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4화: 적진 깊숙이(3)
완전 얼어붙은 얼굴이다.
“사람 안 죽여 보셨죠?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식으로 발악하는지 아십니까? 칼이 목을 파고들 때 피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모르시죠?”
부르르르!
조나선이 온몸을 떨었다.
소름끼치는 말이다.
홱!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오른손에서 은빛 광채가 반짝 거렸다.
무엇인데 이 어두운 밤에 저렇게 빛을 뿜을까 하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사내를 보며 소스라쳤다.
그건 칼이었다.
“여깄어!”
오민철은 권총수에게 미리 준비한 회칼을 넘겨주고 사라졌다.
쫘아아!
조나선의 눈이 커졌다.
가로수 잎사귀를 칼로 긁자 정확히 반으로 잘라졌다.
어떤 받침이나 지지하는 힘도 없이 허공에 너풀거리는 잎사귀가 칼에 잘린다.
도대체 얼마만큼 칼이 예리하면 저런 현상을 보일 수 있는 걸까.
“하나있는 따님이 줄리어드 음대를 다니더군요. 아내는 유치원 교사이시고.”
조나선은 비틀거렸다.
아랫도리에 힘이 빠지면서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것이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는 건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신데?”
“닉의 친구라고 했잖습니까? 난 당신의 진솔한 대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음!”
조나선은 한숨인 듯 신음인 듯 작은 소리를 냈다.
길게 심호흡을 했다.
가로수에 기대어 바라보는 권총수의 눈이 맑았다.
이런 사람이 무섭다.
화도 자주 내는 사람은 별 볼일 없다.
좀체 내지 않다가 화를 내는 사람이야 말로 진짜 무섭다.
권총수는 후자다.
집에 도착했다.
사방은 깊은 어둠에 휩싸였고 골목에는 가로등 말고는 인적하나 없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절반쯤 담배를 피웠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오민철이 소주 한 병과 잔을 들고 나타났다.
딱!
마개를 따더니 권총수 앞에 놓은 잔에 술을 채웠다.
며칠 전 한국 마트에 들려 사다 놓은 소주였다.
쭉!
권총수가 단숨에 비우자 오민철은 내려놓은 빈 잔을 다시 채운다.
“일이 커지는데?”
오민철이 권총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권총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한 얼굴이다.
그 날도 조나선은 퇴근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점 최고의 VIP이자 트랜튼 시를 장악한 시장 카펠로였다.
“시간 있소?”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 할 상대이다.
미국 부호 순위 88번째인 부동산 재벌이다.
뭔가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긴장했던 것과 달리 의외의 주문이 들어왔다.
‘피혁 가공업체 알테오젠을 아시오?’
조나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트렌튼에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즐비하다.
그중 화학, 피혁, 자동차 공업이 성행하는데 시 일 년 GDP의 70퍼센트가 여기서 나온다.
워낙 많은 기업들과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기억이 날 텐데 전혀 떠오른 것이 없다.
“사장이 닉이란 친구일 것이오.”
조나선은 재빨리 기업 대출담당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피혁공장 알테오젠과 닉이라는 사람의 신상에 대한 질문을 했다.
답장은 20여분 지나 도착했다.
‘여우 모피만을 전문적으로 생산 제조하는 공장으로 설립한 지 10여 년’
문자로 보내진 내용을 보고 나서도 그다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건 알테오젠이란 업체의 기억이 강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은 현 시장이자 엄청난 재력가인 카펠로이다.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다.
“조나선씨!”
“예, 시장님!”
“요즘 같은 불경기에 웰스파고은행의 적극적인 대출정책이 우리 트랜튼시에 있는 중소기업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조나선은 긴장했다.
상대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멀리 동양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다’ 들어 보았소?”
조나선은 뜻을 몰라 눈만 깜빡 거렸다
“생각해보시오. 밑이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 어찌 되겠소?”
“물이 차지 않죠.”
“그렇죠. 절대 물이 차지 않습니다. 아까운 물만 버리죠.”
팟!
갑자기 조나선의 눈이 빛난다.
뭔가 알 것 같다.
“저희들이 냉정한 심사를 하고 현장 답사까지 하지만 그런다고 완벽할 수는 없겠죠. 혹시 부실기업이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대출 문제라고 판단했다.
“혹시 서두에 말씀하신 알테오젠에 어떤?”
“내가 뭘 알겠소. 판단은 조나선씨의 손에 있는데.”
알테오젠 회사와 시장 카펠로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나선씨만 믿소.”
카펠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뱉은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건 알테오젠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라는 뜻이었다.
거래 은행에서 막힌 대출을 타 은행에서 뚫기란 어렵다.
결국 닉이 선택한 건 사채뿐이었다.
권총수의 핸드폰이 떨렸다.
메일 한 통이 왔다는 문자가 떠올랐는데 보낸 이는 맥보란이었다.
권총수는 메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는데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궁금하다는 듯 기웃거리는 오민철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오민철 역시도 내용을 읽고 나더니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메일 내용은 덤프트럭으로 길을 막고 자신들 차량을 노리고 있던 MS-13에 대한 것이었다.
