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안개 비(2)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극적인 대답을 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 합니다.”
권총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권서진도 따라 웃는데 어색했으나 한 가닥 희망을 보였다.
자신을 보며 웃었던 사람이 무자비한 살인자로 돌변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휘이이!
몽둥이가 떨어진다.
빠아악!
권서진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져 튀었다.
스르르!
털썩!
권서진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옆으로 쓰러졌다.
부들부들!
침대로 넘어진 권서진은 양팔과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죽기 싫다는 듯 뭔가 외치려고 했다.
입술이 달싹 거리고 오른 팔이 꿈틀 거린다.
음성은 나오지 않고 오른팔은 잠깐 꿈틀거리다 말았지만 누가 보아도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행동이었다.
빠아악!
또 한번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권서진의 머리가 사라져 버렸다.
뚝뚝!
몽둥이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권총수는 등을 돌렸다.
아직까지 용병의 목숨 값인 돈을 떼어 먹은 사람은 없다.
함께 전장을 헤쳐 간 동료들의 목숨 값이다.
누구도 떼어 먹을 수 없다.
신이라도 떼어먹는다면 각오해야 한다.
탁!
권총수는 문을 닫고 나왔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천왕백화점 사장 권서진이 자신의 침실에서 살해된 것이다.
현장에서 피 묻은 사각형의 책상다리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결정적인 범행 도구로 관측했다.
그동안 교통사고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변장한 킬러에게 살해당하는 등 연이은 권씨일가의 불행에 대중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 어디에서도 분명하고 속 시원한 보도를 내놓지 못했다.
천왕그룹에서 보도 자제를 강하게 요구했고 광고로 압박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일반언론이 거지 적선하듯 찔끔찔끔 보도를 하다마는 행태를 보이자 인터넷과 증권가 찌라시가 활개를 쳤다.
남녀를 불문하고 술좌석 안주로 씹히며 퍼져 나갔고 확인되지 않은 말들은 뻥 튀기가 되어 무차별한 가지를 뻗어 나갔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제 복수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한국 재벌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보복이다.
불법과 탈법, 치열한 노동 착취로 부를 일구었던 재벌들을 향해 피해자들의 복수가 시작 됐다는 것이다.
터질 것이 터졌다.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일들이다.
부패한 과거는 반드시 드러난다.
묘하게도 사람이 죽었지만 피해자들을 옹호하거나 감싸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동아신문에 업(業)이라는 제목의 칼럼 하나가 실렸다.
- 인과 응보라는 말이 있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도 말로 카르마(Karma業)라고도 한다.
업(業)은 인과업보(因果業報)의 줄인 말이다.
어떤 일을 행하여 돌아오는 결과를 우리는 흔히 업보라 부르는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업으로 살아간다.
상업, 농업, 공업, 건축 건설업, 교육은 교육사업, 병원은 의료업인 것이다.
우리가 일을 하는 걸 작업이라고 부르는데서 알 수 있듯 인간의 삶 자체가 업이고 세상은 업의 밭인 셈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업들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느냐에 있다.
나쁜 마음과 못 된말, 그릇된 행동으로 업을 행하면 그것이 악업이 되며, 바른 마음과 좋은 말, 착한 행동으로 주어진 업을 수행하면 그것은 곧 선업이 된다.
이는 곧 내가 이루어 낸 모든 것, 내가 처한 환경과 사회적 위치, 거머쥔 부와 권력 모두가 나의 업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다.
법과 도덕을 지켜가며 이루어 낸 업은 좋은 결과를 낳고 자손대대로 번영을 누리지만, 사람을 괴롭히고 누군가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쌓은 업은 불행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운명과 환경을 만든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끝남과 동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고 점차 성장하여 훗날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 인과업보의 요지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한다.
정말로 그럴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뿌린대로 거둔다.
선하게 뿌리면 선함으로 결과가 오고, 악함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면 반드시 그 댓가가 찾아온다 -
의도가 있는 칼럼 아니냐.
뭔가 메시지, 그중에서도 권씨 집안의 뒷모습이 깨끗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칼럼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응분의 댓가를 받는 것 아닌가 하는 따가운 메시지라고 했다.
칼럼을 쓴 사람은 사회부 장미윤 기자였다.
권총수는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민철의 누님 오민순의 집이었는데 작은 마당이 보이는 단독주택 거실에 앉아 밥을 먹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다.
이른바 집밥인 것이다
“총수씨, 많이 먹어.”
오민순은 살뜰하게 권총수를 챙겼다.
바지락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는 가족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씻어주었고, 아침에 바로 담근 배추 겉절이는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압력 밥솥으로 지어낸 흰 쌀밥의 찰기는 입안을 든든하게 채웠다.
마지막으로 나온 숭늉과 누룽지는 말 그대로 하이라이트였다.
“잘 먹었습니다. 누님.”
“더 먹어.”
“아닙니다. 배 좀 보십시오.”
권총수는 자신의 배를 탁탁 때리고 쓰다듬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권총수는 담배를 들고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대문 옆에는 아침 일찍 가게에 나가고 없는 오민철의 자형이 만들어 놓은 깡통 재떨이가 있었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물고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온통 어제 밤 자택에서 살해된 권서진에 대한 기사였다.
다섯 명의 경호원들까지 시체로 발견된 희대의 사건 앞에 경찰은 본청 수사과장 이무진 총경을 이번 사건 수사 지휘자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몇몇 기자들이 수사관계자들을 따라 붙으며 범인에 대해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철저히 침묵했다.
