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67화 (367/651)

제367화: 무너진 산(1)

권총수는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채권 채무는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입니다. 전 은행이 아니죠.”

은행은 채무자가 갚지 못하면 담보를 제공한 사람에게 추심을 한다.

그래서 은행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이다.

권철태는 권총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식이 갚지 못하면 부모가 대신 지불하는 것도 우리 민법에서는 허용하네.”

“전 지금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어이 악수에게 받아야겠나?”

“예!”

권철태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더니 멈칫 했는데 오른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우웃! 이런!”

오른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권철태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호랑이 굴로 대책없이 들어서는 사람도 있습니까?”

권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권철태가 깜짝 놀란다.

“어떻게 당신들 집안은 하나같이 그 모양입니까? 그런 머리로 대한민국 재벌이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말 조심하게.”

권철태의 눈이 푸르게 번뜩인다.

무척 모욕을 느낀 모양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설치한 덫과 함정, 그리고 살인청부업자까지 보낸 모든 증거물이 내게 있습니다. 그러는데도 왜 내가 그 증거들을 경찰이나 검찰에 제출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권총수는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법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병은 싸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권총수는 마지막 남은 찻물까지 비웠다.

“다음에 만날 때 아드님은 돈을 주고 목숨을 유지하거나, 내 손에 죽든가 하나일겁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나왔다.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때에 돈을 갚지 못하면 이자가 복리로 발생한다는 건 아실 테고, 이제는 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권악수가 내 앞에서 잘못했다고 손금이 닳도록 빌어야 합니다.”

탁!

문이 닫혔다.

권철태는 화들짝 놀랐다.

오른손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찻잔을 잡았는데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팔을 돌리고 아래 위로 움직였는데 이상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학고재 주인 정미수가 들어섰는데 그녀의 표정이 환했다.

“누구에요. 너무 잘생겼는데요. 난 영화배우인줄 알았어요.”

“찻물이나 끓이게.”

정미수는 전기주전자의 스위치를 올렸다. 물은 금세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고 정미수는 다관에 물을 채워 넣었다.

“대통령님을 많이 닮았던데?”

“잘생겼다고 했나?”

“네, 정말입니다. 그냥 뱉어본 얘기가 아니에요. 요즘 아이돌 배우 있잖아요. 잘나가는 애 있는데 누구더라, 맞다 마빈 분위기도 나고.”

주르륵!

정미수는 권철태의 잔에 찻물을 부었다.

“자네 오래된 얘기 한 번 들어보려나?”

“뭔 얘긴데요. 듣고 싶어요.”

정미수는 눈을 빛냈다.

권철태는 옅은 분홍빛 찻물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정미수의 얼굴이 하얗다.

너무 놀란 듯 정미수는 한동안 눈도 깜박이지 않고 권철태를 바라보았다.

“허헛! 뭘 그렇게 바라보나 낯 뜨겁게.”

“정말입니까?”

믿어지지가 않는다.

“드라마군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러나 권철태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빠트렸다.

자신이 오설지란 여배우를 청부살인했다는 말은 뺐다.

그것만큼은 끝까지 감춰야 할 비밀이었다.

며칠 전 권악수가 술을 마시고 불쑥 집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오설지의 교통사고 혹시 아버지께서 사주한 것 아니냐며 따지듯 물었다.

권철태는 버럭 소릴 질러 권악수를 나무랐지만 이미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과거가 시궁창이면 그건 약점이 된다.

자식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역을 침탈하고 들어와도 함부로 내 치지 못하는 것이다.

정미수는 한 가지 꼭 던지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했다.

왜 오설지 아들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느냐는 것이었다.

한참 정치할 때는 정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대통령까지 지낸 지금은 호적에 사람 한 명 올린다고 해서 누가 따지거나 파고들지 않는다.

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주민등록에 대한 열람은 금지 되어 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권철태가 탄 승용차가 인사동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권철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마른 미소 한 조각이 걸려 있었다.

