에 2.1퍼센트인데도 두 명의 이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권총수의 등장은 모두의 얼굴에 불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젠장!”
전철해와 김복동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블랙잭의 시가총액이 이미 125억달러를 넘어섰던데.”
“125억 달러면 우리 돈으로 얼아먀?”
“15조원 정도죠.”
“완전 재벌이군. 거기에 천왕중공업 지분까지 계산하면 우린 이미 쳐다볼 수도 없는 머나먼 세상에 있잖아.”
“문제는 블루 캐피탈의 지분을 30퍼센트 올려 전량 매입할 의도입니다. 장사꾼은 절대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같이 손 한번 잡자고 제의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연락이 없어 없었던 일로 정리했지. 지금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 알았나.”
전철해는 술잔을 비웠다.
“씨발, 죽 쒀서 개(권총수)주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일단은 주총에서 경영권을 차지 한 뒤 기회를 노려 봐야죠.”
“글쎄. 그래야겠지.”
불안하다.
힘들여 사람들을 긁어 모았고 힘들게 M&A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상대하기 벅찬 인물이 나타났다.
“수틀리면 가는 거지 뭐.”
“가다뇨?”
“부산 국제 시장에 가면 AK 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들었어. 안되면 갈겨 버릴 거야.”
전철해는 이를 깨물었다.
이번 일에 자신의 인생이 달렸다.
권총수는 채명천을 포함한 회사간부들과 앉아 있었다.
주식 매입은 채명천을 포함한 회사간부들과 의논을 거친 후 내려진 결정이다.
‘내가 보기에 천왕물산은 넘어갈 것 같습니다’
마석춘으로부터 천왕물산의 얘길 듣고 회사 관계자들에게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지시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보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M&A를 목적으로 외국계 자본들이 본격적인 공개 매수에 나섰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측에서도 M&A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주식 매수에 들어간다.
양쪽이 충돌하다보니 당연히 주가는 껑충 뛰어 오르고 이따금 M&A을 노리는 측에서는 주가가 오른 틈을 타 처분을 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기기도 하는데 어쨌든 천왕물산쪽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맞서서 주식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권악수가 교도소에 있지만 분명 맞설 것을 지시했을 것이다.
천왕물산은 알짜배기다.
오대천왕이라는 말이 있다.
천왕그룹내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개 계열사를 의미하는데 그중 물산도 포함될 만큼 권악수의 애정이 듬뿍 들어가 있다.
‘동조자가 있습니다’
천왕물산 내 전해철 일당과 손을 잡은 고위 임원이 있다는 얘기였다.
공개매수에 적극 저항하지 않는걸 보면 권악수의 최측근중 한 명이 배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것이 조사 결과였다.
‘우리가 먹죠’
그때 관리부장 문영출이 불쑥 뱉었다.
M&A전문가다.
학교도 미국에서 나왔고 월가에서 제법 명성있는 투자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그를 스카웃 해 왔다.
‘차려 놓은 밥상인데’
M&A는 합법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장 정서는 묘했다.
자본의 강탈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총대는 전철해를 포함한 그들이 멜 텐데 이쪽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권총수의 사인이 떨어졌다.
작전은 일사천리로 시작 되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주총까지 며칠 남았죠?”
“일주일 입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히 거머 쥘 수 있는 시간이다.
외인부대시절 모술 탈환 작전 때 가장 먼저 외인부대가 들어갔다.
연합군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하달되고 불고 여섯 시간만에 IS 방어선을 뚫어 버린 것이다.
모술을 빼앗기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IS로서는 물러날 수 없는 작전이었기에 하루 이틀 사이에 연합군의 시내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외인부대가 들어가 버리자 놀라운 돌파력에 극찬이 쏟아졌고 결국 무공훈장까지 받았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일은 작전이라고 까지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블랙잭이 미국 시장에 상장됨으로 이른바 실탄은 얼마든지 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냅시다. 퇴근들 하시죠.”
간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권총수 혼자 남았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 졌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천왕물산 건으로 회의가 늦어졌다.
지이잉!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요동을 쳤다.
다가온 권총수는 핸드폰 액정을 보았는데 낯선 번호였고 더욱이 국제전화였다.
보이스 피싱 전화일까 싶어 무시하려다 때마침 오민철이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난 것을 떠올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민철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탓에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미스터 권총수?”
불어다.
외인부대를 나오지 않았다면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시죠?”
“파리 경찰청 생활안전국 소속 시소코 경위입니다.”
이 역시 보이스피싱 아닐까 의심했다.
보이스 피싱 조직이 프랑스어를 하지 말란 법이 없다.
권총수는 일단 더 통화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생활안전국?”
우리로 치면 강력계다.
“오민철씨 아시죠?”
보이스 피싱이 아니다.
권총수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분이 렌트한 벤츠 승용차가 범죄에 노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오민철이 렌트한 차량이 아나똘르 사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여러 정황이 납치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느냐는 말에 오민철이 지갑을 떨어뜨렸고 거기에서 명함을 찾았다는 것이다.
권총수는 이마를 찌푸렸다.
