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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14화 (414/651)

제414화: 시장의 전쟁(1)

권총수는 오랜만에 서초동 본사에 나와 있었다.

회사가 커지면서 처음에는 광화문 근처 조그만 빌딩에 입주했지만 지금은 강남 한 복판의 50층 건물 3개층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10여 층짜리 건물 하나 정도는 충분히 매입할 자금력이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봤다.

지이잉!

컴퓨터 앞에 앉아 카이로의 맥보란에게 메일 한 통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한 사람은 차석준이다.

그는 지금 서울에 있다.

“작업 들어갔습니다.”

권총수는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고 화면에 천왕중공업 주가와 경영상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 떴다.

권총수는 스크롤을 움직여 천왕중공업 주요 주주현황을 읽는다.

권악수의 양모이며 타계한 권철악의 아내 서옥선이 3퍼센트 조금 넘게 보유하고 있고 친정 쪽으로 두 남동생이 2퍼센트 정도 지분을 갖고 있었다. 권총수는 나머지 주주들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원출도의 표정이 굳어 있다.

흔들리는 천왕그룹을 통째 삼키려는 외국계 자본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눈에 띌 만큼의 어떤 공개매수나 M&A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시장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중공업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아직 분명한 판단은 이르다.

여러 계열사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공업을 포함한 몇 곳은 자금 상태나 경영여건이 나쁘지 않다.

문제는 부실 계열사를 붙들고 있다 보니 건강한 계열사들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원출도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쳐낼 건 쳐내고 가야 하는데, 권악수의 욕심이 너무 크다.

그대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 권악수 의지다.

어쨌든 서둘러 시장의 흐름을 간파한 뒤 M&A낌새가 있다면 이쪽에서도 맞불을 놔야한다.

지이잉!

원출도는 책상위에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는데 김과장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이사님 조금 전 장외주식에 대한 공개매수를 발표했습니다.”

“어딘가?”

“뉴욕에 있는 레블론이라는 조그만 투자신탁 회사입니다.”

원출도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무리 미국의 경제규모가 크다고 조그만 신탁회사가 대한민국 기업재계서열 1위 천왕그룹의 한 축을 먹겠다고 나서지는 못 한다.

원출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배후에 진짜 큰 손, 헤지펀드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원출도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권악수는 사무실에 있었다.

오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천왕그룹 신규자금 지원에 관한 심의가 있다.

창문을 열어 놨지만 담배 연기가 채 빠져나가지 않아 실내가 뿌옇다.

문이 열리고 원출도 이사가 들어섰다.

“무슨 얘깁니까? 시장 움직임이 이상하다니.”

이미 전화로 간단한 보고를 받았다.

원출도는 창가에 서 있는 권악수를 보며 말했다.

“헤지펀드들이 회사를 노리는 모양입니다.”

“난 또, 그게 뭐 어제 오늘 일입니까?”

“이번엔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제가 입수한 정보만 해도 시장에 들어온 자금이 천문학적입니다. 조금전 레블론이라는 투자신탁 회사가 공개매수를 발표했다는 소식입니다.”

“레블론?”

원출도는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닌 조그만 투자신탁회사라면서 김과장에게 받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장내에서는 어느 정도 매수했다고 했소?”

“아침에 대금증권 마동칠 이사와 통화를 했는데 6퍼센트 조금 넘는 지분으로 판단하더군요.”

권악수의 눈이 커졌다.

6퍼센트 지분이면 엄청난 대주주다.

지금 천왕 중공업최대주주는 권씨 일가인데 모두 합하면 15퍼센트 정도 된다.

권악수 자신과 여동생 권혜림, 친어머니 현미정과 양어머니인 서옥선과 친정식구들까지 포함해서이다.

아직은 우호주들, 그중에서도 충성파라고 할 수 있는 대주주 몇 곳이 힘이 되어주고 있다.

“레블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세요. 그리고 기자들에게도 알려 헤지펀드 자금이 국내 천왕의 알짜 계열사중 하나인 중공업을 노린다는 식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기사를 내보낼 수 있도록 협조도 구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자는 뜻이다.

진부한 방법이지만 여전히 먹히는 것이 애국심 작전이다.

잠시 어렵다는 이유로 우리 기업을 노리는 외국 자본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주식 한 주 갖기 운동 따위가 벌어진다.

기업의 속사정을 알면 절대 그런 운동이 일어날 리 없을 것이다.

흔들리는 기업들 대부분이 사주와 그 일가의 욕심과 부패 부도덕이 원인이다.

하지만 기업은 광고를 이용해 언론을 통제하고 언론은 부지런히 기업을 대변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다.

‘음!’

원출도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권악수를 바라본다.

가슴이 답답하다.

천왕이 오늘 날 이지경이 된 것은 철저히 권악수 탓이다.

아무리 큰 배도 선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흔들리고 좌초할 수도 있다는 걸 지금 권악수는 보여주고 있었다.

권철악이 죽고 나자 창업 원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1.5세대까지 청소하듯 쓸어냈다.

새로운 젊은 경영을 위해서 바닥의 고인물부터 퍼내겠다는 것이 인사학살의 변(辯)이었다.

팟!

돌연 원출도의 눈이 빛났다.

갑자기 한 사내가 떠오른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니다.

그 사람이라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갑자기 지금 권총수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걸까.

