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화: 제3의 눈동자(2)
권총수는 몸을 돌렸다.
“손을 잡자?”
“나쁜 제안은 아닐 것입니다.”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이런 엄청난 제안을 즉석에서 대답할 수는 없고 생각 좀 해 보죠.”
“이 기회에 제대로 권씨 집안에 복수하는 것입니다. 권철태의 아내이자 권악수의 친모인 현미정이 어린 대표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결과 기다리죠. 원한다면 6대4도 받아 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남자는 통이 커야 하는 겁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철해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권총수는 대문 밖까지 따라나가 밤길 조심하라면서 사라지는 전철해를 바라보았다.
전철해는 다시 한 번 돌아서서 손을 들어 보이더니 자신의 차에 올랐다.
부우웅!
전철해의 차량이 골목을 떠나 사라졌다.
권총수는 한동안 서 있었다.
단순한 사람이다.
단순하기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는 부류다.
그들은 한 번 확신하면 절대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어떤 논리와 설명도 통하지 않는다.
전철해가 그렇다.
그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살려 놓으려면 완전히 살도록 해주던가 죽이려면 사정없이 쳐내야 한다.
일반적이 사람이라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신을 불쑥 찾아와 다짜고짜 그런 제의를 하지 않는다.
권악수의 실수다.
쳐내지 않고 변두리 제지회사 하나를 맡겼다는데 어차피 아내가 죽고 없으니 천왕그룹과는 별개의 사람이다.
자식이 있다고 해도 백화점의 지분은 자식의 것이지 전철해 것이 아니므로 옷을 벗겼어야 했다.
“재밌군!”
아무도 주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전철해가 일으킬 쿠데타는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 * *
사파이어빛 바다가 출렁거리는 고급 휴양지 바하마 낫소 린던 핀들링 국제공항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북중미에서는 가장 아름답다는 휴양지답게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리는 사람들 대다수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이다.
빨갛고 하얀 원색의 복장에 뜨거운 자외선을 막기 위한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사람들 속에 두 남자가 보인다.
즐겁게 웃고 떠들며 내리는 관광객들과 달리 두 사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선글라스를 끼어 표정은 알아볼 수 없지만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말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두 사내는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나오는 검정색 캐리어를 하나씩 찾아 들고 입국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국심사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왜 왔냐 무슨 용무냐는 질문은 없었고 대충 얼굴과 여권 사진이 맞다 싶으면 행복한 시간 보내라는 인사로 맞이한다.
입국장을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손에 들고 있는 여행사 피켓이 눈에 가장 많이 띄었다.
“마중 나오기로 한 것 아냐?”
오민철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약속했으니까 오겠지.”
권총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맞은편 창문아래에 있는 대리석 벤치에 앉았다.
오민철도 여기저기 살피듯 하더니 주저 앉는다.
“저기 좀 봐라. 죽인다.”
창 너머 도시를 가리켰는데 산이 하나도 없는 평지의 도시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거의 육지와 맞물린 푸른 바다가 이어졌다.
바다위에 집을 지어 놓은 듯 땅과 육지가 구별이 안될 만큼 해수면과 육지의 차이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파도가 치면 금방이라도 도시를 덮어 버릴 것 같았다.
“미스터 캡틴!”
두 명의 백인이 나타났다.
건장한 체격에 넥타이 없는 정장을 했는데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
권총수의 질문에 오른쪽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윌리엄은 이번 사건을 추격하고 있는 CIA 요원중 한 명이다.
윌리엄과 같이 동행한 사람은 역시 CIA요원 히버트라고 했다.
윌리엄을 따라 두 사람은 공항 청사를 나섰다.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만나자마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윌리엄은 바하마에 처음이냐고 물었다.
처음이라는 말에 바하마에 대한 얘길 하기 시작했다.
얘기의 대부분이 휴양지로서의 바하마였다.
미국의 백만장자중 이곳에 별장 하나 요트 한 척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또한 스쿠버다이빙 천국으로 전 세계에서 다이버들이 찾아오며 여러 개의 섬들로 이뤄져 있는데 섬들마다 비행기 활주로가 있다고 했다.
오민철이 놀란 표정을 하자 윌리엄은 웃었다.
모든 섬이 관광지이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호텔 리조트나 별장이 세워져 있다.
부유한 사람들을 불러 돈을 쓰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낫소 공항에서 내려 배를 타고 수많은 섬으로 일일이 들어가는 복잡한 절차는 불편할 일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바로 닿는 자가용 비행기의 착륙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하마는 비싼 물가 때문이라도 주머니가 가벼운 관광객은 들어 올 수가 없다.
식사 한 끼에 미화 백불이 기본이다.
윌리엄은 관광가이드나 된 듯 열심히 설명했다.
뉴욕이나 서울같은 고층 건물은 없었다.
그러나 화려함은 더했다.
관광수입이 GDP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나라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카지노 간판이 지천이다.
차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는 단층의 작은 건물로 들어섰다.
“미국 관세청.”
입구 기둥에 걸린 간판을 보며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플로리다와 직선으로 100킬로 밖에 떨어져 있지 않죠. 또한 일년 관광객의 70프로가 미국인입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인이 바하마를 여행하는데 특별한 제약이나 간섭은 없다.
단지 이곳이 조세 피난처로 많이 이용되다보니 대사관이나 영사관 업무를 관세청 파견사무실에서 같이 하는 것이다.
