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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22화 (422/651)

제422화: 강호의 칼 (3)

누군가 서옥선의 위임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자필 위임장이어야 하는데 서옥선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진짜다 아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떻게 아들에게 가짜를 주겠냐면서 말도 안 된다는 쪽과 그렇지 않다 필적 감정을 받아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눠졌다.

“시끄러!”

“개소리 그만해.”

회사측과 반대쪽 주주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욕설까지 튀어나오면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짜라는 쪽과 아니라는 쪽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다.

회의는 길어졌고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었으나 끝날 기미가 없었다.

“도대체 필적 감정 한번 받아 보자는데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뭐요?”

“필적감정은 서옥선 여사님에 대한 심각한 명예 훼손이자 모독이다.”

장장 열 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공인기관을 통해 서옥선의 필적을 감정받는 것으로 합의하며 회의가 끝났다.

그때 권악수는 어군에서 얼마 전까지 서울 시장을 역임하다 본격적 대권행보에 나서기 위해 사임한 임용하 전 시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곁들이며 한잔 마신 술로 둘 모두 적당히 달아올라 있었다.

분위기는 좋다.

얘기도 잘됐다.

권악수의 얘기는 간략하고 분명했다.

우릴 도와주면 내년 대선의 자금문제는 책임지겠다.

얼마전 차기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임용하는 35퍼센트로 여전히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권력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언론의 칼럼이 달라지고,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의원들이 앞 다투어 식사 요청을 해오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 정치는 자금 아니겠습니까?”

권악수의 요구는 하나였다.

충분한 대출만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

한마디로 백상은행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뜻이다.

임용하는 유일한 야당출신 광역 단체장이다.

현 여당인 민국당의 대통령 후보는 난립하고 있고 뚜렷하게 치고 나오는 인물이 없다.

그에 반해 야당인 자주당의 대선후보군에서 임용하가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임용하가 출전하면 여당의 누가 나와도 10프로차 이상으로 이긴다는 여론조사도 나와 있다.

“걱정마세요. 내가 조만식 백상은행장을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아니면 통화라도 해보죠.”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흠칫!

임용하가 깜짝 놀라자 권악수가 눈을 빛낸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곧 청와대에 들어가리라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조금 일찍 부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하하! 우리 권회장 대단해. 정말 대단해.”

쨍!

두 사람은 잔을 부딪혔다.

그때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술잔을 비운 권악수는 슬쩍 핸드폰을 보았다.

‘서 여사님 필적 감정하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콱!

핸드폰을 쥔 권악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원출도를 비롯한 임원들 모두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임용하를 배웅하고 곧바로 회사로 들어온 권악수는 소릴 지르고 호통을 치며 임원들을 윽박질렀다.

“당신들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런 제의를 받아 들이냔 말이야.”

“거부하면 필적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갈 기세였기 때문에...”

원출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것 하나 해결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모두가 굳은 얼굴로 앉아 있다.

“빌어먹을!”

권악수는 좀체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회장님!”

원출도는 권악수의 눈치를 살핀다.

“왜 하필 서 여사님의 위임장만을 물고 늘어질까요? 서여사님은 법적으로 회장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들에게 해가될 위임장을 써주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이건 절대 필적 감정이라는 얘기가 나올 건덕지가 아니죠. 형제도 친구도 아닌 어머니 위임장이잖습니까?”

담배를 피우던 권악수가 멈칫했다.

“무슨 말이오?”

“제가 어머니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왔습니다. 그럼 회장께서 필적 감정 해보자고 하시겠습니까?”

“그럼 뭐요?”

권악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옥선과 자신의 관계가 나쁘다는 걸 아는 사람은 회사 안에서도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원출도의 말인즉 자신과 서옥선 사이를 들여다 보듯 알고 있지 않으면 필적 감정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가?’

임원들을 쏘아 보았다.

충신들이다.

자신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바칠 인물들로 오래전부터 곁에 있던 그야말로 측근들인 것이다.

‘틀림없다. 나와 그 할망구 사이를 잘 알고 있지 않으면 그런 요구는 절대 나올 수 없다’

권악수 두 눈이 임원들을 쏘아본다.

임원들 중 누군가 자신을 배신하지 말란 법도 없다.

찬찬히 훑어보고 뜯어봐도 배신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한강으로 뛰어 들라고 하면 앞 다퉈 달려갈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옥선이 가진 2퍼센트의 지분이 경영권을 지키느냐 뺏기느냐를 결정하는 키가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필체를 다듬고 그 분야의 전문가를 데려다 합숙훈련까지 시켜 위임장을 작성하고 강제로 지장까지 찍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마치 이쪽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있기나 한 듯 서옥선의 필체 진위를 들고 나온 것이다.

“으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적을 모르는 전쟁은 무조건 패하게 되어 있다.

권총수는 아침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안건이라고는 전쟁시장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 가지가 더 늘었는데 바로 M&A에 관한 것이다.

“세종문서 감정원이라는 곳이 믿을만 합니까?”

채명천과 오민철, 그리고 태평양 증권사에서 스카웃 해 온 펀드매니저 조봉철이 앉아 있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SDS방송 시사교양프로그램 ‘무엇이 알고 싶냐’의 단골 감정원이며 서울지방법원 전문 필적감정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분입니다.”

조봉철이 자신있다는 표정을 했다.

권총수는 조봉철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마음속으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권악수를 얼마나 알고 있나?’