상대는 분명 논리적으로 설명을 했지만 권총수의 머릿속에는 상황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것이다.
“오민철씨와 통화는 됩니까?”
“연락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핸드폰이 있으면 찾아내겠지만 우리가 확보한 건 권총수씨의 명함 말고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몇 군데 알아 본 뒤 다시 전화드리죠.”
전화를 끊고 난 권총수는 재빨리 오민철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울리자 벨소리가 멈췄다.
누군가 받은 것이다.
권총수는 모든 감각을 끌어 올렸다.
오민철이라면 바로 여보세요 하거나 권대표 여기 파리야 하고 말했을 것이나 전혀 그런 액션이 없다.
숨소리만 느껴지는데 거칠다.
그건 전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남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보세요와 누구십니까는 큰 차이가 있다.
여보세요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해석 될 수 있으나 누구냐고 물을 땐 당신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권총수씨?”
역시 불어다.
권총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리 경찰청에서 걸려온 전화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채명천이 퇴근 안 하냐며 들어왔다가 통화를 하는 권총수를 발견하고 손만 들고 돌아서려고 했다.
권총수가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채 이사님 당장 카이로에 있는 맥보란에게 전화 해주세요. 긴급입니다. 내용은 오 이사님이 파리에서 납치되었으며 지금 수신되고 있는 오이사 핸드폰 위치를 추적해달라고.’
채명천은 재빨리 가방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눌렀다.
맥보란의 전화번호는 권총수를 통해 암호로 저장되어 있다.
혹시 핸드폰을 분실 하더라도 주위 사람 번호는 몰라도 맥보란의 것은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물론 맥보란의 허락을 먼저 받았다.
슥!
채명천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건 맥보란과 통화가 됐다는 신호였다.
“오민철씨 잘 아시죠. 아내와 같이 파리로 신혼여행을 온 듯 한데?”
사내가 말했다.
“바꿔주시오.”
권총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한 뒤 재빨리 채명천의 전화기 송신구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맥, 캡틴입니다. 오이사가 파리에서 사건에 휘말린 듯 싶습니다. 지금 범인으로 보이는 자와 통화중이니 수신 위치 파악 좀 부탁 드립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데 음성은 정확히 채명천의 핸드폰을 통해 맥보란에게 전달되었다.
혜광심어(慧光心語)다.
불가의 최고 전음인데 생각만으로 이쪽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거리가 있었지만 권총수의 귀에는 맥보란의 놀라는 소리가 충분히 들렸다.
‘예, 날 잡기 위해 오 이사를 붙든 듯 보입니다. 신혼 여행 중입니다’
맥보란도 축의금을 보내왔기에 결혼했다는 건 알지만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까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죠’
맥보란이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때 상대쪽 사내가 말했다.
“오늘이 5월16일 이곳 시간으로 5월17일 오후 5시에 전화를 주시오. 만약 전화가 없다면 오민철씨 부부를 시신으로 포장하여 서울로 보내드리죠.”
전화가 끊어졌다.
“대표님 오이사가 사고를 당하다뇨?”
채명천이 다가왔다.
“이사님 파리 직항 가장 빠른 것으로 한 장 끊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채명천은 곧장 여행사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이를 악물었다.
전혀 대비하지 못했고 일어나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오민철이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걸 알았을까.
‘내부자’
이런 건 백퍼센트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다.
권총수는 한곳에 전화를 걸었다.
“강순태 과장, 지금 당장 오이사가 결혼했던 호텔에 연락해서 CCTV를 확보하세요.”
강순태는 경리과장이다.
예식비 일체를 회사에서 결재했기 때문에 담장자이기도 했다.
전화를 다시 끊었을 때 채명천이 내일 새벽 2시30분 비행기 예약을 마쳤다고 했다.
“2시30분이면 파리까지 12시간 소요되는데, 아슬아슬하군.”
“무슨 일일까요? 누가?”
채명천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집에 도착한 권총수는 속옷 몇 가지만 챙겨 가방에 담았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매고 갈 가방을 거실에 놔두고 마당으로 나온 권총수는 애먼 담배만 피워댔다.
프랑스와 악연은 없다.
프랑스쪽 테러범들과 피 끓는 대결을 벌인 적도 없고 오히려 외인부대라는 인연을 갖고 있는 나라다.
팟!
담배를 피우고 있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재빨리 핸드폰을 검색했는데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이 몇 번 바뀌었기 때문에 새롭게 저장된 연락처가 많고 과거의 것은 상당부분 사라졌다.
“알라후 아크바르!”
너무 기쁜 나머지 신은 위대하다고 외친다.
있다.
분명히 연락처가 있었다.
권총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간다.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지만 충분히 기억되는 목소리였다.
“모르간, 권총수입니다.”
“권총수? 사막의 흑새?”
“알아보는군요. 맞습니다.”
“오오 이런 거부가 되어 버린 자네가 내게 전화를 하다니 기쁘군. 가끔 자네소식이 이곳 신문에도 실리는데 그때마다 너무 돈을 잘 번다는 말에 배가 수시로 아프다네.”
외인부대 시절 직속 상관중 한 명이었던 흑인상사 모르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