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57화 (457/651)

제457화: 말이 안된다(1)

파멜라는 잠시 주저 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선 마당에 거짓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앞의 내용은 몰라요.”

“그렇다면 뒤의 내용은 맞다는 것입니까?”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인정하겠어요. 보좌관이 가져다준 백오분을 내 몸에 바르기도 하고 뿌렸죠. 난 그것밖에 하지 않았어요.”

파멜라는 어금니를 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파멜라의 옷차림이 바뀌었다.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출근하는 일이 잦았고 상의도 가슴골이 훤히 드러날 만큼 패인 것을 골라 입었다.

그런 복장에서 백오분의 향기는 맥크레인의 이성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맥크레인은 단 둘뿐인 사무실에서 파멜라를 끌어안고 가슴을 만지고 입을 맞추는 추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거기까지는 어려웠다.

그건 애초 계획에 들어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군!”

오민철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성에 관대하면서도 정치인의 성추문 만큼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미국이다.

특히 정치인의 성추문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지시한 인물이 누구요? 그렇다고 대통령이 직접 나섰을 리는 없을테고.”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페레즈가 입을 열었다.

“그는 전화로 지시를 내렸소.”

“그게 말이 된다고 얘기하는 거요? 그런 엄청난 사건을 모의하면서 상대 얼굴도 모르고 진행한다는 것이?”

오민철이 몽둥이를 거머쥐었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소. 정치를 하려면 큰 작전일수록 얼굴 맞대서 좋을 것 없죠. 대신 그와 통화한 내용이 녹음되어 있소. 그로부터 송금 받았던 통장 내역을 보여줄 수도 있소.”

오민철이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진짜 같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페레즈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한참 동안 뭔가를 찾았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사람 목소리요?”

오민철의 말에 페레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페레즈.”

“누구십니까?”

“일단 내 얘기를 들어요.”

두 사람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페레즈는 주로 듣고 말은 상대가 했는데 권총수의 이마가 찡그려진다.

음성 변조 마이크를 이용한 통화였다.

모두 세 번에 걸친 통화가 있었는데, 페레즈 모든 녹음 내용을 들려주었다.

“여기까지가 그와 나눈 통화 내용의 전부요.”

페레즈는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는데 권총수를 바라보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 내 진실성을 모두 보였으니 그만 보내달라는 시선이다.

권총수는 깊은 시선으로 페레즈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가 그 옆에 주저앉았다.

권총수가 곁에 앉자 페레즈는 무서운 듯 몸을 떨었다.

“난 컬럼비아대학을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페레즈 당신과 많은 차이가 있죠. 그러나 딱 한 가지는 우리 둘 모두 비슷하거나 어쩌면 내가 앞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냐는 듯 페레즈가 돌아보았다.

“내가 당신이라면 맥크레인 의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분노는 하겠지만 그를 죽인다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았을 겁니다.”

“사...사실이오.”

페레즈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나긴 했으나 매장시킬 마음까지는 없었다는 걸 수긍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맥크레인 의원을 주저앉힐 엄청난 공작을 꾸미자는 계획을 제의 받았어요. 맥크레인은 차차기 주자로 나설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어차피 차기는 현 대통령인 그린우드가 연임에 도전할 테니까 말입니다. 만약 맥크레인이 차차기에 나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페레즈의 안색이 굳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서부터 8년 동안 당한 것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겠죠?”

“그럴테죠.”

“나 같아도 가만있지 않죠. 자 이쯤 되면 상대의 제의는 단순히 성추행 사건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완전히 맥크레인 의원을 워싱턴 정가에서 쫓아 내버리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정치바닥에서 놀지 못하게 완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어요. 중요한 건 컬럼비아 대학까지 나온 영리한 페레즈씨가 그걸 모를 리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마 내가 페레즈씨 당신이라면 난 일요일 오후쯤 한가한 시간대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날 바보로 아는군요. 정체도 불확실한 사람과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진행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소통과 신뢰 없이는 어렵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죠.”

툭!

페레즈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표정이 변한다거나 눈이 흔들리는 그런 신체 변화는 없었지만 핸드폰을 떨어뜨림으로서 권총수의 얘기가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었다.

오민철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왔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번에야 말로 죽여버리겠다는 듯 표정도 험상궂다.

페레즈는 얼어붙은 듯 멍한 표정을 했다.

모든걸 포기한 사람의 얼굴이다.

그는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오랜만에 한국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루이빌시에 딱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미국식 스테이크 전문점이고 다른 한 곳은 비빔밥 집이다.

비빔밥 집은 손님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게 그것 아니냐는 것이 현지인들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섞일 텐데 뭘 복잡하게 비벼 먹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비벼서 먹는 맛은 너무 달랐다.

음식은 꼭 배만 부르라고 먹는 것이 아니다.

식도락이라는 말이 있고 미식가라고도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빔밥에 대한 소문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식재료의 조화도 아름답지만 특히 맛이 아름답다고 하며, 한순간 루이빌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지역에 일본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이 더욱 좋아한다고 했다.

