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검은 향기(2)
맥보란이 마중을 나왔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언제까지 비밀로 한다는 겁니까?”
권총수가 핸들을 잡고 있는 맥보란에게 물었는데 클레어의 실종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맥보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졌다.
“글쎄, 위에서는 아직 조용합니다.”
“차라리 공개로 방향을 트는 것이 어떨까요?”
“공개수사를 하자는 것입니까?”
룸미러 속의 맥보란의 눈이 커졌다.
납치사건의 경우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비공개 수사가 원칙이다.
공개가 될 경우 대중의 시선을 우려한 범인이 피랍자를 해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꼭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죠. 의외의 소득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사람들 눈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클레어의 얼굴이 화면에 노출되면서 납치 소식이 전해지면 범인은 움직임이 더욱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공개 수사가 오히려 범인을 돕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통령 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인이 차량에 태우고 다니거나 아니면 나란히 길을 걸어가도 모를 수도 있다.
범인의 활동성을 더 보장해주는 꼴이다.
하지만 공개가 되면 운신의 폭을 제약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긴장한 범인으로 하여금 실수를 유도할 수도 있다.
“50일 가까이 지나고 있습니다. 최악의 사태가 생기지 않았다는 보장도 할 수 없죠.”
최악의 사태란 클레어가 살해되었을 경우다.
맥보란은 어금니를 물었다.
뉴스였다.
차라리 그건 태풍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건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이 50일이 가까이 지났다는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것이 공개되면서 FBI는 범인을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미화 천만 달러를 제공한다고 했다.
FBI는 물 위에서, CIA에서는 물밑에서 수사를 이어갔다.
* * *
초저녁부터 쫓고 쫓기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상대는 탈레반의 거물 중 한 명인 하칸의 친위대 ‘사디크(친구)’였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CIA에서 제공한 정보는 50여명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교전상황을 보면 CIA정보가 크게 틀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밀려오는 적의 공격을 보면 병력의 숫자를 대충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격중지!”
무전기를 통해 전상미의 음성이 들려온다.
전상미 옆에 있던 통신병 김우석이 고개를 돌렸다.
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냐는 질문이었다.
탕!
타탕!
멀리서 들리는 총성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전상미는 야시경을 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첩첩이 고봉들이다.
“정확한 현재 위치가 어디죠?”
김우석은 품에서 작전지도를 꺼냈다.
CIA에서 제작한 작전지도이기 때문에 선이나 글씨가 굵어 야시경 낀 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많이 들어왔는데요. 우리가 M지점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현재는 여기쯤입니다.”
K라는 글씨가 보인다.
“거리로는 10킬로 정도 들어온 듯 합니다.”
전상미의 눈이 빛난다.
적을 쫓아 온 것이지만 산길 10킬로는 너무 먼 거리며 더욱이 야간이다.
“각 분대 퇴각한다.”
“알았다 이상!”
“알았다 이상!”
각 분대별로 지시를 잘 받았다는 사인이 들어오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산비탈을 내려갔다.
가끔 발길에 채여 굴러가는 돌멩이 소리 말고는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평지에 도착했는데 좌우로 가파른 산을 거느린 계곡이다.
“속보!”
다시 한 번 전상미의 목소리가 무전기에 울려 퍼진다.
일행은 계곡을 떠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전상미는 본능적으로 엎드렸는데 오른쪽 계곡에서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PKM.”
전상미는 숨을 삼켰다.
러시아 기관총이다.
정확성보다는 고장이 없는 관계로 다량사격을 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탈레반이나 테러단체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야간 조준경을 부착하면 어두운 밤에도 충분한 사격이 가능하다.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난다.”
전상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적의 유인전술에 걸려든 것이었다.
매복을 하고 있는 적에게 응사는 더 많은 피해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지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럴 때는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것 말고는 좋은 방법이란 없다.
“커억!”
전상미가 걸음을 세우고 돌아보았다.
무전병인 김우석이 나동그라졌는데 어둠속인데도 오른쪽 다리가 금세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피가 흐른다는 뜻이다.
“최병장님.”
전상미는 무전기로 의무병과를 갖고 있던 최덕종 병장을 호출했다.
“김병장이 다쳤어요. 빨리 좀 와주셔야겠어요.”
전상미는 등에 지고 있는 무전기부터 벗겼다.
김우석을 바위 뒤에 눕힌 다음 양손으로 장딴지를 눌렀다.
지혈을 하는 것인데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때 부스럭 소리가 들리며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허리 쪽으로 방독면처럼 구급상자를 차고 나타났다.
“총에 맞았어요.”
최덕종 병장이다.
블랙잭은 회사 내규로 군시절 계급을 성이나 이름 뒤에 붙이도록 정해 놓았다.
정식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는 무척 예민한 문제였다.
그중 호칭이 가장 문제였다.
정식 군대는 아니지만 전쟁기업이다.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는 필수다.
계급을 부를 때 서로가 긴장하고 자신들이 전쟁터에 있다는 걸 좀 더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다.
최덕종은 1공수 의무병 출신으로 얼마전 전상미 부대로 전입해 왔다.
의무 주특기나 통신 주특기를 갖고 전역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들이 군에서의 주특기를 숨긴다는 것이었다.
돈 벌기 위해 블랙잭에 입사했는데 2중으로 고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반 군대도 아닌 용병에서는 통신이고 의무병이고 모두 똑같이 전투에 참여하고 훈련한다.
그런 주특기로 어떤 메리트가 주어지지 않으니 손을 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용병생활을 해본 권총수는 의무병과 통신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보고 겪었다.
