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무너진 산(2)
축구를 해본 기억은 없다.
“해보지 않았어도 경기하는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라도 한두 번 봤을 테죠.”
권총수는 벤치 등받이에 상체를 대며 꼿꼿하게 세웠다.
“거친 플레이, 비 신사적인 행위를 하면 주심이 엘로우 카드를 꺼냅니다. 그건 경고죠. 한 번 더 이런 더러운 플레이를 하면 경기장에서 쫓아내겠다는.”
권악수의 어금니가 물린다.
왜 축구를 꺼내고 심판 얘기를 하는지 안다.
지난번 미술관에서 아내를 찾아간 건 경고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돈을 보내주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퇴장, 즉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였다.
“당신!”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막의 흑새를 대한민국 법으로 구속 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면 당신은 천하제일멍청이 입니다. 너무 염려되어 드리는 얘깁니다.”
“돈을 입금하겠소.”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지만 반가운 얘기군요.”
권총수는 병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권악수의 사인을 받은 경호원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어 망설이지 않고 발포를 했다.
타앙!
탕!
갑작스런 총소리에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고 일부는 재빨리 땅 바닥에 엎드렸다.
특등사수라도 움직이는 사람을 맞힌다는 건 쉽지 않다.
권총은 더욱 명중률이 떨어진다.
한때는 지휘관들이 권총을 휴대하는 것이 공격이 아닌 최악의 경우 자살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만큼 적중률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대테러 훈련을 하는 특수부대 요원들도 표적이 20미터 밖에 있고 거기다 움직인다면 맞히기가 쉽지 않다.
총기 전문가 권총수가 그걸 모르고 권악수를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더욱이 등봉조극에 막 들어선 내공이면 얼마든지 안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계산은 끝났다.
권악수가 어떤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대책없이 나타났을 리는 더욱 없는 것이다.
스스슷!
권총수의 몸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불영보가 펼쳐진 것이다.
경호원들의 총구는 어느 표적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 할지 몰라 허우적댔다.
‘모든 건 내 탓이오’
권악수 부하들이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는 것이 누구의 탓이 아닌 당신들 책임이라는 뜻이다.
즉 손에 온정을 베풀 이유가 없다.
권총수의 좌우 양손이 뭔가를 후려치듯 뻗어나갔다.
소림의 탄지신통이다.
비명도 없었다.
푸푸푸푹!
다섯 명의 경호원 모두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 권총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돈을 입금한다는 말에 참는거요’
권악수는 기겁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권총수는 없다.
그런데 귓가에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또 뭔가.
병원의 보안요원들이 달려나오고 신고가 된 듯 경찰차들이 경광등을 켜며 몰려들었다.
“저런!”
석상처럼 꼼짝 않던 경호원들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쓰러졌다.
보안요원들이 달려가 흔들고 깨워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고 맥과 심장을 살피더니 하나같이 소스라쳤다.
죽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된거죠?”
제복경관이 다가와 묻는다.
“죽었습니다.”
“머!”
제복경관은 쭈그리고 앉아 경호원의 맥을 살폈다.
그러더니 안색이 급변했다.
“어때?”
다급히 다른 경호원들을 살피는 동료 경찰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손으로 엑스(X)표를 만들었다.
죽었다는 뜻이다.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천왕그룹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다섯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요즘 왜 이렇게 걸핏하면 총이 나와.
우리나라가 총기소지가 허가된 나라야.
뉴스를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와 같이 중얼거렸다.
“뭔가 있어?”
서울역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속보를 보고 있던 두 명의 노숙자가 중얼거렸다.
“그게 뭔데?”
소주병을 들고 있는 동료가 반문하자 빵을 먹던 사내가 말했다.
“죽은 사람들이 권악수 경호원들이라잖아. 요즘 권씨들 굉장히 잘 죽는데, 조금 전에는 권악수 마누라가 죽었다고 뉴스 나왔잖아.”
“저 개새끼들 다 죽어야 돼. 우리를 내쫓고 잘먹고 잘 살 줄 알았냐. 자기들이 경영 잘못해서 회사가 어려워진건데 정리해고로 우릴 쫓아내면 어쩌자는 거냐고.”
두 노숙자는 흥분해 소리쳤고 사람들은 뉴스 속보에 냉랭하게 반응했다.
잘 죽었다.
한국경제의 20프로를 짊어지고 있다는 대기업이지만 그들이 걸어온 흔적은 온통 시궁창이다.
언론만 그들의 살아온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할 뿐 대중은 알고 있다.
사흘 후!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십억 달러라는 거액을 움직이려면 권철악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권철악의 결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놈이 제정신이냐?”
권철악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핏물이 흘러 나올 듯 눈동자가 빨개졌다.
“아무리 네놈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서진이와 마진이가 죽었다. 네놈이 사람이더냐?”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온 집만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뭐가 늦지 않았단 말이냐. 네놈 눈에는 정녕 늦지 않은 것으로 보이느냐?”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죠.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한심한 놈이.”
권철악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말을 못했다.
“아버님 노여워 마시고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더 이상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보는 앞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어떤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면 전 아마 미치고 말 것입니다.”
“닥쳐!”
권철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온 몸을 떨었다.
분노에 몸서리를 치는 것인데 권악수는 물러나지 않았다.
“다 죽습니다.”
“이 놈이 그래도.”
“살 놈은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 이 화근을 불러온 놈이 누구더냐? 네놈 아니냐? 주지도 않을 돈을 왜 준다고 거짓말을 하여 온 집안을 피로 물들였느냐?”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습니다.”