‘왜 호적에 올리지 않았느냐고?’

직접 묻지는 않았으나 정미수의 눈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정미수 생각처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왔으니 슬며시 호적에 올린다고 하여 문제될 것도 없다.

‘무서웠다’

그날 북악터널 근처에서 만났을 때 권총수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물 중반이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을 보육원에서 성장하도록 만든 인면수심의 아버지다.

경호원들이 있어 덤벼들지는 못했을지라도 욕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아니면 협박을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당신의 더러운 과거를 폭로하겠다면서 금품을 요구한다면 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고작 어떤 남자인지 가까이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는 말로 20여년의 한을 간단하게 청소해 버렸다.

‘승부사다’

인생의 판판이 승부다.

어느 한 판 승부 아닌 것이 없다.

현직 대통령의 뒤를 밟아 순식간에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기어이 대통령을 밖으로 불러 낼 정도의 배짱과 추진력을 지닌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권총수를 받아들이면 집안이 통째 그에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을 직감한 것이다.

그를 떠나보내고 며칠은 불편했다.

야망의 장애물이 되는 오설지는 죽었지만 어쨌든 아들이다.

국사에 바쁘고 살다보니 어느새 머릿속에서 잊혀졌고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얽혔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악수 회사로 가세.”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도록 했다.

방안에는 김부민을 포함해 세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세 여자 모두 재벌가의 며느리이고 경영자들이며 나이가 김부민 보다 좀 더 많아 보였다.

그러나 대화를 살펴보면 김부민이 오히려 편하게 말을 했고 세 여자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와 표정들이다.

재벌가도 회사규모에 따라 입김의 권위가 다르다.

천왕그룹은 시가총액에서 다른 2, 3위 그룹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크다.

김부민은 다가오는 성탄절을 기념해 야심차게 전시회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모네 작품전이다.

제목은 ‘모네, 빛을 그렸다’로 결정되었다.

이미 프랑스쪽 화랑들과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되었고 이들 셋을 부른 것은 그림 때문이다.

국내 재벌들의 예술품에 대한 욕심은 대단하다.

단순히 투자의 개념을 넘어 세계적 그림은 곧 그 집안의 문화적 수준과 일치된다는 의식 때문에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

천왕그룹 문화팀 통해 세 여자의 집안에 모네 그림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전시회 참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말이 참여이지 천왕그룹 차기 회장의 아내의 말을 거절 한다는 건 쉽지 않다.

세 여자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가진 그림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고 소장한 사실은 인정한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며 카트에 음식을 담아 온 여종업원이 나타났다.

네 명의 여자가 주문한 건 송이버섯 갈비탕이다.

여 종업원은 차례대로 뚝배기에 들어 있는 펄펄 끓는 탕을 여자들 앞에 조심스럽게 놓기 시작했다.

문득 김부민의 시선이 탕을 놓는 여종업원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손톱을 상당히 길었는데 시뻘건 매니큐어를 칠했다.

빨간색도 여러 가지가 있다.

로즈레드(Rose araed), 체리 핑크(Cherry Pink), 버밀리언(Vermilion), 카민(Carmine)등 다양했다.

로즈레드는 적사색으로 흔히 장미꽃색이라고 하고, 체리핑크는 화사한 자줏빛 계열이다.

버밀리언은 주황색으로도 부르는데 중국에서 시작된 색이며 카민은 암적색으로 조금 어둡다.

자신도 화려하고 정열적인 붉은 색 계통을 좋아해 매니큐어는 물론 의상도 화려한 색들이 적지 않았다.

오늘 입고 나온 투피스 역시 빨간색 중 하나인 코랄빛 바탕에 물방울이 박힌 컨셉이다.

그런데 유난히 종업원의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의 붉은 색이 유난히 붉다.

‘피’

김부민은 순간적으로 사람의 피를 떠올렸다.

