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사제들의 암습(1)
권악수는 또 다시 스피커폰을 통해 악을 썼다.
“왜 대답이 없어. 김갑종!”
“알았어.”
전화를 끊은 김갑종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돈이다.
돈의 왕국이고 돈이 권력이며 전부이다.
그러면서 돈을 가장 혐오하는 척하는 아름다운 위선을 지니고 있다.
김갑종 또한 그 테두리 안에 완벽하게 포함된 인물이다.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권총수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취조실 문을 열고 나갔다.
“저 새끼 풀어줘!”
김갑종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흰색의 나이트 가운에 슬리퍼를 신은 권총수가 검찰청 로비를 걸어나오고 있었다.
보안요원들은 물론이고 민원인들의 눈이 커졌고 일부는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로비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멎었다.
덜컥!
운전석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내렸다.
권악수 운전기사 양형모이다.
“타세요.”
권총수는 잠시 양형모를 바라보더니 뒷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부우웅!
벤츠는 도망치듯 경찰청사를 벗어나 사라졌다.
30분 후 권총수는 천왕그룹 지하 주차장에 있었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양형모의 안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넓은 사장실에 담배 연기가 가득 했다.
문을 열었는데도 얼마나 피웠는지 눈이 따가울 정도였으며 권악수는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권총수를 바라보는 권악수의 눈이 이글거린다.
“앉으세요.”
권총수가 자리에 앉으며 권했고, 권악수는 창가로 걸어가더니 등을 기대며 돌아섰다.
“태천수 어딨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떻게 알았나?”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톡!
권총수는 소파위에 놓인 시가케이스를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딸칵!
옆에 놓인 라이터로 불을 붙인 권총수는 소파에 등을 붙였다.
“사장님!”
권총수는 권악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이런 얘기 있죠. 공부하는 머리와 돈 버는 머리가 다르다는 말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전 어려서 공부는 싫어했으나 이른바 머리 돌리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는 얘길 자주 들었습니다. 아버지 결재가 필요한데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십억 달러를 주지 못하고 있다.”
권총수는 상체를 바로 세워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보통 인간들 같으면 어 그래, 그럼 아비를 죽이면 쉽게 받을 수 있잖아 하고 권철악 회장을 죽였을 것입니다. ”
권총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죽일 줄 알았겠죠. 죽이지 않더라도 나와 통화 내역을 검찰에 가져다주면 범인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정황증거가 될 테니까. 대신 아버지는 당신이 죽이고, 태천수라는 사내를 사주하여 말입니다.”
권악수의 입술이 떨린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최소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결국 자신이 권총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30분 이내로 십억 달러 입금 할 테니까 꺼져, 단 조건이 있다.”
“권철악 회장 살인사건에 대해서 침묵해달라는 것입니까?”
“1억 달러를 더 얹어 주겠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가 한 번도 선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고로 당신을 놓고 좋은 놈이다 왈가왈부 할 자격도 없다.
너나 나나 도긴개긴이다.
당신이 자수하거나 죄를 고백하면 몰라도 굳이 내가 나서서 신고 따위 하지는 않겠다.
탁!
권총수는 사무실을 나갔다.
권철악 회장을 죽인 사내, 태천수는 왼쪽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 누웠고 병실 입구 좌측 탁자에 참치 집 사장 마석춘이 조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이잉!
탁자위에 올려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낯익은 번호 하나가 떴다.
“마석춘입니다.”
마석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마석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동생, 당분간 몸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태천수는 마석춘의 조직 후배다.
칼에 관해서는 마석춘과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누가 최고냐는 질문이 나오면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마석춘을 지목했다.
어느 바닥이든 넘버 2는 외롭다.
단순히 1등과 2등이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든 초대를 받아서 가보면 마석춘은 자신보다 항상 윗자리를 차지했고 상대 보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2등은 보스가 아닌 밑에 있는 사람들과 겸상을 한다.
어쨌든 그 역시 나이가 들면서 은퇴를 했다.
그동안 사업은 고속도로였다.
그런데 작년 여름부터 잘 나가던 사업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
자금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아는 후배로부터 사건 청탁이 들어왔다.
은퇴 한지가 오래되어 경찰 감시망에 들어있지도 않은 태천수였기에 딱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칼을 잡았다가 마석춘에게 잡힌 것이다.
“권사장님이 입을 열리 없으니 잠시 시끄럽다 조용히 미제 사건으로 넘어갈걸세. 병원비 계산은 걱정 말고 우리 더 이상 이 바닥에 손 묻히지 마세나.”
탁탁!
마석춘은 기브스 하지 않은 태천의 다리를 가볍게 토닥이며 병실을 나갔다.
버홀터로부터 입금 전화가 걸려왔다.
권총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날 작전에서 희생된 부하들 몫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언제오나? 오케이 그때 보지.”
권총수는 전화를 내렸다.
***
푸른 하늘이 너르게 펼쳐진 날이었다.
오민철과 남대문 시장을 찾았다.
물가는 그쪽이 훨씬 싸지만 물건의 질은 물론 다양성에서 많이 부족했다.
두 사람이 가장 많이 준비한 건 속옷이었다.
물이 귀한 탓도 있지만 유난히 씻는 시설이 부족했고, 그쪽 사람들 자체가 씻는 걸 싫어했다.
씻지는 못해도 옷이라도 부지런히 갈아입어야 하는데 날씨까지 더운 나라에서 한 번 입으면 보름은 기본이었다.