“식후연초는 불로장생이로다.”
오민철이 트림을 하며 담배를 물었다.
권총수 곁으로 다가와 뭘 보냐는 듯 고개를 내밀고 핸드폰을 바라본다.
탁!
권총수는 보던 핸드폰을 오민철에게 주고 정원석에 걸터앉았다.
“한심한 새끼들.”
오민철이 뉴스를 보며 말했다.
“총경급을 수사책임자로 임명하면 뭐하냐고, 이갑자의 내공을 가진 강호의 절정고수를 무슨 수로 잡아.”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다.
지이이잉!
그때 전화가 울리면서 번호가 찍혔다.
모르는 번호다.
“야 전화.”
“누군데?”
“모르는 번혼데, 010 3899 XXXX.”
순간 권총수가 야릇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넘겨받았다.
“여보세요.”
“권총수씨죠?”
“누구시죠?”
알면서 물었다.
“대검 강력부 김갑종 검사입니다.”
“웬일이시죠?”
“좀 만나고 싶은데 시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내가 권총수씨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나 검사님과 할 얘기 없습니다. 끊으시죠.”
권총수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친구, 권악수 대학 동창이라는 검사?”
“할애기가 있다네.”
“싸가지 없는 새끼, 지가 검사면 검사지 콱 HK416으로 조져 버릴라.”
오민철이 사격자세를 취했다.
권총수는 다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김갑종이다.
“그놈이야?”
스윽!
권총수는 통화 버튼을 느릿하게 터치하며 전화기를 귀에 댔다.
“뭐요?”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죠. 20분, 아니 10분이면 됩니다.”
“영장을 가지고 오세요. 검사님!”
다시 전화를 끊었다.
팍!
김갑종의 바꾼 지 며칠 되지 않은 핸드폰은 사무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개자식이.”
직원들이 놀라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상황을 보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뿌드득!
소리나게 이를 갈며 소릴 질렀다.
“쌥쌔꺄아아아.”
한참을 헐떡 거리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드르륵!
창문을 세차게 열어 젖혔다.
가라앉지 않은 화로 인해 김갑종의 숨이 거칠다.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 갔을 때 김갑종은 가슴에 맺힌 것을 털어 내듯 크게 숨을 쉬었다.
“우화아아!”
조금전 검경 합동 수사반으로 확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검찰 쪽에서는 자신이 책임자였다.
어제 밤 권서진의 집안 곳곳에 있는 CCTV를 봤으나 권총수의 모습은 단 한 커트도 찍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칠 노릇이다.
무려 여섯 명이 죽었지만 범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권총수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의심가는 장면이나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저질렀을 것이라는 확신 하나였다.
그가 아니면 권서진을 죽일 사람이 없었다.
며칠 전 권악수를 통해 놀라운 얘기 하나를 들었다.
그건 권총수에 대한 세상이 모르는 비밀스런 내용이었는데 결론은 권악수와 배다른 형제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어제 밤 사건의 범인은 더욱 분명해졌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박삼명 계장이 들어왔다.
“권총수는 지금 크리스탈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 들어온 이후 세 번째로 옮긴 숙소입니다.”
“차 대기해요.”
직접 만나야 한다.
아무런 용의점도 증거 하나 없이 구인 영장이나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간 오히려 판사한테 면박 당한다.
얼굴을 보고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김갑종은 사무실을 나가려다 박살난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썼다.
괜한 핸드폰만 박살냈다.
전화가 없으면 안 된다.
책상 위 전화로 단골 거래처에 핸드폰 하나 개통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시간 오민순의 집에서 아침을 잘 먹은 권총수가 인사동에 나타났다.
11시가 조금 못된 시간의 인사동은 평소보다 한가로운 편이었다.
골목으로 들어가 걸음을 세웠는데 오른쪽 한옥 집 처마에 ‘학고재’라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권총수는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조그만 연못이 있고 주위로 십여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오른쪽 방문이 열리며 서른 중후 반 정도 보이는 개량 한복 차림의 여자가 나왔다.
권총수는 여자가 나온 방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갔는데 권철태가 앉아 있었다.
먼저 온 권철태가 옷칠이 된 12각 찻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녹차향기가 방안 가득하다.
여자가 들어와 권총수 잔에 차를 한 잔 따르더니 일어나 방을 나갔다.
권총수는 녹차 한 모금을 마셨다.
권철태는 말이 없었다.
어떤 얘기도 하지 말고 차만 마시자는 듯 자신의 손으로 전기주전자 물을 끓이고 백자다관에 부으면서 계속 차를 우려냈다.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므로 권총수 역시 입을 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단지 들어오면서부터 입가에 미소 하나가 걸려 있었다.
화약 냄새였다.
일반인들의 후각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아주 가느다란 화약 냄새를 맡은 것이다.
권철태는 권총을 갖고 온 것이다.
권철태는 지금 갈등을 하고 있다.
쏘아 죽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어떤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늦었다.
방안에서, 이정도 짧은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았다면 아무리 속사에 뛰어난 사격선수라고 해도 소림의 금나수법 철룡수(鐵龍手)를 피하지 못한다.
“내가 돈을 주겠네. 계약서에 쓰인 다인코프 계좌로 넣으면 되는가?”
“대통령 각하께서 왜 돈을 넣으십니까? 나에게 돈을 줘야 할 사람은 아드님이십니다.”
“누가 주면 어떤가?”
부드럽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