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얼굴에 썬팅 한 사람들(1)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며 비서실 직원 한 명이 들어섰다.
“석간 인터넷판 동아신문 기사 한 번 보시죠.”
“뭔데요?”
권서진이 뾰족하게 물었다.
“그냥 전 대통령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권악수는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켰다.
포털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K의 잔인한 과거’
싸하다.
재빨리 뉴스를 클릭했고 읽기 시작했는데 영문이니셜로 신분을 감췄지만 K가 아버지 권철태 전 대통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 법적으로는 어떤 처벌도 불가능하지만, 도덕적인 처벌은 끝난 것이 아니라면서 O양의 죽음에 K의 적극 개입은 분명해 보인다.
O양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아들은 영원히 외롭다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 했다.
권악수는 곧바로 동아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어? 뭐야!”
놀란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두 번 세 번 했는데도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내용에 권악수는 버럭 소릴 질렀다.
“김 사장 이 개자식이 감히 내 전화를 씹어.”
거칠게 인터폰을 눌렀다.
“예 홍보이사 김선출입니다.”
“동아신문에 들어가는 모든 광고 끊으시오.”
“왜 갑자기.”
“끊으라면 끊지 말이 많아.”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장미윤이란 기자가 누구죠.”
그 사이 권서진도 핸드폰으로 검색하여 기사를 본 듯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당장 알아봐. 그년 모가지 안 자르면 천국장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라고 똑똑히 전해요.”
“누구냐?”
전화를 끊자 권철무가 물었다.
“동아신문 정치부장 하동칠입니다. 편집국장 천관성 모가지 조심하라고 그랬어요.”
권철무는 가만 눈을 감았다.
통제가 안 된다.
예전에는 권씨가문의 기사는 신문사 이전에 기자들 스스로가 지면에 옮기길 두려워했다.
‘이게 뭔가’
요즘은 걸핏하면 기사가 실린다.
심지어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업의 주력 사업까지 비판을 했다.
추진중인 해외사업도 지지부진하고 미래 사업 분야도 좀체 꽃을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적 내용들이다.
한 순간 동네북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으음!’
권철무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심해에서만 사는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했다.
대재앙의 징조인 것이다.
천왕그룹과 백서그룹에 대한 언론의 변화 또한 재앙의 징조일까.
다른 건 몰라도 언론 하나는 그동안 잘 다스려져 왔다.
광고라는 무기로 적절히 통제를 하며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는데 기사의 내용을 보면 이제는 보호철망을 빠져나가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간 모양새다.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신호다.
팟!
권철무는 뭔가 떠오른 듯 핸드폰을 꺼내더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화면을 내리고 다시 검색하기를 반복하더니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9월2일이면 벌써 두 달 보름 됐다’
당시 한참 엔터프라이즈호 선원 구출로 온 나라가 천왕그룹을 칭찬할 때 찬물을 끼얹는 기사하나가 나왔다.
비록 종이신문이 아닌 인터넷 신문 기사였지만 당황할 만한 내용이었다.
‘천왕중공업 관계자는 한 번도 납치범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인질 구출이라는 거센 열풍에 묻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상당히 가슴 뜨끔한 기사였다.
이후부터 선박 납치 후 정부만 인접국가인 사우디, 아랍에미레이트, 이집트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했을 뿐 회사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놈이 9월 1일날 입국했다고 했느냐? 권총수란 놈 말이다.”
“그런데요?”
“아니다!”
권철무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때 이미 권총수는 인터넷 기사를 통해 경고를 보낸 것이다.
빨리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허나 이제는 늦었다.
전쟁은 일어났고 별수 없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악수야.”
“예 숙부님!”
“흥분하지 마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우리도 창구를 단일화하여 널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 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구나.”
권철무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실내는 둘만 남았다.
“좋은 생각 있니?”
권서진이 묻는다.
“누님은?”
“아침에 그 놈이 왔다 갔어.”
“그놈? 누가요?”
“권총수가 우리 집에.”
“네엣?”
권악수 눈이 커졌다.
나타나면 시체가 발생하는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있느냐는 의문까지 든다.
권서진은 아침에 있었던 얘길 자세히 말해 주었다.
