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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79화 (479/651)

제479화: 호사다마(好事多魔)3

벤치 두 개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고 그 앞으로 모래가 가득 담긴 커다란 화분형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함인 듯 바깥의 조명은 약간 어두웠는데 권총수는 빈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자신보다 앞서 두 명의 사내가 서로 마주보고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권총수의 눈이 빛난다.

상대는 약한 조명으로 인해 이쪽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권총수의 눈은 사내가 누군지 확인되었다.

‘전철해와 김동복’

죽은 권철악의 두 사위였다.

그동안 천왕그룹에 대한 소식은 뜸했다.

자신이 임명한 경영진들이 냉정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쓸데없이 손을 댄 사업은 중지하거나 갈아엎으면서 천왕중공업의 재무구조는 탄탄해졌다.

주가가 연일 상승장이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회사를 넘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간접적으로 구매의사를 밝힌 회사가 몇 곳 있었지만 블랙잭 일이 너무 바빠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는 않았다.

“현재로서는 안전권에 들어있는데.”

김복동이 눈을 빛냈다.

“임시 주총이 며칠 남았지?”

전철해가 큰 사위다.

“열흘 남았습니다.”

전철해가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는 공격이 아닌 문단속을 해야 할 때야. 저쪽에서도 필사적으로 나올 테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걱정 마십시오 형님. 내가 누굽니까?”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갔는데 권총수는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천왕물산 임시 주주총회가 열흘 후에 열린다는 것이었다.

권총수는 담뱃불을 끄고 자리로 돌아왔다.

갑작스런 권총수의 질문에 마석춘이 멈칫했다.

“천왕물산 주총에 대해 제가 뭘 알겠습니까?”

화장실을 다녀온 권총수가 전철해와 김복동의 얘기를 들려주며 천왕물산의 주총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다.

권총수는 모른다는 마석춘의 말에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모르는 게 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정말 모릅니다.”

권총수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듯 보이자 마석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실 어군은 그 옛날 남산에 있던 외교구락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산의 외교구락부는 양식집이었는데 1949년에 문을 열었다.

건국초기 양식집이 귀할 때 태어난 외교구락부는 식당이면서도 정계와 재계 문화계 거물들이 드나들어 ‘고관대작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해졌다.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기마다 중요한 정치문제의 막후 협상무대가 됐던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며 남산 기슭에 대지 1천2백평 건평 1백40평 규모다.

그때 당시는 제대로 된 양식집이라고 해봤자 조선호텔과 반도호텔 뿐이었다.

그런데 이곳들은 주한외국인들이 모조리 차지하는 바람에 일본유학을 비롯한 외국물을 먹고 해방과 함께 돌아온 거물정치인들이 먹을 만한 양식집이 없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조병욱(전 내무부 장관) 장택산(전 국회의원이며 국무총리) 등은 아예 지정석을 마련해놓고 다니는 단골이었으며 윤보설 전 대통령과 허성 전 내각수반 김영살 민주당총재도 얼굴을 들이 밀었다.

5·16을 전후해 정치인 세대교체가 되면서 이곳에 모습을 나타낸 손님이 고 박정이 대통령, 김종팔, 박종균 김재구 김형웅 등이었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후 야당탄압이 심해지던 75년 양 김(김영살 김대준)과 윤보설 전 대통령 함석건 등이 외교구락부에 모여 유신반대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곳은 어느 순간 야당의 집으로 변했다.

이밖에도 고 이병천 삼종회장, 정주열 한대그룹명예회장, 박홍식 수신그룹회장 등 재계인사와 이배미 김옥갈씨 김수완 추기경, 한경진 목사 등 학계·문화계·종교계에 걸쳐 단골손님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의 어군이 당시 외교구락부와 닮은 것이다.

많은 정관계 및 재계 인물들까지 이곳에서 식사를 하며 밀담을 나눈다.

그러다 보니 마석춘이 보고 듣는 것이 조금씩 쌓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지금 세간에 어떤 소문이 흘러다니면 진원지로 누굴 꼽는지 아십니까. 나 마석춘입니다. 물론 한 번 들어온 말은 절대 내 입을 통해 나가지 않는다는 걸 믿지만 세상 인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걸핏하면 날 쳐다보는데.”

그래서 함부로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하지 마세요. 입장 난처해지면 사업에도 영향이 있을 텐데?”

술잔을 들어 마시는 권총수를 보며 마석춘이 투덜거렸다.

“어떻게 내 귀에는 얘기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권총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두 달전 ‘프로덱터 자산운용’이라는 곳에서 천왕물산 주식 5퍼센트를 매입했죠. 경영권 관여 자격을 얻은 프로덱터는 천왕물산이 보유중인 천왕전자 주식을 매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능한거요?”

“물론입니다. 엄청난 대주주인데 경영진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천왕카드 증자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다 홍콩계 투자회사인 그랜드슬램이 천왕물산 주식 6.1퍼센트를 사들였죠. 이로써 천왕물산의 주식 약 45퍼센트가 외국인들 손에 넘어갔습니다.”

“천왕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천왕물산의 지분은 어느 정도요?”

“8퍼센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불안하겠군.”

“불안하죠. 국내 우호지분을 합쳐 봤자 40퍼센트 내외라고 들었습니다.”

“권악수는 아직 교도소에 있소?”