권총수는 몇 마디 얘기를 더 꺼낸 뒤 회의를 마쳤다.

모두가 일어나 사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권총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명함을 주워 살폈다.

‘세종문서 감정원 원장 배구덕’

한참동안 명함을 바라보던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공신력 있는 기관이라고?’

권총수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내린 권총수는 왼쪽을 바라보았는데 복도 바로 맞은편에 세종문서 감정원이란 글씨가 보인다.

권총수는 오른손에 묵직한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입구 좌측으로 작은 소파 두 개가 있고 그 너머로 앉아 있던 여직원이 일어나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원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약속 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권총수라고 하면 알 것입니다.”

“잠깐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권총수는 소파에 앉지 않고 사무실을 살폈다.

두 명의 여자 직원이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고 여직원들 뒷벽으로 ‘글씨는 과학이다’라는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안쪽 사무실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권총수는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닫힌 문을 가볍게 노크 한번 한 뒤 문을 열었다.

안쪽 의자에 머리가 희끗한 쉰 후반 가량의 사내가 일어났다.

“권총수씨?”

“예 그렇습니다.”

“앉아요!”

사내는 소파를 가리켰다.

권총수는 가방을 소파탁자 아래에 놓고 앉았다.

“백 억짜리 땅이 움직일 수 있는 계약서를 감정해 달라구 했었죠?”

“예!”

권총수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몇 번 전화를 했는데 계속 통화중이었다.

명함에 적힌 핸드폰 전화를 받지 않는 건 한 가지 목적 말고는 없다.

일부러 통화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되면 고객은 회사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다.

별 볼일 없는 일이면 직원들 선에서 감정하는 것이고, 덩치가 크면 자신에게 전화를 한다.

권총수는 그런 코스를 밟아 여기까지 왔다.

백 억짜리 땅을 매매하는 계약서 글씨체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통화를 끝내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배덕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계약서부터 보시죠.”

권총수는 빙긋 웃더니 들고 왔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계약서입니다.”

배덕구는 멈칫하며 가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부동산 매매계약서는 거의 백프로 봉투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권총수는 상체를 소파 등에 붙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배덕구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으헉!

가방을 열자마자 배덕구는 신음을 흘리며 깜짝 놀란다.

가방에는 오만원권 다발이 가득 있다.

“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다릅니다. 뒷돈을 받고 필체감정을 허위로 작성하거나 일부로 오감정을 해달라는 부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꾸울꺽!

워낙 많은 액수에 배덕구는 침을 삼켰다.

“아마 천왕그룹 권악수 회장으로부터 저녁을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배덕구는 소스라쳤다.

어떻게 알았을까.

30분전쯤 권악수로부터 저녁을 먹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10억입니다. 현금이니 원장님 통장에 찍힐 일 없고 은행 컴퓨터를 거치지 않은 돈이므로 통장에 흔적도 남지 않죠. 양심에 걸릴 일 바라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만 감정해 주시면 됩니다. 정의를 살려달라는 뜻이죠.”

배덕구의 이마가 찡그러졌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아파트 한 채 값을 현금으로 가져와 한다는 얘기가 있는 그대로만 감정해 달라고 한다.

“정말입니다. 연락 받으셨죠? 천왕중공업 주식 위임장 감정 들어올 것이라고, 사실대로만 감정하세요. 난 불법 따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배덕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그리고 잠깐!”

뒤돌아서려던 권총수가 배덕구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 그 사람 만나면...”

권총수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탁!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사라진다.

배덕구는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십억!

배덕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배덕구는 어군에서 권악수를 만났다.

술잔이 몇 순배 나눠지고 권악수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보세요!”

봉투를 열자 일 억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원장님의 감정 능력을 믿습니다.”

“뭘 이런 걸.”

“받아 넣으세요. 문제없는 수표입니다.”

배덕구 눈앞으로 낮에 사무실을 왔다 간 권총수란 사내가 떠오른다.

“...그쪽에서 주는 돈도 거절하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감정했는데 그들이 돈 내놓으라고 하겠습니까?”

한마디로 챙길건 챙기고 정의롭게만 감정하라는 뜻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배덕구는 주머니에 수표를 넣었고 권악수 눈이 좁아진다.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권총수는 저녁 운기조식을 끝내고 막 눈을 떴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따라 바람도 없다.

마당 중앙에 놓은 바위에서 내려왔을 때 현관 앞에 놓아둔 전화기가 요동을 쳤다.

액정에 채이사라는 글씨가 분명하게 찍혔다.

“채 이사님!”

“바쁜 일 없으시면 잠깐 오시죠. 지상식이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지상식이란 말에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강남의 밤은 화려하다.

자정이 되어가는 데도 화려한 간판의 불빛들은 꺼질 줄 모르고 거리의 사람들은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왕복 팔차선 도로를 달리던 포드 익스플로러 한대가 속도를 늦추며 방향 지시등을 켰다.

골목으로 들어선 차량이 30여미터 전진하다 다시 오른쪽으로 꺾었다.

‘끄레디앙호텔’

기역자로 꺾인 듯한 18층짜리 호텔이 나타났다.

끄레디앙호텔은 5성급으로 다양한 오락시설을 갖추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강남의 명소 중 한 곳이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만차라는 팻말이 계속 나타나면서 한참을 내려간 포드 익스플로러는 지하 오층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만해!”

권총수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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