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9화: 채무회수(1)
맥보란은 더듬거리듯 말했다.
“면목 없습니다. 내 선에서 어떻게 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맥보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권총수는 히죽 웃었다.
“그 계약건으로 내 행동을 제약하겠다는 것이군?”
“계약건이라니, 설마 얼마전 CIA와 맺은 300억 달러짜리 중동 사업건?”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젖었던 땅이 급속하게 마르는 것처럼 웃음으로 가득하던 권총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섭섭하긴 해도 어쩔 수 없죠. CIA라는 공신력을 믿고 계약을 위반했을 때 어떤 보상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지 않았는데, 잘 알겠습니다.”
“캡틴!”
“이번 사건 처리하느라 소요된 경비까지 줄 수 없다고 버티진 않겠죠?”
권총수는 웃었는데 맥보란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CIA는 미국 정보기관이다.
그건 곧 미국정부가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생각할수록 마운트 대외협력실장의 처사가 저급했다.
“아 젠장 미국이란 나라가 원래 이래.”
오민철이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릴 질렀다.
“야 가자.”
오민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또 봅시다!”
권총수는 등을 돌려 서너걸음 걷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돌아섰다.
“아, 한 가지 빼 먹은 것이 있습니다. 사막의 흑새는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누구든 치고 들어오면 절대 가만있지 않는다는 걸 마운트 실장에게 좀 전해 주십쇼.”
화악!
그건 자신을 죽이려한 제3국장은 물론 마운트 대외협력실장까지 가만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운트는 백악관에서도 발언권이 높다.
직책은 크게 눈에 차지 않으나 영향력은 비서실장 급이다.
그런 인물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캡틴 앉아 보세요. 좀 더 대화를 나눠야죠. 이렇게 되면 내가 앞으로 어찌 캡틴을 봅니까? 일이 아직 틀어진 건 아니잖아요. 며칠만 기다려보세요. 내가.”
권총수는 더 이상 멈추지 않고 나가버렸다.
“허어!”
맥보란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권총수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는 맥보란으로서는 이번 일을 잘 마무리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 해야한다.
맥보란은 서둘렀다.
권총수와 헤어져 곧바로 랭글리에 전화를 걸었고 국장 스티브가 마침 자리에 있었다.
“시간 좀 내주시죠. 곧 바로 가겠습니다.”
이어 비행기를 이용해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기 시작했다.
국장 스티브는 맥보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번째 만남이다.
첫 만남은 취임한 뒤 여러 명이 같이 앉는 자리였고 두 번째는 이번 일을 위해서였고 오늘이 세 번째였다.
맥보란의 직위가 낮지 않지만 CIA국장과 일대일로 대면할 기회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말해보게. 자네 의견을 들어보지.”
맥보란은 잠시 스티브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이건 약속 위반입니다. 우리가 아쉬워 직접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알고 있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계약은 예정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내 뜻이 아닐세.”
“마운트 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의뢰받은 사건을 누설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정치인들의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면 안 되는 인물입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마운트 실장의 입김이 워낙 강력하다네. 대외협력실장이라는 그 자리가 어떤 곳인가. 대통령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거나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청소하고 쓸어 내는 곳이야. 그러기 때문에 백악관 제3의 비서실장이라는 말을 듣지.”
“권모술수에 오염된 눈으로 그를 봐서는 안됩니다.”
“무슨 뜻인가?”
“살아있는 입은 반드시 열리게 되어있다는 말이 그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외입니다.”
“좋아. 내가 한 번은 더 통화를 해보겠네. 하지만 기대하지는 말아주게.”
“사막의 흑새를 적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그는 우리의 능력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맥보란은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뱉고 국장실을 걸어 나왔다.
어둡다.
두 사람은 주차된 차 안에 앉아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그때가 좋았는데.”
오민철이 캄캄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는 그냥 쏘고 죽이고 통장에 돈 들어오는 걸로 만족하며 살았는데, 가끔은 차도르를 쓰고 있는 아랍여성을 침 흘리며 바라보기도 했고.”
히죽!
오민철이 권총수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그리웠었지. 한참 혈기 왕성한 나이어서인지 새벽마다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를 달래느라 여기서 끙 저기서 끙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오민철은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갑자기 비렌드라가 보고 싶어지는군. 배우지 않으면 조국 네팔의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전쟁터에 뛰어든 친구였는데 말이야. 자기 연봉의 90퍼센트를 네팔 오지의 학교짓는데 쏟아붓다니 그 사람이야말로 선각자야.”
“왔어!”
그때까지 꽉 물려 있던 권총수의 입이 열렸다.
유리를 내리고 창문 밖으로 침을 뱉던 오민철의 고개가 재빨리 전면으로 돌려졌다.
맞은편 길가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섰다.
차가 멈춘 오른쪽으로 단층짜리 주택 한 채가 있는데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낮은 담장과 경사진 언덕을 잔디로 덮었다.
그리고 좀 더 안쪽에 사철나무를 잘 다듬고 깎아 울타리로 만든 단정한 단독 주택이 있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뒷문을 열고 케익과 커다란 장미다발을 챙겼다.
“오늘 가족 중 누구 생일인가 본데?”
“시동걸고 대기해!”
“놀래라!”