두 사람은 속옷과 간단한 외출복이 될 수 있는 편한 옷가지들을 보따리 가득 담았다.
오민철이 앞에 서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잊어 먹은 것 없나 잘 생각해봐.”
“거의 산 것 같은데.”
뒤를 따라오는 오민철이 대답했다.
복잡한 상가를 나와 군용물품을 파는 수레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슈욱!
꿈에도 공격이 들어올 줄 몰랐다.
움찔할 만큼 한기를 풍기는 칼이었는데 다급한 나머지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옷 보따리를 틀어막았다.
푸우우!
칼은 두꺼운 옷 보따리를 뚫고 옆구리까지 파고 든다.
하지만, 옷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을 통과하며 칼의 속도가 느려졌고 그 틈을 이용해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칼이 몸을 파고드는 불상사를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권악수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돈을 보내놓고 뒤에서 칠 이유가 없다.
물론 이쪽을 안심시켜놓고 칠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권악수를 겪어 봤을 때 거의 희박한 확률이다.
가슴속에 권총수에 대한 증오는 여전하겠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아니다.
권악수쪽이 아니라는 판단을 할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비닐 보따리 속에는 속옷과 청바지를 비롯한 여러 옷들이 가득하여 일반 칼질로는 절대 뚫고 들어올 수 없다.
옆구리 겉옷까지 칼 끝이 파고들 정도면 뒷골목 칼잡이들은 아니었다.
옷을 담은 보따리의 폭은 50센티 가까이 되는데 그것을 뚫을 정도면 평범한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을 넘어선 무엇이 느껴진다.
퍼뜩 생각나는 것은 하나.
등골이 서늘해진다.
강호무사.
남대문 시장에 강호 무사가 나타난 것이다.
“갈!”
권총수는 메고 있던 옷 보따리를 놓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번쩍!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노란 손바닥 하나가 검정 자켓을 입은 사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팍!
강호무사라는 사실에 내력이 실린 소림의 단금인은 사내의 얼굴을 수박깨듯 부서 버렸다.
이어 옷 보따리에 박힌 칼을 뽑아 빠르게 돌아섰다.
쏴아악!
달마삼검중 홍예살섬(紅藝殺閃)이란 검식이다.
달마삼검이 전반적으로 힘의 검이지만 홍예살섬은 기습과 속도에 최적화된 초식중 하나이다.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며 등 뒤에서 파고들던 사내의 검이 잘려나갔고 칼은 그대로 뎅강 목을 잘라버렸다.
“옴마야!”
“모...모가지가 떨어졌다.”
주위 상인들과 시장을 나온 사람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사람들이 피하면서 커다란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덟 명!’
왼쪽으로는 꽃상가로 올라가는 이층 계단이 있다.
그곳에 두 사내가 있고, 오른쪽 군용물품이 가득 쌓인 수레 뒤에 둘이다.
전방에 셋, 뒤로 한 명 더 있다.
다행스러운 건 가게가 밀집되어 있고 상인들 물건이 쌓여있어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많다는 것이다.
한 명을 놓고 여러 사람이 공격하기에는 아주 좋지 않은 환경이다.
강호무사라면 지형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도 무리수를 둔 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놀랍군. 이들에게서 소림의 대력금강심법의 기운이 풍기다니 설마’
공공선사는 대력금강심법이 사라졌고 소림의 위세는 급속히 약화되었다고 했다.
‘진짜 대력금강심법이다’
권총수는 전면에 서 있는 세 사내중 가운데에 인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눈에 우두머리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었다.
“소림의 제자들이 아니군. 제대로 된 소림인이라면 대사형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을 텐데?”
공공선사의 기명제자이기 때문에 누구도 권총수 보다 배분이 높을 수는 없다.
“쳐랏!”
슈우욱!
오른쪽 수레 뒤에 숨어 있던 두 사내가 들어온다.
한 명은 수레를 넘어 날아 머리를 노렸고 다른 한 명은 수레 바닥으로 빠져나가며 발목을 베려했다.
“터미네이터.”
수레 밑에서 액체마냥 흘러나와 사람으로 변해 공격하는 사내를 보고 건물 창문에서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놀란다.
스으으!
잠영술을 펼쳐 공격하던 사내가 다가왔을 때 권총수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졌다.
파파팍!
당황하며 재빨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사내를 향해 빗발치듯 몇 가닥 섬광이 터져 나왔다.
투투툭!
대나무가 쪼개지듯 정확하게 세 토막으로 갈라져 나뒹군다.
이어 머리를 공격한 사내의 장력을 이동하며 피했는데 불영보였다.
쉭!
물러난 몸이 조금전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을 찔러가는 사내의 목을 후려쳤다.
검과 칼은 다르다.
검법은 양날의 칼에 최적화 되어있고, 도법은 한쪽 날인 칼에 맞춰 탄생한 공격이다.
그렇다고 검법을 칼로 펼치지 못할 일 없고, 도법을 검으로 펼칠 수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위력이 원래의 병기로 시전하는 것보다는 약할 뿐이다.
싹둑!
그러나 권총수의 칼에서 뿜어 나오는 달마삼검은 조금도 모자라거나 약해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목이 잘려 군용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 위로 떨어진다.
“으허헉!”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레의 주인이 기겁한다.
잘린 머리가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수북하게 쌓인 군복 위에 떡 하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흘러내린 피가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옷을 적시자 버럭 소릴 질렀다.
“아오 씨발..젓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