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검은 향기(3)
적은 온다.
전상미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채 이십 분이 되지 않아 산정이 시끄럽다.
탈레반들이 나타난 것이다.
***
여섯 명의 사내들이 직사각형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닫힌 문을 바라보았고 일부는 마른침을 자주 삼킨다.
어젯밤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직속상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클레어의 바하마 경호 때 입고 있던 양복과 넥타이 구두를 그대로 갖추고 이곳 사무실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침 9시까지 오면 된다는 말만 하고 끊어 버렸다.
물론 짐작이 전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보나마나 클레어 실종사건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이틀 걸러 한 번씩 불려가고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며 가족은 물론 친구들까지 빗자루로 쓸 듯 청소를 당했다.
친구와 주위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일부는 그만 둘 것을 고민 중에 있을 정도였다.
스륵!
문이 열리고 왼손에 서류 봉투를 든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런데 동양인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다인종 국가이기 때문에 동양인이라고 하여 CIA에 근무하지 말란 법은 없다.
단지 들어서는 사내의 기세가 범상치 않다.
체격은 동양인답게 크진 않았지만 걷는 걸음걸이나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리했다.
권총수는 나란히 앉은 여섯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권총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 역시 CIA요원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신분증을 보인다.
“불편하시고 불쾌하더라도 대통령 따님이 실종된 사건이라는 걸 생각하여 이해 바랍니다.”
권총수는 가져온 봉투에서 두툼한 서류를 꺼내 살피는 듯 하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섯 분께서 협조가 잘된다면 한 시간, 어쩌면 30분 안에도 끝날 수 있습니다.”
30분이라는 말에 사내들의 굳어진 얼굴이 조금 펴진다.
권총수는 서류에 적힌 이름과 사내들을 비교하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지극히 평범했다.
여섯 사람 모두 가족관계와 대학시절에 관한 것이었고 비밀경호국 특성상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아내와의 관계는 좋은지 등 지극히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여섯 사람 모두 그다지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는 것에 부담이 덜한 듯 대답을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업에 의한 어려움보다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면서 자제해 줄 것을 오히려 요청했다.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민철은 골목에 주차된 차량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으로 5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CIA에서 사용하는 안가였다.
스르르!
오민철은 유리를 반쯤 내리고 담배를 피운다.
슥!
핸드폰 시계를 보았는데 권총수가 들어간지 30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답답한 듯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던 오민철이 이마를 찡그렸다.
“박 지사장님?”
블랙잭 사우디 지사장 박호명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경험도 없고 언어 문제도 있고 하여 사우디 군 출신인 압둘가니를 앉혔지만 지금은 해병 수색대 출신 박호명이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랍어 전공자이고 군 제대 후 중동과 이스라엘, 그리고 로마까지 아우르는 성지순례전문 여행사를 운영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중동의 테러와 크고 작은 내부충돌로 여행금지가 풀리지 않으면서 성지순례객이 전면 올스톱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폐업을 하려는데 권총수를 만난 것이다.
“뭐요?”
오민철의 안색이 변했다.
“몇 명이라고? 두 명에 부상자가 셋.”
한참을 듣던 오민철이 말했다.
“사장님께 보고 올리지.”
핸드폰을 내린 오민철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막 사망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전달된 것이다.
전장에서 사람 죽는 건 당연하고 흔한 일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 아직까지 블랙잭에서는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 발생은 없었다.
이번에 죽은 두 명이 최초인 것이다.
오민철은 다시 한 번 건물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정확히 48분 만에 권총수가 나타났다.
오민철은 재빨리 사우디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용을 말했다.
권총수도 놀란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박 지사장님, 전상미 중사가 이끄는 흑표소대에서 발생했다고 했습니까?”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몇 가지 묻기도 하면서 통화를 이어갔다.
“일단 유족에게 알리고 항공사와 시신운구를 논의하세요.”
건물을 나올 때 까지만 해도 권총수의 표정은 좋았다.
그건 여섯 명의 조사에서 뭔가 실마리를 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언제 환했냐는 듯 안색이 굳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이럴 때 위로의 몫은 오민철의 것이다.
“그나마 함정에 걸렸는데도 두 명 밖에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누구보다도 전쟁에 해박하다.
전쟁용병회사를 차려 2년이 가까워 오도록 사망자 한 명 생기지 않았다는 건 기적이다.
민간기업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보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아카데미 같은 경우 사망자가 한 달에 대여섯 명씩 발생한다.
다인코프도 그렇고 메이저급 보안기업들 대부분이 평균 서너 명씩의 사망자는 생긴다.
그런 기업에 비하면 블랙잭의 첫 사망자 발생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오민철이 권총수 어깨를 토닥거렸다.
권총수는 혼자 차 안에 있었다.
장소는 워싱턴 호텔 맞은편 도로가였다.
일주일을 감시한 결과 마침내 오늘 특이한 행동 하나를 잡아냈다.
권총수가 면담하듯 조사했던 여섯 명중 애런이란 사내에게서 그 냄새가 났다.
맥(Mac)이란 화장품 회사에서 만들어 낸 여성용 스킨이었다.
가끔은 여성용 화장품이지만 부드럽고 향이 강하지 않아 남성들도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바로 애런이 맥에서 나온 스킨을 썼다.
호텔 방에서 검출된 또 하나의 화장품 향기와 일치한 것이다.