차에서 내린 윌리엄은 두 사람을 왼쪽 맨 끝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책상 배치와 벽에 붙은 달력과 관세업무와 관계된 서류들을 보면 처음부터 이곳이 CIA사무실이 아니라 이번 사건이 일어나면서 급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히버트가 묻는다.
“괜찮아요. 곧바로 상황 설명부터 들어가죠.”
권총수의 말에 윌리엄이 안쪽 벽을 향해 리모컨을 눌렀고 스크린 하나가 내려왔다.
그 사이 히버트는 노트북을 켜 화면을 조정했다.
탁!
노트북 치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을 울리며 스크린에 금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말하지 않아도 스크린 속의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의 딸 클레어다.
이미 맥보란이 가져다준 사진을 통해 미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큰 화면으로 보는 클레어는 이목구비가 한결 뚜렷했다.
“클레어 양입니다.”
간단한 성장과정과 함께 윌리엄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클레어는 CNN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바다를 찍기 위해 왔다고 했다.
미국과 바하마는 물론 북중미 일부 국가들은 매년마다 허리케인으로 입은 피해가 엄청나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이 생기면서부터 허리케인의 강도는 더욱 세지고 있으며 작년에는 시속 298킬로 미터(초속 약 86미터)의 허리케인이 밀고 들어와 초토화를 시켜 버렸다.
그런 북중미 바다와 허리케인의 역학관계를 조사하고 추적 촬영 중에 실종됐다고 했다.
1시간여에 걸친 브리핑이 끝났다.
어두운 사무실에 다시 불이 켜졌다.
브리핑을 듣고 난 권총수의 표정이 무겁다.
윌리엄과 히버트는 그런 권총수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해댄다.
브리핑라고 했지만 권총수가 사건 해결을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입니까?”
오민철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윌리엄은 고개를 숙였다.
더 설명해 주고 싶어도 우리가 가진 정보가 여기가 끝이라는 미안함이다.
그때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간 히버트가 두꺼운 상자 한 개를 들고 나왔다.
탁!
권총수 앞에 놓고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권총 두 자루가 들어 있는데 권총수가 즐겨 사용하는 글록19였다.
오민철이 먼저 한 자루를 들더니 이리저리 살핀다.
슬라이드를 당겼다 밀고 격발했다.
딱!
하는 소리가 울린다.
오민철은 몇 번을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이상 없다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실탄은 아래 있습니다.”
내부에 있는 칸막이 상자를 들어내자 열다섯 발들이 탄창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오민철은 탄창을 끼우고 챙기며 부산했으나 권총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한 얼굴이지만 속 마음은 복잡했다.
단서라고는 없다.
이런 경우 어디서부터 범인의 흔적을 찾아 추격을 시작해야 할지 방향 잡기가 쉽지 않다.
“윌리엄!”
“예 캡틴!”
“현 대통령의 외교 정책, 특히 군사적 분야와 보건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서류 좀 준비해주시죠.”
“보건 분야라고 하면?”
“미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뭐죠?”
“여러 가지죠. 인종차별도 있고, 인종차별이 가장 사회적 문제일 듯 싶습니다. 아, 마약이 있군요.”
마약은 여전히 미국 사회를 좀먹는 악의 뿌리다.
뽑고 뽑아도 다음 해에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발본색원, 원점타격이란 목표 아래 중남미 코카인 생산국가에 직접 미국 군대가 투입되어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들어간 예산 만큼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인종차별, 마약, 불법무기 거래, 테러집단에 대한 정책까지 빠짐없이 챙겨주세요.”
“알겠습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총수는 윌리엄과 히버트와 악수를 했다.
“서둘러 주세요.”
“늦어도 사흘 안에 정리해서 보내겠습니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사무실을 나왔다.
두 사람이 떠난 사무실에 정적이 돈다.
윌리엄도 히버트도 말이 없다.
“과연 그가 범인을 잡을까요?”
히버트가 침묵을 깼다.
사막의 흑새는 오래전부터 들었다.
용병의 끝판왕이라고도 했고, 현대과학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괴이한 마법을 부리기까지 한다고 했다.
과학으로 똘똘 뭉쳐진 CIA가 해결하지 못한 일을 과연 그가 어떻게 정리할건지 솔직히 부정적이다.
대통령의 딸이 사라졌다.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바람처럼 증발해 버린 것이다.
“자네 생각이 틀리지는 않네. 사건 해결이 되지 않자 인디언 점술사를 찾아가는 격이지.”
권총수는 인디언 점술사쯤으로 격하시킨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해야지. 오죽 답답하면 점술사를 찾아가겠나. 잠시 지켜보자고.”
윌리엄은 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암담하다.
누가 잡아 갔을까.
아니면 스스로 종적을 감췄을까.
대중의 별, 스타들은 가끔은 여론의 관심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증발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사라지고 몇 년 후 평범한 시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클레어 역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뛰어난 미모로 언론이나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데 그녀의 미모가 큰 역할을 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2,30대의 젊은 남자들 표가 많이 나온 건 사실이었고 전문가들도 아름다운 딸을 둔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백악관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뜨거웠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CNN에 채용이 되자 대통령이라는 아버지 후광이 작용했느니 마니했고, 실력이 안되는데 뽑힌 건 그녀의 미모 때문이라는 말도 돌았다.
그런데다 취직하자마자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당연히 비난이 쏟아졌다.
일반인들 같았으면 입사 3년 만에 책임 프로듀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번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