그래서 일당을 20퍼센트 상향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자 그제서야 여기저기 자신의 신상명세서에 군에서의 주특기를 기록했다.
쏴악!
가위로 바지를 잘라냈다.
“다행히 관통한 듯 보이는데요.”
박히면 수술로 뽑아내야 하는데 그건 전문가의 영역이다.
물론 빼내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최덕종의 의학지식으로는 관통한 면이 더 낫다.
지혈제를 뿌리고 재빨리 압박붕대를 감았다.
빠르다.
“1분대 사고, 전낙원 중사.”
죽었다는 무전이다.
“3분대 사고, 마철송 중사.”
전상미 부대는 모두 다섯 개 분대로 이뤄져 있다.
아직까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밤 무려 두 명이 전사한 것이다.
“시신 수습하지 말 것, 반복한다 시신 수습하지 말 것. 계속 퇴각하도록!”
시신 수습하려다 보면 지체되고 피해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적은 압도적인 화력과 우세한 지형을 이용해 미친 듯이 쏟아 붓고 있다.
“전중사!”
“소대장!”
김우석을 부축해 데리고 가려던 최덕종 병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전상미를 돌아보았다.
“먼저 가!”
김우석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전상미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내 걱정 말고.”
말이 끝나자마자 전상미는 갖고 있던 M4를 오른쪽 산 중턱에 대고 갈기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전상미의 의도는 자신이 적의 시선을 끌어 줄테니 그 사이에 빠져나가라는 뜻이었다.
최덕종은 김우석을 부축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전상미는 사격을 멈췄다.
M4를 대각선으로 매더니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이동하여 조금 전 자신이 사격을 했던 바위에서 30여미터 떨어진 움푹 패인 구덩이에 몸을 숨겼다.
PKM에는 야간 조준경이 설치되었을까.
아무런 야간장비 없이 짐작만으로 특정 지역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절대 없다.
문제는 야시경이냐 조준경이냐였다.
야시경을 끼고서도 원거리 사격이 가능하고 조준경을 이용한 사격도 가능하다.
후자다.
전상미는 지금처럼 많은 양의 총알을 쏟아 붓는다면 야간 조준경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무게를 실었다.
머리에 쓰고 작전을 벌이는 야시경 같은 경우 최대 이삼백 미터까지 가능하지만 반동이 있는 기관총을 쏘기에는 불편하다.
‘지금쯤!’
구덩이에 몸을 숨긴 전상미는 혼자 중얼 거렸다.
‘부지런히 표적들을 찾고 있겠지. 더 이상 사격이 없다는 건 조준경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일테고.’
주간 전투와 달리 야간전투는 확인사살이라는 것이 없다.
인질 구출이나 무언가 탈취를 목적으로 적의 심장부에 접근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확인사살이 필요하지만 야전에서는 불필요하다.
최소한 십분 정도는 조준경을 통해 살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살피지 않는다.
이쪽에서 우회하여 역습해올 수 있기 때문에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지는 않는다.
전상미는 이를 깨물었다.
자신의 실수다.
지나친 집중도 좋지만 지휘관은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권총수의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적이 도망친다고 무턱대고 쫓아가면 안 되는 걸 오늘 경험했다.
스으윽!
전상미는 조심스럽게 야시경을 쓰고 고개를 내밀었다.
보이지는 않는다.
총알이 날아왔을 만한 거리를 살폈지만 인적이 없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더욱 없다.
전상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소리에 집중했다.
들린다.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인데 계곡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계곡을 넘어가려는 듯 보였다.
전상미는 소리 없이 계곡 안쪽으로 달려갔다.
비록 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지만 과거의 흔적은 바닥에 모래와 자갈을 수북히 깔아 놓아 소음을 일으킨다.
최소한 발자국 소리를 줄인다.
부지런히 올라가던 전상미가 재빨리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움직인다.
쓰고 있는 야시경 거리에 네 명의 사내가 들어온 것이다.
거리는 일백여 미터가 조금 넘을 듯싶은데 전상미는 신속하게 다가갔다.
네 사내중 두 명은 어깨에 PKM을 멨고 두 명은 AK를 들고 있다.
AK를 든 사내가 총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이는 야간 조준경을 이용해 자꾸 돌아보며 살핀다.
혹시도 있을지 모를 추격자를 살피는 행동이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60미터쯤으로 좁혀 졌을 때 전상미는 권총을 넣고 M4를 꺼내 들었다.
이어 재빨리 바위에 숨어 무릎쏴 자세로 전환했다.
탁!
방아쇠를 당겼다.
탕!
PKM을 어깨에 멘 사내가 엎어졌고 순간 세 사내가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가파른 경사였고 근처에 바위 같은 엄폐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보였다.
타아앙!
또다시 총성이 울렸는데 이번에도 PKM다.
강한 화력부터 제압하는 것이 기습의 첫째 요소다.
두두두두!
AK를 든 두 사내가 무자비하게 총알을 쏟아내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전상미는 다시 자세를 맞추고 조준했고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아앙!
총성이 메아리치며 한참을 울린다.
그리고 네 번째 총성이 울렸다.
몸을 숨긴 채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전상미는 몸을 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번 구를 뻔 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계곡에 도착하자 더욱 속도를 높였다.
띄엄띄엄한 M4소리를 듣고 지원병력이 달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전상미는 M4로 조준사격을 했다.
쫓기던 적이 갑자기 단발, 조준사격을 한다는 건 누군가를 겨누었다는 걸 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