이후 권총수는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퇴근하면 항상 곧바로 집으로 향했고 사흘전 아내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쌍둥이 아들 둘을 데리고 외식을 했다.
그것 말고는 특이한 동향은 없었는데 오늘 퇴근을 하고 곧바로 이곳 15층 블루 마운틴 건물로 들어갔다.
권총수의 눈이 빛난다.
오민철이 일층을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곧장 차로 다가와 조수석에 올랐다.
“몇 층이야?”
“14층.”
조금 전 들어간 애런이 14층으로 갔다는 뜻이다.
“14층이면 블링크 차징이라는 가스회사 아냐?”
“가봤어?”
권총수는 미리 조사해온 입주회사 면면을 보고 말하는 것이었는데 오민철이 야릇하게 웃는다.
“왜 웃어? 말해봐?”
“맞춰봐?”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뜻밖의 소득이 있는 것 같았다.
“14층 15층 모두 도박장이야. 겉은 아까 말한 대로 블링크 차징이라는 가스회사로 등록되어 있고 간판도 걸렸지.”
“불법 도박장이라는 얘긴데 어떻게 들어 가봤어?”
“들어가진 못했지. 출입증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는 거야.”
오민철은 변장을 하고 애런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건장한 흑인 두 명이 가로막고 출입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오민철은 블링크 차징이라는 회사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했지만 출입증을 요구했다.
여기가 블링크 차징 사무실 아니냐고 묻자 맞다면서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겉으로 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사내가 정장의 떡대들에게 끌려나왔는데 피가 범벅이 되었다.
사내는 계단이 있는 곳으로 던지듯 팽개쳐졌고 얼마나 맞았는지 일어서지를 못했다.
오민철이 재빨리 다가가 부축해 내려오면서 그곳이 도박장이라는 걸 사내로부터 들은 것이다.
15층짜리 건물 두 개 층을 통째로 사용할 정도의 규모가 큰 도박장이라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다 불법도박장이면 반드시 조직적인 사업이다.
마피아나 아니면 갱단이 운영할 가능성이 높았다.
권총수의 눈은 더욱 좁혀졌다.
‘애런이 불법 도박장을 출입한다’
비밀경호국 규칙에 의하면 도박을 하지말라는 얘긴 없다.
하지만 불법적인 사행성 기관을 출입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조항은 있다.
즉 솔선수범하라는 뜻이다.
그 날은 그 선에서 물러났다.
어차피 쉽게 범인과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차분하고 치밀해야 한다.
대통령 딸이 실종된 엄청난 사건이다.
FBI와 CIA도 각자 실종사건을 추적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증거나 제보는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할 정도면 평범한 실종일 수는 없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이고 결행한 쪽도 어리숙한 아마추어들은 아니다.
그런 만큼 서둘러서 좋을 건 없다.
시끌벅적 요란하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벤츠 승용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마흔 초반 가량의 백인 사내가 내렸다.
흘긋!
차를 세운 오른쪽 건물을 바라보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멎는다.
‘massage parlor(안마시술소)’
뉴욕에는 많은 안마시술소가 있다.
태국, 베트남,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업소가 많지만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한국인 가게다.
돈을 잃어 흥분한 분노를 달래고 지친 영혼을 쓰다듬으며 내일은 반드시 따겠다는 의지를 다지기에는 안마시술소 만한 곳도 없다.
사내는 건물로 들어갔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안마시술소가 있는 8층으로 향했다.
두 명의 한국인 여자가 침대 위에 하늘을 보고 누운 사내를 주무르고 있었다.
사내는 완전한 알몸이었고 두 여자는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
여자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사내는 흥분이 되는 듯 신음을 흘렸고 손은 여자들의 몸을 더듬었다.
화악!
두 여자 중 키 큰 여자가 갑자기 놀랐다.
방안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악!”
이번에는 키가 조금 작은 여자가 사내를 발견하면서 그만 소릴 지르고 말았다.
“뭐야? 벌써 흥분이 되어서 그러나? 난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고, 좀 기다려.”
누운 사내는 여자가 좋아 그러는 줄 아는 듯 씨익 웃었다.
“누구시죠?”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사내가 감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뒤집었다.
“어어!”
입구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한 백인 사내는 인상을 썼다.
“당신 뭔데 내 방에 들어왔어. 꺼져.”
“두 분께서는 잠시 저기 의자에 앉아 있으시죠.”
사내는 두 여자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여자들은 재빨리 벽에 걸어 놓은 흰색 가운으로 몸을 가리더니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핸드폰도 없고 이곳 상황을 사장에게 연락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
직접 문을 열고 나가 침입자가 있다고 해야 하는데 사내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도저히 항거할 자신감이나 용기가 꺾인다.
“통성명부터 합시다. 난 권총수라고 하는데?”
백인의 눈알이 사정없이 권총수의 위아래를 훑는다.
“이름이 뭐냐고 묻잖아요.”
“경찰을 부르겠어!”
쫘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권총수의 손바닥이 백인 사내의 뺨을 갈겼다.
백인 사내는 흥분했다.
“죽여 버린다!”
알몸으로 권총수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한 대 더 맞는다.
쫙!
꽈당!
이번에는 사내의 몸이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사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단순히 뺨만 맞은 것이 아니라 골이 덜렁거릴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첫 번째 것은 그냥 손찌검이고 이번에는 내가 중수법 형식으로 때린 것이다.
퍼억!
사내는 일어나려다 다시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