“8.15특사로 나온다는 설이 있습니다.”

“몇 년 살았다고 벌써 나온단 말입니까?”

“대한민국 법은 딱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처럼 불공평하게 법이 행사되는 국가는 없을 것입니다. 더 웃기는 건 권악수를 석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무려 51퍼센트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면 그런 엄청난 범죄자를 풀어줘야 한다고 호응하는지 솔직히 얼굴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권총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들은 대기업이 동네 슈퍼인지 알죠. 주인 없으면 망하는 조그만 가게 말입니다. 수많은 두뇌들이 결집되어 있어 총수 부재로 망한 대기업은 없는데.”

“광고를 얻으려는 언론의 선동과 교묘한 여론 조작에 넘어가는 겁니다. 나 같이 못 배운 사람도 권악수 석방을 지지하는 신문 칼럼을 보면 억지와 논리적 허점이 사방에 보이던데 그런 기사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나 봅니다.”

권총수는 스시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었다.

차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권총수는 마당 가운데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딸칵!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달이 중천을 넘어가고 있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프랑스와 스위스를 10박 11일 동안 여행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떠난지 불과 10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보고싶다.

오민철과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그런 관계가 되어 버렸다.

오민철은 지켜야 할 선을 알았다.

침범해도 되는 영역과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처세했다.

사석에서는 죽일놈 살릴놈 하지만 공적 업무 영역에 들어오면 철저히 아랫사람으로 행동을 한다.

적응되지 않는 행동에 평소처럼 하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위 다른 직원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 오민철의 지론이었다.

부욱!

담뱃불을 끄고 일어난 권총수는 현관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 * *

드골 공항이다.

인천에서 직항으로 12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오민철의 얼굴은 싱글벙글이고 아내 되는 지소현 역시 전혀 피곤함을 엿볼 수 없었다.

소개팅으로 지소현을 처음 만난 뒤 이틀 만에 전화를 걸었다.

오민철은 첫눈에 반했다고 목소리 높여 사귀자고 했다.

그런데 지소현이 한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건 다름 아닌 용병생활 청산이었다.

오민철은 적지 않게 갈등했다.

지소현이란 여자는 보기 드물게 차분하고 실속이 있었기에 자신보다 가족들이 더 좋아했다.

어쨌든 직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생활을 그렇게 간단하게 청산할 수 없었고 심각한 고민은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그러다 블랙잭이 창업되고 이제 현장이 아닌 관리이사로 근무한다는 말에 지소현은 뛸 듯이 기뻐했다.

택시는 파리 리츠호텔로 둘을 데려다 주었다.

두 사람은 예약한 방의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가에 사랑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오민철은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다음 날 가장 먼저 향한 코스는 저 유명한 에펠탑이다.

호텔의 서비스를 받아 차량을 렌트한 두 사람은 에펠탑을 찾아 출발했다.

“가봤어요?”

워낙 외국을 많이 돌아다닌 오민철이었기에 지소현이 가봤냐고 묻는다.

“한 번 왔지.”

“여행은 아닐테구요?”

“물론이지. 테러범들을 쫓아 왔는데 몇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 그때 총수 아니면 오늘 여기 없을지도.”

씨익!

오민철은 웃음을 지었다.

“총수는 멋진 놈이야.”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나이도 민철씨보다 한참 어리다는데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따뜻하죠.”

“외롭게 큰 녀석이지. 성인이 되었는데도 손잡고 부모와 나들이 가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눈물이 나온다는 거야.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잊혀지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자신을 버린 부모를 향한 적개심은 더욱 강해진다더군.”

그래서 권씨 일가를 더욱 공격하는지도 몰랐다.

지소현이 긴 한숨을 쉬었다.

뿌아앙!

갑자기 오른쪽 골목으로부터 승용차가 튀어 나왔다.

끼이익!

오민철이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튀어 나온 차가 오른쪽 앞머리를 쳤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왼쪽 골목에서 달려 나온 차량이 운전석을 정면으로 들이 박았다.

콰아앙!

펑!

퍼퍼펑!

에어백이 터지고 안전벨트까지 맸지만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차문에 옆구리가 강하게 찍혔다.

“크흑!”

오민철은 비명을 흘리면서 운전석에서 터지는 에어백에 얼굴을 박았다.

퍼어억!

누군가 유리창을 깨뜨린다.

오민철은 호흡을 할 수 없을 만큼 옆구리의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사내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가위로 안전벨트를 잘라내고 그대로 끄집어냈다.

“아아악! 민철씨!”

지소현의 비명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에서 달려 나왔던 승용차에 지소현이 태워지고 있었다.

“소현씨!”

탁!

부우우웅!

지소현을 태운 승용차가 후진을 한 뒤 오른쪽으로 꺾어 사라졌다.

빠악!

몽둥이 하나가 오민철의 뒤통수를 갈겼다.

쿵!

오민철은 맥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사내들은 오민철은 끌어다 차량 트렁크에 실었다.

“출발!”

사내들은 재빨리 차를 후진시켜 사라졌다.

주인없는 벤츠 승용차만 좁은 사거리 중앙에 서 있었다.

오민철의 모든 관심은 아내 지소현이었다.

트렁크를 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차는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차가 멈췄다.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트렁크 또한 열렸고 사내들은 오민철을 잡아 당겼다.

오민철은 쿵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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