권악수가 전화 받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소. 지원보류, 그런 개 같은 결정을 내린 새끼가 누구야?”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천왕그룹 지원책이 잠정 보류된 모양이다.

원출도는 조용히 회장실을 걸어 나갔다.

며칠 전 기획재정위원장을 만나 국회의원 50여명을 날릴 수 있는 스모킹 건을 갖고 있다고 협박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강력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대출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탁!

비서실 직원들이 문을 닫고 나오는 원출도를 바라보는데 표정에서 무슨 희망을 찾으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얼굴을 보며 하나같이 탄식했다.

권총수는 오민철과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갈비탕 집에 앉아 갈비를 뜯고 있는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갈비를 쥐느라 손에 묻은 국물을 휴지에 닦고 핸드폰을 보았다.

오민철이 흘긋 권총수의 눈치를 보았는데 표정만으로는 무슨 문자인지 알 수는 없었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놓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언제나 얘길 해줄까 기다렸지만 말이 없자 오민철이 기어이 물었다.

“뭔데?”

“어 별것 아냐. 국회에서 천왕그룹 지원안이 잠시 보류 되었다고.”

“아 시원해. 갑자기 입맛이 도는구만.”

후루룩!

오민철이 크게 소릴 내며 국물에 만 밥을 몇 숟가락 연거푸 떴다.

“그렇게 좋아?”

“좋아!”

“천왕그룹과 무슨 감정 있어?”

뚝!

오민철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형도 혹시 권철악의 배다른 아들이냐고?”

“사장만 아니면 이 뚝배기로 그냥 콱!”

권총수는 환하게 웃으며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웠다.

국회의 결정이 지연되면서 말들이 많아진다.

정부 여당에서조차 지금 상태로는 회생하기 어렵다는 쪽으로 본 것 아니냐.

잘못하다간 돈만 쏟아 붓고 기업은 기업대로 망가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답답한 건 천왕그룹측 태도였다.

과감한 구조조정과 살빼기로 회사를 살리겠다는 어떤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자 더욱 이상한 소문과 괴담이 쏟아졌는데 그중 하나에 여론은 흥미를 보였다.

‘천왕 장학생’

타계한 권철악 회장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상당수 국회의원 목록을 천왕측에서 갖고 있다.

만약 그게 터지면 여의도에서 온전할 사람은 몇 명 없다는 것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여유있게 나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군.”

출근하여 신문을 보던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싸워야할 적이 있고 한 발 물러나야 할 적이 있다.

한두 명, 많으면 대여섯 정도면 모를까 여야 국회의원 50여명이 권철악 회장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헌정사상 50여명의 국회의원이 뇌물죄로 구속된 적은 없다.

적절하게 잘 건드려야지 무턱대고 위협하면 역습을 받는다.

쉰 명이라는 숫자 자체가 엄청난 권력이다.

그들이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겠다고 탈당하여 뭉치면 강력한 천왕의 비토세력이 될 것이고 정부에서 천왕그룹을 위한 어떤 지원책을 내놓는다고 해도 국회에서 부결될 것이 뻔했다.

그들이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여야 의원 찾아 다니며 부결시키는데 협조해달라고 하면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이심전심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너 같으면 어떤 방법을 쓸거야?”

오민철이 다가와 묻는다.

“내가 권악수라면 이런 식으로 안 해. 한두 명만 치는 거지.”

“오십여 명이나 되는데?”

“한두 명만 언론에 흘려야 효과가 커. 그 한두 명이 과거 천왕그룹 권철악 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보도가 돼봐. 나머지 마흔여덟 명은 얼마나 불안하겠어.”

“결국 그들이 일심 단결하여 권악수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당연하지. 쉰 명을 한 번에 터뜨려봐, 세상에 십원짜리 하나 받지 않고 정치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는 역 여론이 만들어지면서 역습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지.”

오민철은 침을 삼켰다.

확실히 머리 돌아가는 것이 다르다.

“거기다 한두 곳의 언론이 천왕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라도 써봐. 몰락의 시간은 더욱 빨라지지. 검찰도 한두 명 조사해야 분명한데 국회의원이 너무 많으면 부담스럽다고.”

그때 문이 열리고 차석준이 들어섰다.

“상당히 순조롭습니다.”

“시세보다 더 높게 사겠다는데 팔지 않을 놈이 어딨어.”

권총수가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돌아섰다.

“정확히 오늘까지 확보한 지분이 어느 정도입니까?”

“순 매수만 9퍼센트 가까이 되고, 우호주를 섭외중인데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미국계 펀드회사라는 걸 매우 마음에 들어하더군요.”

“투자자에게 애국심은 중요하지 않지. 미국계 펀드던 아랍계 펀드던 돈만 벌수 있으면 되는 거지.”

오민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차이사!”

“예 사장님!”

“어떻게 해서라도 51프로를 확보하세요. 무슨 뜻인지 알죠?”

차석준의 눈이 빛난다.

51프로까지 가지 않아도 경영권을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51프로는 엄청난 의미가 있다.

공격자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반수 취득은 공격자에게 상당한 자금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에 쉬운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메시지는 전달이 되는 것이다.

“준비 되는대로 주총 소집을 요구하고.”

“예!”

권총수는 담뱃불을 끄고 볼일이 있다며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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