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파리의 날씨(1)
차가 멈췄다.
앞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트렁크 또한 열렸고 사내들은 오민철을 잡아 당겼다.
오민철은 쿵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격렬한 옆구리 통증으로 정신은 수시로 흔들렸고 더욱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내 생각에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오민철은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사내들은 모두 백인이다.
“내 아내는 어디 있소?”
“흐흐흐! 걱정마.”
“아내와 통화를 해야겠소. 지금 당장...으윽!”
옆에 앉은 사내가 구둣발로 옆구리를 찍었는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렇게 강하게 때린 것 같지 않는데도 숨이 막히는 것이 차가 충돌할 때 밀려 들어온 문짝에 의해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오민철을 고깃덩이처럼 끌고 갔다.
오민철은 주위를 살폈다.
차량 부품들이 쌓여있고 눈에 익은 공구들을 보아 자동차 수리를 하는 공업사 정도로 보였다.
“민철씨!”
오민철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내 지소현이 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다.
“소현씨!”
오민철이 절뚝거리며 다가가려 하자 옆에 있던 사내가 주먹으로 다시 옆구리를 갈겼다.
사내는 오민철의 갈비뼈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아는 듯 그곳만 집중 가격을 했다.
커억!
오민철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혼이 나갈 듯 아프다.
온 몸이 뜨거운 열기에 덮이고 머리끝이 곤두서면서 입에서 거품을 토했다.
오민철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두 사내가 쓰러진 오민철을 부축하더니 의자에 앉혔다.
하지만 오민철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으로 나동그라지자 발길질을 가했다.
빠악!
또다시 왼쪽 옆구리다.
붉게 달아 오른 쇳덩이 하나가 옆구리를 파고드는 듯 했다.
두 사내는 다시 오민철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오민철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양 다리를 벌려 지탱하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사내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하나 같이 백인들이었다.
프랑스 사람들로 보였는데 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서른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곱슬머리에 약간 마른체구이며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의자를 가져다주는 걸 보아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여진다.
사내는 의자에 앉더니 오민철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막의 흑새에게 전화를 해.”
오민철은 아찔했다.
모든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온다.
권총수를 잡기 위해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사내들은 누굴까.
사막의 흑새에게 원한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당신들!”
빠아악!
우두머리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고 측면에 있던 사내가 쇠파이프로 오민철의 머리를 갈겼다.
머리가 깨지면서 붉은 피가 순식간에 얼굴을 덮는다.
“민철씨!”
“요리스 그 계집 주둥이 묶어!”
아내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윽!
우두머리 사내가 오민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주었다.
“전화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두 사람 파리를 살아서 나가지 못해.”
오민철은 전화를 받았지만 바로 걸지 못했다.
누구보다 권총수를 잘 안다.
즉시 파리로 날아 올 것이다.
자신 혼자라면 더 이상 권총수에게 신세 질 수 없어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칠 자신 있다.
그러나 아내가 걸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 일과는 철저히 무관한 사람이다.
결혼하자마자 이런 사태를 겪고 있다는 자체가 미안하고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흔히 하는 말로 오랫동안 살아오기라도 했다면 남편의 직업 특성상 언제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여자가 알고 있을테니 입장을 말하기도 쉽다.
아내를 살리자고 권총수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넥타이로 입을 틀어 묶여 어어어 하는 소리만 내고 있는 아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려울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교사 생활을 시작한 여자가 이런 일을 경험했을 리 없다.
인간에게 공포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없다.
“싫은가요?”
우두머리 바란이 묵직하게 물었다.
“요리스!”
바란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쫘아악!
요리스가 지소현이 입고 있는 단추가 있는 상의 남방을 거칠게 찢어 버렸다.
벌떡!
오민철이 일어나려 하자 빡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나동그라졌다.
이번에도 쇠몽둥이가 머리를 내려친 것이다.
바닥에 넘어진 오민철은 고개를 들었다.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두 눈은 아내에게 향했다.
브래지어가 드러나고 요리스란 사내가 헤실헤실 웃고 서 있다.
“우우우!”
오민철의 입에서 짐승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아아아!
오민철이 악에 바친 괴성을 지르며 몽둥이를 들고 있는 튀랑이라는 사내를 덮쳤다.
그러나 이미 갈비뼈가 부러진 중상에 연이은 몽둥이질로 비호같았던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쿵!
오민철은 튀랑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아직도 여기가 어딘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군.”
퍼퍼퍽!
쓰러진 오민철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오민철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오민철이 더듬거리며 말하려고 하자 지켜보고 있던 지소현이 몸부림치며 외쳤다.
“가아르으으 처억 죽지 마아아아.(가르쳐주지 마)”
넥타이에 입을 물려 발음이 정확하지는 못했지만 오민철은 분명하게 알아 들었다.
절대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소현도 오민철을 통해 권총수가 어떤 사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민철의 말 그대로를 믿는다면 그는 거의 보기 드문 사내이고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조금 전 오민철이 말을 하기 위해 더듬거린 건 아니었다.
아내를 풀어주면 말하겠다는 얘길 하려는데 지소현이 미리 짐작하고 소릴 지른 것이다.