적자색도 아니고 암적색도 아닌 그야말로 인간의 몸속을 흐르는 붉은 피라고 해도 이의제기 없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속으로 매니큐어에 저런 피 색깔이 있었나 생각할 때 자신 앞에도 뚝배기가 놓였다.

“맛있게 드세요.”

여 종업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바람이 분다.

송이버섯 갈비탕이 들어가고 채 30분도 되지 않는데 방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와당탕!

한옥 문살창으로 만들어진 여닫이문이 떨어져 나갈 듯 열리며 여자들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으악!”

“아아아 사람살려!”

여자들이 맨발로 도망치고 여자 종업원들이 달려왔다.

“왜 그러세요. 사모님!”

“죽었어요.”

“네?”

“사람이 죽었다구. 으아아아!.”

두 명의 여종업원은 재빨리 세 여자가 달려 나온 방으로 다가갔다.

“아흐허!”

여 종업원도 소스라친다.

“뭔데?”

정장을 한 남자 지배인이 재빨리 다가와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흠칫했다.

“이런 젠장!”

지배인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김부민은 자신이 먹던 탕 그릇에 얼굴을 쳐박고 있었다.

탕 그릇에 빠진 김부민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툭!

김부민은 힘없이 옆으로 나뒹굴 듯 넘어지고 말았다.

“어으!”

소란에 식당 사장까지 나타났는데 눈을 부릅떴다.

“뭣하나? 빨리 119불러.”

사장이 악을 썼다.

단골이면서 천왕그룹 권악수 사장의 부인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는 여자다.

지배인은 김부민을 눕히고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전개했다.

“훅훅훅!”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압박했지만 김부민은 숨을 쉬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지배인은 슬쩍 턱 아래 동맥을 살폈다.

손가락 두 개로 누르듯 하면 콩닥콩닥 뛰는데 느껴져야 하는데 조용했다.

아무리 살펴도 뛰는 걸 느낄 가 없다.

지배인은 이게 꿈인가 싶었다.

한국재계서열 1위 집안의 며느리가 갈비탕을 먹다 죽은 것이다.

경고를 받으면 신경을 써야 한다.

두 번째 경고는 퇴장이기 때문이다.

삶에서의 퇴장은 곧 죽는 것이다.

소식을 듣고 권악수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내 김부민은 이미 과학수사반 부검팀으로 넘겨진 뒤였다.

권악수는 병원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비서들도 사라졌고 경호원들만 멀리서 움직이고 있었다.

부들부들!

담배를 피우는 권악수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현관에서 흰색의 가운을 걸친 의사 한 명이 걸어나왔다.

경호원들은 권악수에게 다가가는 의사를 보며 말리지 않았는데 김부민과 관계된 일로 권악수에게 다가가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권악수는 다가오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천왕그룹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병원장을 포함한 고위 간부들은 알지만 수백 명이 되는 의사를 알 수는 없었다.

의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권악수 옆에 앉았다.

척!

권악수는 움찔했다.

의사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의자에 앉은 의사는 주머니에서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딸칵!

권악수는 의사를 살피듯 바라보았는데 병원의사라면 자신은 몰라도 상대가 몰라 볼 리는 없었다.

인사가 없다.

“사는 게 쉽지 않죠. 있는 놈은 있는 대로, 없는 놈은 없는 대로 하루 하루 고단합니다.”

“실례지만 어느과 선생님이신지?”

“궁금하세요?”

의사는 씨익 웃더니 후우하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살인과 권총수 닥터입니다.”

권악수는 얼어 버렸다.

얼굴은 전혀 권총수가 아니었다.

마흔 중반의 얼굴에 가르마를 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완전한 의사 행색이다.

“헙!”

뭘 본 듯 놀랐는데 가운 왼쪽 가슴에 ‘살인과 권총수’라는 이름이 진짜 새겨져 있었다.

“축구 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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