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제3의 눈동자(1)
검정색 양복에 진한 자색 계열의 넥타이를 맸으며 금테 안경을 꼈다.
사망한 천왕그룹 권철악 회장의 첫째 사위인 전철해였다.
아내 권서진이 죽고 나서 거의 외톨이가 되었다.
한직이나 다름없는 천왕 제지(製紙) 사장으로 쫓겨 갔을 뿐 아니라 임원회의는 물론 회사의 어떤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권악수는 전철해를 철저히 뭉갠 것이다.
사실 전철해 자신도 권서진이 사망하였으므로 천왕그룹에서 밀어낸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단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전중마 때문이다.
권서진과 사이에서 낳은 전중마는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인데 장모인 서옥선이 기르고 있다.
전중마 앞으로 된 천왕백화점 지분 7퍼센트가 그를 쫓겨나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 박 이사 알아봤습니까?”
전철해는 전화를 받는다.
“모두 13명이란 말입니까?.”
전철해의 표정이 약간 굳어진다.
“알겠습니다. 회사에서 봅시다.”
전화를 끊은 전철해를 향해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 최환의가 묻는다.
“변호인단이 열세 명이면 예상했던 숫자 아닙니까?”
“하나같이 검사장급 출신들이고 셋은 옷 갈아입은 지 1년이 안 된 사람들이라는군.”
우리나라 법조계는 외국에서 흔히 보기 힘든 독특한 전통 하나가 있다.
전통이라는 표현보다는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판사나 검사로 근무하다 변호사로 개업한 사람에게 일정기간 전관예우라고 하여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승률 백퍼센트라고 봐도 무리가 없기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사건에 그들을 선임하는 것이다.
“아무리 전관예우고 어쩌고 해도 워낙 사건의 파장이 크기 때문에 풀려나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글쎄 말이야.”
전철해는 어금니를 물었다.
“지구상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가장 분명한 나라이지만 집행유예는 불가능하고 최소한 오 년은 살겠지.”
침을 삼키고 눈은 탐욕으로 빛난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
권악수가 구속되면 옥중 경영 어쩌고 하겠지만 어차피 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때가 도래했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영영 없다.
지이잉!
그때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을 본 전철해의 눈이 빛나더니 재빨리 터치를 했다.
“정 보좌관님, 지금 출근길입니다. 오늘 저녁, 네네. 알겠습니다. 그 시간에 뵙죠.”
전화를 끊는 전철해의 얼굴이 살아 움직인다.
“정성관 보좌관이야.”
“황수억 의원님?”
“오늘 저녁에 보자는군.”
미소가 번진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맥보란은 핸드폰을 내렸다.
랭글리로부터 걸려온 전화인데 클레어에 대해 여전히 아무런 소득도 없다는 것이다.
대사관 직원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안셀이 룸미러로 눈치를 살핀다.
“이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대통령 딸이 흔적도 없이 증발을 할 수가 있지.”
맥보란은 창밖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차가 인사동의 한 찻집 앞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린 맥보란은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지붕꼭대기라는 찻집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맥보란은 한국 차가 뿜어내는 향기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창가에 권총수가 오민철과 앉아 있었다.
“오!”
맥보란이 깜짝 놀라며 손을 내밀었다.
오민철 또한 일어나 맥보란의 손을 힘차게 잡으며 말했다.
“맥! 얼마만입니까? 한국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곧 결혼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하핫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큰소리로 웃으며 반가워했고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가 다가와 차 주문을 받았다.
약속이나 한 듯 세 사람 모두 국화차를 주문했다.
오민철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좌석은 잠시 화기애애해졌다가 이내 무겁게 가라 앉았다.
“부장님의 제안을 받아 들이죠.”
권총수가 승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맥보란의 얼굴에 그제서야 미소가 맺힌다.
사실 권총수는 분명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맥보란은 권총수가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데 그건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였다.
블랙잭은 내 달에 나스닥에 상장될 만큼 보안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기에 천왕중공업의 최대주주가 되기까지 했다.
더 이상 사선을 넘나들며 돈을 벌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용병으로서의 능력도 검증됐지만 사업가로서의 역량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젯밤 자신도 불편했지만 권총수도 두 다리 뻗고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을 것이다.
CIA는 블랙잭과 향후 3년 동안 300억달러가 넘는 계약조건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문구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다.
즉 돈 때문에 오케이 사인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어쩌면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한때 왜곡된 정치적 야망이 권총수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적이 있었다.
상관이 싸질러 놓은 일이지만 자신이 수습했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회복한 관계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했다.
증거 하나 없고, 목격자 한 명 없이 백악관 주인의 유일한 외동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군함까지 동원되어 인근 바다를 수색하고 위성사진을 토대로 실종시간대에 인근을 지나간 배나 항공기 모두를 추적하며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의심스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맥보란은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조금 전 랭글리에서 걸려온 전화는 딱 한마디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캡틴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새로 바뀐 CIA국장 스티브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들어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CIA는 백악관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 축이다.
