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화: 적진 깊숙이(2)
웰스 파고 은행 트렌튼 지점의 창문으로 늦은 오후 햇살이 파고들고 있었다.
은행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퇴근한 것은 아니다.
고객들의 이용만 끝났을 뿐 안에서는 오늘 하루의 입출금에 대한 장부 정리가 한창이다.
조금씩 해가 떨어지면서 시내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은행 후문을 향해 하나둘 직원들이 퇴근하기 시작했는데 주차장은 건물 뒤 평지에 있었다.
퇴근하는 직원들 차량 속에 검정색 크라이슬러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크라이슬러는 주차장을 나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퇴근시간인지 골목길이 막힌다.
조금씩 차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크라이슬러 뒤로 그때까지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포드 익스플로러가 끼어들었다.
크라이슬러는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에 들어섰다.
포드 익스플로러 역시 자연스럽게 뒤를 따른다.
크라이슬러는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며 포드 익스플로러도 멀찍이 떨어져 간다.
크라이슬러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 앞이었다.
그그긍!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면서 차가 안으로 사라졌고 시커먼 철 대문은 다시 닫혔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저택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누구 집이지?”
오민철이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권총수 또한 인상을 쓰며 저택을 한참 바라보더니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닉이오.”
“여기가 37번가 북쪽입니다. 포플러 나무가 우거졌고 붉은 기와로 지붕이 덮였는데 도로에서 한참 들어가는군요.”
권총수는 저택 주위 풍경을 설명하며 트렌튼지역의 지리에 해박한 닉에게 묻는 것이었다.
“카펠로 시장의 관사요. 트렌튼 시장.”
권총수는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핸드폰을 내렸다.
“시장 관사라고?”
오민철이 통화를 들은 듯 묻는다.
권총수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스르르!
유리를 내렸다.
애런과 닉 모두를 만났다.
그리고 권총수는 한 가지 가정을 산출해 내었는데 그건 닉의 사업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클레어양을 납치해간 집단으로 추측되는 인물들 접근의 시작은, 애런이 아니라 닉이었다는 것이 권총수의 판단이었다.
한마디로 범인은 닉을 건드려 애런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닉의 회사를 자금 압박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애런의 입장에서는 전 재산을 투자한 닉의 회사가 망한다면 엄청난 타격이며 충격이다.
그런 애런에게 누군가 접근하여 돌파구를 제시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목숨을 걸고 중동의 전쟁터를 누비며 벌어온 돈이 한 방에 날아가게 생긴 애런의 입장에서 선택은 뻔했다.
권총수는 닉의 몰락의 시작은 주거래 은행인 웰스파고 은행 트렌튼 지점으로 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어.”
“들어가려고?”
“궁금하잖아.”
차문을 열고 내린 권총수는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부우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20여 미터 높이에서 수평으로 날아갔다.
파아아!
유리를 내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뺀 채 바라보던 오민철이 놀랐다.
“완전 미사일이군.”
20미터까지 올라간 건 CCTV를 피하기 위해서다.
시장이 거주하는 관사라면 CCTV가 분명 있을 것이다.
스윽!
관사 후원으로 내려선 권총수는 고개를 돌려 담장을 보았다.
역시나 CCTV가 보인다.
정원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단풍나무, 여름에 하얀 꽃을 피우는 노각나무가 서로 엉키듯 기대며 자라고 있고, 노란 금색을 쏟아내는 황금 측백나무와 담장 쪽으로는 의도적으로 외부와 경계를 짓기 위해서인 듯 키가 큰 세콰이어 나무가 병풍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집안은 시끄러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듯 했는데 뒤뜰을 나와 앞마당으로 나오던 권총수 눈이 커졌다.
10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여기까지 따라왔던 웰스파고은행 지점장 조너선의 차도 보였다.
대문 안쪽으로 있는 경비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아 근무자가 있는 것 같았다.
건물 현관 쪽으로 걸어가려던 권총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경비실로 방향을 틀었다.
쉰 가량의 백인 남자가 회색 점퍼를 걸치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권총수는 경비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비는 NBA 농구를 보고 있었는데 권총수가 들어서자 워낙 급작스런 일이어서인지 놀라지도 않았다.
너무 태연하게 들어온 관계로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권총수는 경비 옆에 나란히 앉았다.
워싱턴 위저즈와 올랜도 매직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4쿼터 5분여를 남기고 양팀은 94대94 동점이었다.
“누구?”
곁눈질로 권총수의 복장을 살피던 경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참석하는 사람들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모두가 정장이었다.
그런데 권총수는 청바지에 점퍼차림이다.
“미스터?”
“밴!”
“밴 반가워요.”
권총수가 손을 내밀었다.
경비는 얼떨결에 손을 잡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지금 뭐하는 것입니까? 제법 많이 모인 것 같던데?”
“트랜튼시에 재정적 후원을 해주는 분들을 모시고 간단한 티 타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두 달에 한 번 정도, 대부분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시장님 일정이 너무 빠듯해 관사에서 차로 대신한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누굽니까?”
“여러분이죠. 지역 경찰서장님, 시민단체 대표, 시의회 의장.”