끄억!

비빔밥 한 그릇을 먹고 난 오민철이 트림을 했다.

매우 흡족한 얼굴이다.

권총수 또한 만족스런 얼굴로 수저를 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가게 오른쪽으로 공용주차장이 있다.

두 사람이 가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요금을 지불하고 나오는 차들과 차단봉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만들어 놓은 오른쪽 좁은 인도를 따라 걸어갔다.

멀리 포드 익스플로러가 보이자 권총수는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불빛이 깜빡이며 문이 열린다.

헌데 차에 올라타려던 권총수가 멈칫했다.

‘형’

조수석 문 쪽으로 걸어가는 오민철의 귀에 갑작스런 전음이 들린다.

‘뭔가 잊어버린 것처럼 하고 다시 돌아가. 식당으로’

권총수가 어떤 위험을 감지했음이 분명했다.

스윽!

오민철은 주머니를 뒤졌는데 핸드폰을 놓고 온 사람의 동작이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다시 오던 길을 걸어갔다.

‘네 명이야. 우리차 측면으로 맞은편 검정색 랜드로버’

권총수의 전음에 오민철의 고개가 돌아가려고 하자 재빨리 막는다.

‘보지마, 지금 우리 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어’

오민철은 고개를 숙인 채 부지런히 걸었다.

‘형은 열심히 핸드폰 찾으러 가는 척만 해야 돼’

곧 오민철의 모습이 사라졌다.

권총수는 운전석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의자 밑에 있는 권총을 꺼냈다.

랜드로버는 검정색 선팅을 하여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권총수는 앞에 두 명 뒷좌석에 두 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덜컥!

콘솔박스에 길이 15센티 정도 되는 콘크리트 못들이 보인다.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암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도시에서는 나뭇조각, 잎사귀 하나는 물론 돌멩이까지도 귀하다.

강호 무사에게는 그런 것 모든 것이 무기인데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암기로 사용할 만한 물건이 없는 것이다.

팟!

갑자기 권총수 모습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느새 차를 돌아 랜드로버를 향해 날아가며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슈슈슉!

예상치 못한 기습인데다 썬팅을 한 차 내부를 들여다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사격은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슈슈슉!

사람은 네 명이다.

그러나 쏟아 부은 총알은 여덟 발이었다.

권총수는 정확한 사격이었다는 걸 자신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확인사살까지 한 것이다.

권총수는 천천히 차로 다가갔다.

앞뒤 유리는 모두 깨져 주저앉았다.

척!

차 안에 네 명의 사내가 모두 엎어져 있었다.

손에는 에르스탈로 불리는 SCAR-L을 쥐고 있었다.

미군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벨기에를 원산지로 둔 돌격소총이다.

권총수는 사내들을 일일이 확인했는데 한 사내가 숨을 쉰다.

권총수는 사내들의 복장을 살폈다.

행색은 민간인들이다.

권총수는 사내들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오민철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오민철이 투덜거렸다.

“형 이것 전부 담아!”

오민철은 권총수가 건네준 죽은 사내들의 소지품을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담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살아 숨 쉬는 사내의 얼굴을 좌우로 돌려 살폈다.

사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타타탁!

권총수는 혈도 몇 곳을 눌러 사내의 출혈을 멈추게 한 다음 포드 익스플로러에 실었다.

부르릉!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 사라졌다.

보고를 받은 마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애초 계산은 이게 아니다.

그냥 직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직진이란 클레어 양을 데려간 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권총수는 꾸준하고 집요하며 완숙한 능력을 보이며 적을 추적해 갔고 거의 중심부에 이르고 있었다.

문제는 추적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권총수에게 이쪽의 비열한 흠결이 노출된 것이다.

그건 막아야 할 일이다.

제3자인 권총수가 이 중요한 사건의 내용을 알게 놔둬서는 안 된다.

물론 사건 추적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이니 철저히 지켜주겠지만 인간의 입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경험이었다.

피아(彼我) 두 곳에서만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상대의 공작, 또는 거짓말로 몰아세우기가 좋은데 제3자가 알아 버리면 곤란해진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젯밤 권총수에 대한 명령이 내려졌다.

‘제거’

나머지 맥크레인 문제는 당사자(대통령)가 직접 해결하겠다고 했다.

지이잉!

핸드폰이 요동한다.

문자 한 통이 왔고 재빨리 오픈했다.

‘실패’

단 두 글자다.

대외협력실장 마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FBI와 CIA가 적극적으로 개입 못했던 건 맥크레인 및 대통령 그린우드를 추종하는 조직내 간부들의 무자비한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3자를 투입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내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버린 것이다.

딸칵!

마운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

창문을 열어 놓을 생각도 못한 채 거칠게 담배를 피웠다.

저벅저벅!

실내를 서성거리는 마운트 얼굴이 무척 무겁다.

‘이제 남은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렇게 십 여분 흘렀을 때 갑자기 마운트의 눈이 커졌다.

‘있다’

마운트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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