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칸케류(陰流)2
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받는다.
“김부장 지금 어딥니까? 사무실이면 잘됐습니다. 메일 한통 보낼테니 우선 인터넷기사로 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김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건네줄 자료가 여의도 말고 또 있습니까? 30여분 있다 확인해 보세요.”
이런 중요한 전화는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럼에도 권악수 앞에서 언론사 편집부장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다.
면전에서 직접 언론사 간부와 통화를 하면 사건의 긴급성이나 파급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철회하자는 마지막 시간을 제공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악수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칼 날 가는 소리만 했다.
“한번 해보자고.”
권악수는 웃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원출도는 냉수부터 찾아 마셨다.
커어!
원출도는 컵을 책상위에 놓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떨린다.
권총수는 지금 천왕그룹 50여 계열사와 하청업체까지 계산한 일백만명의 실직을 무기로 정부와 한 판 붙으려 하고 있다.
무대뽀라는 말이 있다.
타계한 권철악 전 회장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기업가는 생각이 많으면 안된다. 지나치게 좌고우면 하다보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다. 때로는 눈감고 귀 막고 밀어붙이는 무대뽀 정신이 필요해’
그 무대뽀는 지금을 말하는 것이다.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지금은 얼마든지 있다.
기업은 자존심과 체면으로 경영해서는 안된다.
황수억 국회기재위원장은 골프장에 있었다.
상대는 국회 예산결산위원장과 여야 간사들이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즉 내년 예산안 규모와 편성에 따라 많은 표들이 춤을 출 것은 자명했다.
한마디로 대선을 의식한 선심성 예산을 늘리고 증액해야 하는데에 대한 의논을 하는 자리다.
어느 정도 얘기가 끝나가고 있을 때 황수억의 비서 배성동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가왔다.
“누군데 가져와?”
골프 칠 때는 전화 받지 않는다.
“제정모 의원님입니다.”
“제의원이.”
동료 의원이자 자기 계파 사람이면서 개인적인 친분도 깊다.
“제의원!”
“형님! 이럴 있습니까?”
사석에서는 형님 아우다.
“천왕에서 내 이름을 언론에 흘렸나 봅니다. 내가 뒷돈을 받고 천왕화학의 폐기물법 위반을 눈감아 줬다는 겁니다.”
황수억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잠시 통화를 하며 제정모를 달랜 황수억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린놈이’
끓어오르는 흥분을 자제한 뒤 권악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위원장님 아니십니까?”
권악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흘러나온다
“권회장, 무슨 짓이오? 이러면 안됩니다.”
“뭐가 안되는데요?”
“정말 이럴거요? 내 권회장 입장 알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했잖아요.”
“상처는 썩어 가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란 겁니까? 당신들 내가 개 좆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막말까지 튀어나오자 황수억은 눈을 감아버린다.
대책이 없다.
진짜 터뜨리고도 남을 위인이다.
경주에 내려왔다.
차량 통행이 뜸한 변두리 길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오민철이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신 권총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한번 왔었지. 수학여행이었을 거야.”
당시 같이 왔던 시설 친구들은 권총수까지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다.
유병칠을 제외한 마두호와 김현섭이란 친구가 수학여행을 온 이곳 경주서 갑자기 사라졌다.
나중 선생님으로부터 부모가 찾아와 데려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뭔지 모르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올 때 까지도 마음은 불편했고 한동안 묵언수행하는 스님들처럼 입을 닫고 살았다.
“왜 그랬는데?”
오민철이 묻는다.
“부모, 가족, 누군가 있어 데리고 갔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나도 혹시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나타나 내가 너를 낳은 엄마다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지. 낯선 아줌마만 보면 혹시나 했고, 보육원에 고급 승용차만 들어오면 멋진 양복을 걸친 남자가 내려 내가 너의 아버지다 하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더라고, 나중 완전히 포기를 하자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졌지.”
부욱!
담배를 끄며 일어나는 권총수가 짧게 웃었다.
“시간 됐는데.”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고 두 사람은 세워놓은 차로 들어가 다시 출발했다.
20여분을 달려 오민철의 벤츠 차량이 도착한 곳은 토함산 자락을 끼고 있는 한옥 집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남향으로 지어진 한옥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으며 산에서 내려온 바람에 정원의 나무들이 흔들거렸다.
끼이익!
입구에 조그만 공터에 차를 세운 권총수와 오민철은 문을 열고 내렸다.
두 사람은 한옥을 향해 걸어갔다.
대문은 안쪽으로 열려 있었고 처마의 현판에 ‘청송관(靑松館)’이라고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은 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조용했다.
넓은 마당과 정면 네 칸짜리 본채와 그 옆으로 세 칸짜리 집이 나란히 서 있었다.
토방 위로 쪽마루가 있는데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오민철이 눈을 치켜떴다.
사실 권총수는 들어올 때부터 사람소리를 들었다.
오민철은 소리를 찾아 움직인다.
“저쪽으로 가보자!”