오민철이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권총수의 얼굴이 어느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권총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스으으!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3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길 건너 맞은편 차량에 도착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인물에 사내는 멈칫했고 거기까지였다.
마혈과 아혈이 제압된 사내는 꼼짝 못했고 권총수는 사내의 손에서 케익 상자와 꽃다발을 받아 차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 사이 포드 익스플로러가 다가왔고 트렁크가 열린다.
권총수는 사내를 짐 칸에 집어던져 싣더니 차에 올랐다.
철턱!
트렁크가 닫히고 차는 현장을 떠났다.
네 번째다.
오늘은 불러서가 아니라 자기 발로 찾아와 커피를 놓고 마주 앉았다.
더 이상 미국에 남아 할 일이 없다.
중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차 들렸는데 CIA국장 스티브가 커피 한잔을 권유해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네. 최선을 다했네.”
“어제 사막의 흑새가 나에게 보내 준 메일이 있습니다. 읽어드리죠.”
핸드폰에서 메일을 꺼낸다.
‘그린우드는 맥크레인 후보에게 대통령에 당선되면 인사권의 30퍼센트를 양보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치인의 그런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은 맥크레인이 바보라고 했지만 최소한 당시만 해도 둘의 관계는 신뢰로 가득 채워졌다.
맥크레인이 약속을 지키라면서 계속 요구하자 결국 그린우드는 제거작업에 돌입한다.
‘암호명 홍관조 날개 꺾기’
홍관조는 맥크레인의 지역구인 캔터키주를 상징하는 새다.
보좌관 페레즈의 불만을 적절하게 이용했고, 중국 당나라시대 양귀비가 사용했다는 백오분을 뿌린 파멜라의 유혹에 25년간 쌓아 올린 맥크레인의 정치 생명이 끊겼다.
맥크레인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대통령의 딸 클레어를 납치한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더 이상 정치인으로서 미래가 없었기에 두려움도 없고 주저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스티브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며 맥보란은 말했다.
“이제 클레어양 실종 사건 내막에 대해 나도 알고 국장님도 알게 됐습니다. 마운트 실장이 우리도 죽일까요. 비밀 유지를 위해?”
“이봐 맥. 말이 과하군. 우린 식구지만 사막의 흑새는 외부인이야.”
맥보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진다.
“뒷감당을 어찌하려는지?”
탁!
문이 닫혔다.
도대체 무슨 택배인가.
이토록 큰 택배는 처음이다.
겉 포장지에는 책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분해 조립이 가능한 책상이면 이런 모양과 형태로 배달이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자신은 시킨 적이 없었다.
앨릭스는 현관 앞에 놓인 택배를 몇 번 더 살핀 뒤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
남편 마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 명의로 커다란 택배가 왔어요. 책상이라고 하는데.”
“보낸 사람이 누구야?”
“존 스튜어트씨라고 쓰였어요.”
“스튜어트, 스튜어트.”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몇 번 중얼거리더니 마운트는 말했다.
“이름이 귀에 익은 걸 보니 아는 사람 같은데 알았어요. 내가 저녁에 가서 확인해보지 뭐.”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중이다.
그러므로 대외협력실에서는 그다지 일이 많지 않았다.
마운트는 야간 당직자들과 수고 하라는 인사를 나눈 뒤 차를 끌고 백악관을 나섰다.
오늘따라 차도 막히지 않는다.
평소 출근길 40분이 소요되는 거리가 오늘은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운트는 집 앞 담벼락 곁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마운트는 넓은 정원을 스윽 훑었고 키우던 시베리안 허스키가 달려와 점프를 하며 안긴다.
개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현관을 들어선 마운트는 눈이 커졌다.
낮에 통화했던 것처럼 커다란 택배 하나가 와 있었다.
“여보!”
그때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아내 앨릭스가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걸어왔다.
“열어보지.”
“당신 앞으로 온 것인데요. 뭘.”
마운트는 가방을 소파에 놓고 노끈으로 묶인 상자를 살핀 뒤 면도칼로 끈을 잘랐다.
툭!
투툭!
이어 투명 테이프로 발라진 접합 부분을 칼로 자르고 상자를 열어 젖혔다.
상자가 벗겨졌는데 안에 또 커다란 케리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뭐지! 책상 같지는 않는데.”
지켜보던 아내 앨릭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운트는 양쪽 스위치를 눌러 캐리어 가방을 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렸는데 비명을 질렀다.
“으헉!”
“아아악!”
앨릭스는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안색이 창백해졌다.
“으아아아!”
또 한 번 더 놀라며 앨릭스는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안방으로 도망쳤다.
뒤로 물러난 마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덩이가 되었는데 가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방 안에는 한 구의 시신이 쭈그린 형태로 있었다.
쿵!
시신은 옆으로 쓰러졌다.
“에드워드!”
“911”
방안에서 아내가 긴급 전화를 사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닥!
재빨리 뛰어들어가 소리친다.
“전화 끊어!”
앨릭스가 끊지 않고 있자 전화기를 가로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껐다.
“여....여보.”
앨릭스는 넋이 나가 있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마운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전화하지 말고 잠깐 쉬어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아내 앨릭스의 등을 토닥여준 뒤 문을 닫고 거실로 걸어 나갔다.
시신의 주인은 특수공작국 제3국장 에드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