CIA하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들이 마음먹으면 이뤄내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CIA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사막의 흑새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가 움직여 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오민철이 핸드폰 문자를 보았다.
눈동자가 커졌다가 본능적으로 권총수를 바라보았는데 뭔가 중요한 내용이 날아온 모양이었다.
오민철은 재빨리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지잉!
이번엔 권총수 핸드폰이 울렸다.
권총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슬쩍 살폈는데 문자를 오픈 시켰다.
‘권악수 구속영장 떨어졌대’
권총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다시 맥보란과 얘길 이어갔다.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권악수를 태운 차량이 달리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취재 차량이 따라 붙고 있었다.
권총수는 뉴스속보를 보고 있었다.
맥보란과 헤어진 뒤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온 것이다.
뉴스는 계속 같은 화면을 반복 보여주더니 스튜디오로 바뀌었다.
이어 전문가라는 두 사람이 나와 권악수가 없는 천왕그룹의 미래를 놓고 각자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탁!
권총수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형 간부회의 소집해요.”
“알았어!”
오민철이 문을 열고 나갔고 권총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속영장’
재벌들은 거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곧바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건 권악수의 죄가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단순히 판사의 판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권, 재계, 학계를 포함한 국민 여론을 어느 정도 살핀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한 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구속영장은 법질서 차원의 단호한 사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보인다.
국민들도 말은 잡아 넣어야 한다고 하지만 재계서열 1위 기업의 총수가 구속되면 상당히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슬며시 보석 신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끊임없는 법정공방으로 끌고 가면서 대법원판결까지 짧으면 5,6년, 길면 10년은 끈다.
그러면서 국민 누구도 이제 관심을 두지 않을 때쯤 되면 집행 유예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든 슬며시 풀어주는 것이다.
권악수가 쥐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권악수는 권철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리스트로 끝없이 딜을 시도할 것이다.
관련 정치인들 역시 시한폭탄을 품고 살아가는 꼴이므로 권악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풀려 나올 수 있는 여건과 이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쨌든 천왕그룹에 주인이 없어진 것 하나 만큼은 사실이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이다.
사냥꾼들이 많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루 종일 뉴스의 중심은 권악수의 구속영장 발부였다.
그런데 벌써부터 일부 언론에서 천왕그룹 미래를 불안하게 내다보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일부 종편에서는 우리 경제가 곧 망할 것 같은 불안을 조성했다.
꼭 구속을 해서 재판을 받는 것보다는 죄를 지었다면 분명히 그 값을 받아야 하지만 법원의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는 불구속 상태로 받게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 * *
채명천을 중심으로 하는 간부들이 바쁘다.
권총수가 장시간 회사를 비울 뿐 아니라 때로는 연락이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출국 비행기 편이 정해졌다.
회사일 하랴 틈틈이 맥보란이 보내온 클레어양에 대한 정보를 체크하느라 몸이 두 개일지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고 출국을 하루 앞두었다.
일찍 퇴근하여 쉬기로 계획을 세웠다.
워낙 오랫동안 전장을 떠난 탓인지 긴장이 되면서도 가슴 한쪽에는 은은한 열기가 피어난다.
정글로 돌아가는 야생동물의 기분인 것이다.
부우웅!
구기동 자택에 도착한 권총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옷을 갈아 입고 난 권총수는 마당으로 나와 운기조식을 위해 가져다 놓은 화강암 바위에 결가부좌했다.
그때 운기에 막 들어가려던 권총수 눈이 빛났다.
대문밖에 누군가 멈춰섰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권총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는데 전체적인 공기의 흐름이 무겁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칠만한 기세는 없다.
열기가 있고 맹렬한 기세를 풍기는 걸 보면 건장한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딩동!
벨을 누른다.
딩동! 딩동!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십니까?”
코끝에 짧은 향수 냄새가 맡아진다.
권총수는 대문을 열었다.
멈칫!
권총수는 상당히 놀랐는데 대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철해다.
죽은 권철악의 첫째 사위인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으나 사진을 통해 얼굴은 기억한다.
“들어오시죠.”
전철해는 조심스런 얼굴로 들어섰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습니까?”
권총수가 야릇한 눈빛을 던졌다.
사실 아는 경찰관을 통해 주소를 알아냈다.
물론 불법이다.
권총수는 운기조식 대신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대표님!”
전철해는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권악수가 구속된 건 아시죠?”
“예.”
“매우 잘된 일 아닙니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처벌 받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러면서 입술을 비튼다.
“얼마전 천왕중공업의 경영권을 깔끔하게 정리해 가셨던데? 나와 손잡을 생각 없습니까?”
권총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5대5?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이오?”
전철해는 미리 준비해 온 듯 막힘없이 설명을 했다.
권총수는 담담한 얼굴로 들었고 전철해의 이야기는 30여분 가까이 지속되었다.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끝나며 전철해가 웃으며 물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끝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 꽁초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