“뭣이 최선이란 말이냐?”
“십억 달러 결재 사인 오늘 안으로 해주셔야 합니다.”
권악수는 회장실을 걸어 나갔다.
쾅!
문이 세차게 닫히는데 권철악의 눈이 닫힌 문을 노려본다.
한동안 노려보던 권철악이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허허허!”
권철악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내가 헛살아 왔구나. 내가 헛살았어.”
권악수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알고 있다.
이제 자신 아니면 천왕그룹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
동생인 백서그룹 권철무 회장 아들 권왕수도 죽었고 자신의 친동생 권마수도 죽고 없다.
두 딸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딸들이 죽고 없는데 사위들에게 회사를 넘겨준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된다.
딸이 죽은 이상 그들은 남이다.
피할 곳 없이 사방이 막혔다는 걸 알고 저토록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딸칵!
회장실 문이 열렸다.
연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일제 밥솥을 몰래 수입해다 팔면서 천왕그룹의 기틀을 다졌단 창업 동기이며 친구인 이활병이었다.
“쯧쯧, 하고있는 꼬락서니 하곤.”
팔십 나이의 이활병은 머리에 사냥모자를 썻고 진청 싱글에 넥타이 없는 셔츠를 받쳐 있었다.
“부회장님 차 드릴까요?”
여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이란 직함은 없지만, 직원들 사이에서 이활병을 그냥 그렇게 부른다.
“시원한 물이나 한 잔 주게.”
“네 알겠습니다.”
여비서가 돌아나가고 이활병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왜?”
권철악이 금연구역이라는 듯 바라보자 덤비듯 눈을 부라렸다.
“죽어도 후회 없는 나이에 무슨 금연을.”
딸칵!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비서가 쟁반에 물 한 컵을 받쳐 들고 들어와 놓고 나갔다.
이활병은 냉수를 반 컵쯤 마시더니 정색했다.
“몰랐나?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않는가?”
권악수를 양자로 입양할 때 가장 가로막았던 인물이 이활병이었다.
이활병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나면 외관을 살피는 버릇이 있다.
이목구비가 좋으면 지혜가 가득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으로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막았다.
‘권악수의 오관(이목구비)에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있네. 바로 눈이지. 눈은 상대를 보고 살핀다하여 감찰관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세히 보게’
당시 두 사람은 권악수의 대학시절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삼각지목(三角之目)일세.”
“그게 어떻단 말인가?”
“독사의 머리가 삼각형이지, 거기에 눈은 매우 가늘고, 둥글면 부드러우나 각이지면 사납다네.”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조금 지나친 편이었지.”
“이 세상에서 모난 짐승치고 사납지 않은 것이 없어.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욕망지상(欲望之相)이지 그건 승부욕이 아니야.”
“사업가가 욕심 많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욕심이 뭐던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얻으려는 것 아니던가. 능력이 안되는 걸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겠나.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할 건 불문가지.”
이활병은 막았다.
오늘날 첨단과학 시대에 관상과 주역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무시 할 수도 없다며 신중을 기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말했다.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이라고 했네.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말아먹지는 않을 상이 한 명 있네.”
“누군가?”
“둘째 마진이일세.”
둘째 딸 권마진은 차분한 성격이 장점이다.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대한민국 재벌 순위 1위 기업을 이끌어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 가나의 어느 점술사가 빌 게이츠를 보고 뭐라고 한 줄 아는가? 3대의 집안을 말아 먹을 천박한 상이라고 했다네.”
그 한마디로 권철악은 이활병의 의견을 뭉개버렸다.
어디 자네가 보기에 빌게이츠가 말아먹고 있더냐 묻는 것이다.
“이제 어쩔 건가?”
이활병이 물었다.
권철악은 침묵했다.
“저 놈은 이제 자신이 칼자루를 잡았다는 걸 알고 있어. 자기 아니면 그 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걸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상대 하려는가?”
권철악은 대답하지 않고 잔뜩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권총수는 입금이 확인만 되면 언제든지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다시 시간이 흘렀는데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 놈이 줄 놈이냐고.”
오민철은 권악수 말을 믿은 권총수가 한심하다고 투덜거렸다.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권악수 전화번호였으므로 권총수는 재빨리 받았다.
“일이 꼬이는군. 십억 달러에 대한 결재가 떨어지지 않고 있소.”
그러면서 앞뒤 상황을 설명했다.
결론은 권철악이 막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오. 어떻게든 아버님을 설득해 볼테니.”
권총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전화를 끊었다.
권악수에 대해 이제 알만큼 알고 있다.
지금 음성에는 어떤 거짓도 담겨 있지 않은 듯 들린다.
그러나 권총수의 감각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또 다시 더러운 냄새가 난다.
권총수는 무슨 전화냐고 바라보는 오민철을 향해 권악수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오민철이 투덜 거리며 내일아침 자형 생신이어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며 택시를 타고 떠났다.
오민철과 헤어진 권총수는 어디론가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바쁘십니까? 물론 떠나기 전에 한 번 들릴 생각입니다. 그보다 사장님께 어려운 부탁 한 가지가 있습니다. 노우 라고 말해도 전혀 맘 상해하지 않을테니 편하게 들어 주십시오.”
권총수는 전화기에 대고 부탁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 말했다.
다음 날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권철악이 죽은 것이다.
모든 방송과 신문이 권철악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재계서열 1위 천왕그룹 총수의 죽음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을 만큼 강력한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