집 안 깊숙이 들어가자 담장을 따라 계단이 있고 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오민철은 계단을 올라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뒷마당이 나왔다.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뒷마당은 상당이 넓었으며 그곳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얍!”
“어딜!”
건장한 성인도 있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열대여섯 살짜리 청소년도 보인다.
모두가 딱딱한 목도를 휘둘렀는데 오민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도복에 호구를 차고 휘두르는 검도와 전혀 달랐다.
집안을 살피고 온 권총수가 나타났다.
권총수는 한참동안 수련생들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린다.
“우리나라 검도가 아닌데.”
배우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여러 유파의 검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지금 사내들이 수련하는 검은 난생처음 보는 것으로 상당히 빠르다.
빠른 검은 걸음을 중요시 하는데 하나같이 순발력이 좋고 두 발이 땅에서 높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의 지면에 붙어 있다시피 움직이고 있다.
사실 두 사람이 이곳 경주를 온 것은 신중식의 말을 듣고서였다.
경주에 가면 청송관이란 검도 일파가 있다.
그곳은 국내 어떤 검도단체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또한 관원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소문을 듣고 찾아가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 입관하거나 인연을 맺는다.
20년 전 신중식은 경쟁조직의 우두머리를 죽였다.
그리고 잠시 경찰을 피해 다녔는데 주로 지방에 머물렀다.
해운대 호텔에서 묵고 있던 그해 9월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에게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국제시장을 찾았다가 칼을 맞았다.
나름 경계한다고 했지만 전혀 예상 못한 장소와 시간에 칼이 들어왔다.
어머니 겨울 내복과 단추 달린 두꺼운 가디건을 고르는데 먼저 도착해 옷을 고르고 있던 손님이 돌변한 것이다.
자신도 칼에 일가견이 있었고 하여 먼저 한방을 맞긴 했지만 치명적인 급소를 비켜가 맞섰다.
사시미 칼을 든 둘은 십여합을 겨뤘으나 어느 쪽도 뚜렷하게 상대를 누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선방을 맞은 신중식이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잠시 중심을 잃는 사이 사내의 칼이 세 번 연속 들어왔다.
빨라도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먼저 맞지 않았다고 해도 신중식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뒷골목 칼 같지는 않고?”
신중식은 복부를 감싼 채 헐떡거렸다.
사내는 신중식과 비슷한 또래였는데 마지막 칼을 박으며 말했다.
“청송관의 칼은 다르지.”
씨익!
웃으며 느긋하게 걸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천우신조로 때마침 외과의시가 지나갔고 응급처치를 잘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곧바로 병원에서, 그리고 치료가 되자 교도소로 들어온 탓에 두 번 다시 자신을 공격한 사내에 대한 소식이나 정보는 듣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청송관의 칼은 다르다는 자부심 가득한 말이었다.
신중식을 만나고 돌아온 권총수는 청송관을 검색했다.
전국에 청송관이란 간판을 걸고 있는 검도 도장은 모두 열일곱 곳이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한바 대부분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50여 군소단체에 소속되어 있었고 단 두 곳만이 독자적이었다.
그중 한 곳이 서울에 있는 청송관이었는데 일반 검도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다른 한곳이 여기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한참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개량 한복 바지에 흰색의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서른 초반쯤 보였고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관장님이십니까?”
오민철이 물었다.
사내는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제자입니다.”
“선생님은 어디계십니까?”
오민철의 질문에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내가 표정을 고쳤다.
“누구시죠? 무슨 일로 선생님을 찾는 것입니까?”
“뵙고 드릴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말을요?”
사내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쪽의 신분을 분명하게 알아야겠다는 의지였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권총수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블랙잭 대표 권총수’
명함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아직 블랙잭이 어떤 회사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자리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군요?”
“서울 가셨습니다.”
“서울?”
“대사형을 만나러 가셨는데.”
대사형이라는 말에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대사형은 평범한 단어가 아니다.
한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거나 남들보다 독보적일 때 일파(一派), 일가(一家) 또는 일문(一門)을 이뤘다는 표현을 쓴다.
대사형이란 그런 일문이나 일가, 일파에서 주인의 다음을 이어갈 가장 큰 재목을 지칭한다.
이곳 청송관이 칼의 집단이므로 도문(刀門)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즉 차기 청송관의 관장이 될 후계자를 만나러 갔다는 뜻이다.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내는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수련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권총수는 돌아섰다
두 사람은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초저녁인데도 식당은 한산 했고 주인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내장 국밥 두 그릇 주세요.”
오민철이 다가온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채워준 컵의 물을 단숨에 마셨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는 프로 축구 주중경기가 중계되고 있었으며 주방 유리너머에서는 앞치마에 흰색의 수건으로 머리를 덮은 할머니가 국밥 요리에 바쁘다.
“형이 보기엔 어때? 그 사람들이 휘두르는 칼 말이야?”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지. 태권도나 되면 모를까.”
팟!
갑자기 권총수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