열심히 얘기하던 경비가 말을 끊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여기 참석하시는 분 아닙니까?”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시장의 관사를 관리하는 경비 업무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수고해요!”
타탁!
권총수는 경비의 어깨를 토닥이며 경비실을 나갔다.
경비는 재빨리 따라 나왔다.
“어디 가는 거요?”
“들어가야죠.”
그러면서 현관을 향해 걸어간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경비는 뭔가 찝찝한 표정을 했으나 농구중계가 중요한 듯 재빨리 들어갔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
비겟살이 덜렁거리는 뚱뚱한 백인이 뉴저지주 주도인 이곳 트랜튼시를 이끌어가는 시장 카펠로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는 얼굴이 없고 마지막 한 사내에게 멈췄다.
웰스파고 은행 트렌튼 지점장 조너선이었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탁자를 놓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는데 내용 또한 평범했다.
즉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시발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열어 몇 마디씩 꺼냈지만 지점장 조너선은 말이 없었다.
잠영술로 침입한 권총수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의심스럽거나 긴장할 만한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에 이마를 찡그렸다.
대개의 경우 이런 모임에서는 음험하고 비도덕적인 얘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건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얘기만 뱉고 있었다.
잘못 짚었나 싶어 그냥 나갈까 했지만 이왕 들어왔으니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던 사건에 관계된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권총수는 다소 허탈한 마음으로 역시 실내를 빠져나가려는데 갑자기 카펠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너선 지점장님 잠깐만 계시죠.”
나가려던 조너선이 걸음을 멈췄다.
카펠로는 부동산 재벌이다.
이곳 트랜튼 시는 물론이고 뉴욕과 시카고 플로리다에 특급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달리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고 자수성가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공화당 시장이지만 진보적인 여러 정책도 같이 내놔 연임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공장을 매물로 내놨다고 들었소?”
“이미 임자가 나타나 넘어갔습니다.”
“종업원들 밀린 월급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카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 가는 건 그 얘기가 전부였다.
승용차가 멈췄다.
가로수가 있는 골목이었는데 문이 열리고 조너선이 내렸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던 조너선이 깜짝 놀란다.
차를 세울 때만 해도 없었는데 한 사내가 가로수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런데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조너선은 슬쩍 사내의 손을 살폈는데 권총 같은 위험한 물건은 갖고 있지 않다.
총기소지허가증이 있지만 차에 총을 넣고 다니지는 않기에 상대의 손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무슨 일이오? 날 기다린 거요?”
스윽!
사내가 담배를 내밀었다.
말보로 레드를 갑 째 내밀었는데 생각 있으면 한 개비 피우라는 뜻이었다.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건 아니다.
한 갑이면 일주일 정도 가는데 갑자기 말보로 레드를 한 개비 피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이 빼져 나와 있는 담배를 뽑았다.
딸칵!
사내는 라이터 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
잠시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특히 조너선은 쉴 사이 없이 사내를 살피며 무슨 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지점장님!”
조너선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왔다면 은행 문제, 즉 대출과 관계된 용무가 뻔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닉이란 사람 아시죠?”
조나선은 흠칫했다.
금융계에 오랫동안 몸 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재벌이라든가 아니면 자신들과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를 몰락 시켰다.
“압니다.”
권총수는 웃음을 지었다.
“혹시 모른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감사합니다. 지점장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부탁할 건 제 질문에 사심없이 대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지점장님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하지 않는다거나 거짓말로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 흐름이 깨질 것입니다.”
협박이다.
묻는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조나선은 다시 한 번 권총수를 살폈다.
어느 부분에서도 갱 같은 분위기는 없다.
목소리도 차분하고 행동이 지저분하지 않다.
갱들은 목에 금으로 된 유치 찬란한 목걸이를 걸고 팔뚝이고 어디고 새카맣게 문신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열손가락에 해골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기도 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껌을 질겅질겅 씹거나 보란 듯 눈앞에서 권총을 들었다 놨다 하며 겁을 준다.
물론 마피아일수도 있다.
마피아와 갱은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
마피아는 죽이는 그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상대의 인격이나 인품을 모독하지 않는다.
“닉과는 어떤?”
“친구입니다.”
“유감입니다. 정말 안 됐습니다. 전도 양양한 젊은 사업가였는데.”
“지점장님!”
지금부터 질문에 들어가겠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웰스파고은행 트랜튼 지점에서 가장 큰 고객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지점 거래 고객 중 말입니다.”
예상 못한 질문이라는 듯 조나선은 담배를 빨아들이다 말고 멈췄다.
“당연히 재력가들이겠죠?”
“그렇지요.”
“제가 알기에 이 지역 시장님으로 있는 카펠로씨 같은 경우는 미국부호 순위 88위에 올라있더군요. 그분도 웰스 파고 이곳 지점과 거래를 하죠?”
“고객에 대한 정보는 함부로...”
“좋은 말씀입니다. 고객의 정보가 함부로 외부로 유출되거나 누설해서는 안 되죠. 하지만 지점장님 목이 오늘 밤 떨어질 수 있다면 그래도 비밀을 고집하겠습니까?”
툭!
목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입에 물린 담배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