권총수는 사건이 있고 바로 그 날 맥보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봐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지금 온 답장은 너무 간단했다.
MS-13은 미국을 포함한 중남미 전역에 퍼져있다.
조직이 광범위 하다보니 가끔은 상부에 보고되지 않는 사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MS-13을 흉내내는 뜨네기들도 많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정확한 경위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다.
한편 그 시간 20여 명의 사내들이 숲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M4가 들려 있었는데 얼굴에 양안식 야간투시경을 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군인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복장도 각기 달랐고 두발 상태도 제멋대로였다.
사내들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여 미터 떨어진 불 꺼진 산속 저편에 이층으로 된 통나무집 한 채가 있었다.
“알파팀 오른쪽에서 들어간다.”
무전기 소리가 들리고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별장 오른쪽으로 빠져 나갔다.
사사삭!
알파팀 10여 명이 완전히 사라지고 또 한번 무전이 울렸다.
“알파 팀 도착 완료.”
우두머리 사내는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야시경을 끼고 한참 전방을 살피더니 헤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30초 후에 들어간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손목시계를 눌렀다.
초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은폐 엄폐하고 있는 사내들 시선이 일제히 통나무집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무전기가 울렸다.
“공격!”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알파 부라보 일제히 공격.”
사사삭!
사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다.
그리고 은밀했다.
정면과 측면에서 스무 명의 사내들이 움직이는데 소리가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침투 및 습격의 최고 덕목인 소음을 완벽히 차단한 약진은 숱한 훈련으로만 얻어진다.
야시경속의 통나무 숲은 정적에 묻혀 있다.
모두들 잠들어 있을 것이다.
작전을 성공하면 보너스로 일인 당 십만 달러씩 더 지급된다.
콰앙!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건 시작이었다.
쾨콰쾅!
굉음과 비명이 어둠을 산산이 찢어 갈기고 있었다.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누군가의 입에서 절망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른바 ‘급조폭발물’이라고 부른다.
급조폭발물이라고 하면 개인이 직접 제작한 폭탄이나 폭발물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흔히 사제폭발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는 않다.
물론 사제폭발물로 설치할 수도 있지만 거의 대개 기존 폭탄에 기폭장치를 추가하여 원격으로 폭파시킬 수 있도록 장치한다.
적의 주요 이동로에 매설하였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폭발물을 터뜨려 공격하는 방식으로 걸려들면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아군으로서는 놀라운 효과를 얻는다.
급조폭발물의 특징은, 분명한 타겟을 갖고 설치된다는 것이다.
폭발 소리가 다르다.
그건 여러 가지 폭발물이 섞여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크레모아 소리도 있고 발목지뢰가 터지는 소리도 있다.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폭발했는데 우두머리 사내는 폭풍에 휘말려 20여 미터를 날아가 떨어졌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다.
얼굴은 크레모아 내용물인 쇠구슬에 찍혀 피가 범벅이었고 수류탄 파편인 듯 오른쪽 허벅지 쪽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온다.
우두머리는 힘겹게 헤드셋을 당겨 말했다.
“응답하라. 생존자 있나?”
그러자 잠시 후 더듬거리는 반응이 있었다.
“부라보 팀 스톤스.”
“아...알파팀 워커!”
그리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 없나? 알파 부라보 대답하라.”
스윽!
그때 사내의 오른쪽 뺨이 차갑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던 우두머리 사내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의 뺨에 붙어있는 건 쇠로된 총구였다.
사내는 총구를 따라 시선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한 사내가 AK를 들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탕!
타탕!
그때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총성은 필시 생존자 둘을 죽이는 소리일 것이다.
몰살(沒殺).
11년의 현역생활중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는 일이다.
수많은 작전에 투입되었고 언젠가는 소대 정찰을 나갔다가 IS 일개 중대병력에 포위가 된 적이 있었다.
비록 열여섯 명의 소대원중 다섯 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중대병력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 나왔다는 것에 훈장까지 받았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꿈에서 조차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전멸이다.
비록 제대를 하고 용병이라는 민간 군인으로 살아가지만 오늘날 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상황에 우두머리 타이론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닫히지 않는 귀로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신 열아홉 구입니다.”
사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야시경이 날아 가버려 정확한 인원을 셀 수가 없었지만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였고 하나같이 AK를 들고 있었다.
딸칵!
뺨에 대어진 총구를 거두고 사내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내는 불이 붙여진 담배를 타이론의 입에 넣어주었다.
타이론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적이 담배를 권하는 건 마지막으로 베푸는 삶의 향연이다.
교수대 의자에 앉은 사형수에게 교도관이 묻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
이때 의자에 앉은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한다.
교도관은 물론이고 사형집행을 지켜보기 위해 파견 나온 법무무 직원 및 종교단체 관계자들중 누구도 가로막지 않는다.
사형수는 가급적 담배를 느리게 피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담배를 늦게 피울수록 자신의 죽음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형수는 한 모금만 빨고 나머지는 그대로 놓고 기다린다.
그래봤자 1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담배가 저절로 타들어가 필터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길어야 십 분이다.
그렇다고 누가 빨리 피우라고 독촉하지도 않는다.
십 분.
사형수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기에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후우!
결국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