“이년이!”
요리스가 지소현의 뺨을 후려갈겼다.
쪼아악!
지소현은 바닥으로 뒹굴었고 요리스의 구둣발이 그녀의 배를 밟았다.
퍽!
지소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온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전철해는 호텔 도어맨에게 키를 맡기고 계단을 올라 로비를 들어섰다.
커피숍은 2층이다.
흘긋!
손목시계를 봤는데 약속시간 2분 전이다.
그가 지금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어느 쪽으로도 발을 담그지 않고 있는 블루 캐피탈 영업본부장이다.
며칠 전부터 공을 들였는데 오늘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블루 캐피탈이 소유하고 있는 천왕물산 주식은 2.1퍼센트이다.
한 주가 아쉬운 지금 2.1퍼센트는 승부를 가름할 양이기 때문에 전철해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이 찬다.
오후 2시의 커피숍은 한가했다.
실내를 쭈욱 훑어보던 전철해의 시선이 안쪽 창가에 멈췄다.
낯익은 사내가 앉아 있는데 블루 캐피탈 영업본부장인 고철영이다.
그런데 낯선 사내가 고철영과 마주 앉아 웃으며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시간이고 장소인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등장에 전철해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떻게 성사된 오늘 자리인데 싶어 걸어갔다.
“본부장님!”
전철해가 부르자 얘기를 하고 있던 고철영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오십시오. 사장님!”
고철영이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전철해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며 누구냐는 듯 눈짓을 했다.
“대표님 제가 말했던 전철해 천왕제지 사장님이십니다.”
대표님이라는 말에 전철해의 눈이 빛난다.
요즘은 개나소나 대표 사장 회장이다.
그러나 단순히 립서비스 차원의 대표님이 아니라 태도까지 공손한 것은 어느 회사대표임이 틀림 없었다.
스윽!
전철해는 재빨리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밀었다.
“전철해입니다.”
“난 명함이 없습니다.”
전철해는 흠칫하며 바라보다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전철해는 사내와도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있다.
전철해는 일단 분위기 파악에 들어갔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앞으로 일주일 후에 있을 천왕물산 주총을 위해 분골쇄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주일 후 주총에서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고철영이 낯모르는 사내를 데리고 나왔다는 건 어쩌면 일에 깊이 관여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블루 캐피탈은 거의 사채회사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캐피탈과 차이점이라면 웬만한 신용도에도 대출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직까지 누군가에게 돈을 떼어 먹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블루 캐피탈 주주 상당수가 원로 주먹들이라는 소문이 있다.
현 사장 김중전은 제일대학을 나온 인물로 대주주중 한 사람의 조카라는 말이 있지만 정확한 건 아니다.
고철영 영업본부장 역시 블루캐피탈 주주 몇 명을 배경으로 갖고 있는 실세 중 한 명이다.
‘주주중 한 명이다’
전철해가 사내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얘기 오래 끌어봤자 서로의 건강에 좋을 건 없을 테니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죠.”
고철영이 입을 열자 전철해의 눈이 빛난다.
“사장님을 도와 드리죠.”
벌떡!
전철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고철영 영업본부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천왕물산 경영권을 쥐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쪽에서 임원 두 명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 하나 만들어주고 월급만 받는 형식적인 이사가 아니라 경영에 참여하고 간섭하며 제지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전철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2.1퍼센트는 적은 양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명의 임원을 경영이사로 받아 줄 만큼은 아니었다.
“대표라고 하셨는데 어느 곳에 계시는지?”
경영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분에 대한 분명함이 드러나야 한다.
“블랙잭 대표입니다.”
블랙잭이라는 말에 전철해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듯 했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걸 보면 속으로 블랙잭을 되뇌이며 나름대로 떠올려 보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다.
화악!
갑자기 전해철의 눈이 커졌다.
“블랙잭이라면 혹시 보안회사?”
사내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전해철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권총수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제 오전 갑작스럽게 블루 캐피탈 자체 주주총회가 열린 것이다.
안건은 아주 간단했다.
누군가 지금의 거래 시세보다 30퍼센트를 더 얹어 블루 캐피탈이 갖고 있는 주식을 전량 매입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의였다.
처음에는 어느 누가 작당을 하는 것인가 하고 모두가 반대를 했고 도대체 그게 누구냐며 대부분이 의심했다.
그때 회의장에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명은 전설적인 칼잡이며 어군의 사장인 마석춘이었고 또 한 사람은 권총수였다.
마석춘은 블루 캐피탈의 주주중 한명이었다.
또한 가장 많은 13퍼센트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뒷골목 선배들도 있지만 명성은 누구도 마석춘을 따르지 못했다.
그런 마석춘이 데리고 들어오는 사내를 모두가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블랙잭 대표이사 권총수입니다. 중동에서는 사막의 흑새로 불리는 분이죠.”
권총수는 담판을 지었다.
지금 당장 전액 현금결제 하겠다는 제안에 모두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M&A가 시작되면 지분 확보를 위해 거래가보다 더 높게 매수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가격을 30퍼센트까지 올려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거래는 그렇게 이뤄진 것이다.
물론 마석춘이 중간에 다리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