“아니 그래서 가만 놔뒀어. 블랙박스에 찍혔을 것 아냐. 그것 어딨어. 그것만 있으면 끝나.”
빨리 달라는 표정이다.
권서진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없어. 얼굴도 없고 목소리도 녹화되지 않았어.”
“블랙박스가 돌아가고 있었다면서?”
“눈을 씻고 찾아도 왔다 간 흔적이 없어. 믿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그게 말이 돼? 귀신 아닌 다음에야. 귀신도 카메라에는 찍힌다던데.”
“그러게 말이야.”
권서진이 백을 들고 일어서며 물었다.
“장난 아니다. 내가 뭘 하면 되니?”
“내가 알아서 해.”
권악수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보냈다.
거리에는 많은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21세기에 돌아온 낭만주의 거장들’ 이란 커다란 현수막이 미술관 건물을 한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시되는 대 행사로 평일이지만 전시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은 많지만 실내는 조용했다.
권총수는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화가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과 나직한 소리로 감상평을 나눈다.
불현듯 저 인간들이 뭘 알아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괜히 수준 높은 척 하려고 쇼하는 걸까.
어떻게 설명도 없는 그림을 보고 작가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그림에 관해서는 시작도 모르고 끝은 더욱 알지 못하는 백지다.
필요에 의해 왔지만 답답할 뿐이었다.
어쨌든 권총수는 스페인 출신 낭만주의 화가 고야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림 밑에 그림 제목이 쓰여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림의 얼굴이 진짜 모습이라면 더럽게 못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네 명의 여자들이 자화상을 보겠다는 듯 옆으로 다가왔다.
5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얼굴을 덮은 형형색색의 화장과 튀어나온 배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패션은 오늘을 위해 상당히 꾸민 듯 보인다.
미리 인터넷 검색을 했을까.
아니면 미대출신이나 되는 걸까.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주고 받은 의견이 꼭 인터뷰 하는 전문가들 같다.
어린 시절 인사동 어귀에 있는 미술관으로 단체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가기 전 보육원 선생님들은 절대 떠들거나 뛰어다니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찌나 단단한 교육을 받았는지 한 사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걸을 때도 까치걸음까지 했었다.
특히 요주의 인물로 찍힌 권총수 곁에는 원장수녀가 붙어 다녔다.
권총수는 옛날을 떠올리다 나오는 하품을 재빨리 손바닥으로 막았다.
‘해도 너무 조용하군’
다른 사람 감상에 방해가 되므로 조용히 한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닥치고 보는 일만이 능사일까 하며 은근슬쩍 소리를 꽥 지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주로 미술관 큐레이터가 앉아 있는 책상 오른쪽으로 흰색 벽과 동일한 문이 있었다.
권총수는 그 문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때마침 큐레이터는 저쪽에서 두 명의 여자 손님을 상대로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스윽!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무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안쪽 소파에 세 사람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왼쪽에 앉은 여자는 이곳 ‘일해 미술관장’김부민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여자는 김부민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대학 동창인 듯 싶었다.
“악!”
커피를 마시던 두 명의 친구 중 신미리가 소스라쳤다.
권총수가 소리소문 없이 김부민의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마얏!‘
신미리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주향림 역시 커피를 자신의 옷에 쏟으며 놀랐다.
왜 그러는데 하며 뒤로 고개를 돌린 김부민 역시 소스라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부민의 반응은 앞의 두 친구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얼굴이 돌덩이가 되었고 한참동안 고개를 돌린 채 권총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표정이었다.
“손님이 계시군요.”
권총수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사...사...살!”
살려 주세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권총수는 김부민 옆에 앉았다.
앞에 놓인 김부민의 핸드폰을 들더니 번호 하나를 눌렀다.
신호가 네 번 울리고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의야. 바빠!”
권악수는 용건만 말하라고 했다.
슥!
권총수는 갑자기 영상통화로 화면을 돌렸다.
“당신 뭐하는 거야?”
갑자기 영상이 뜨자 권악수는 화를 냈다.
씨익!
권총수는 김부민과 뺨을 비빌 듯 하며 화면을 보았다.
“어헛!”
기겁하는 권악수를 보며 웃던 권총수는 신미리에게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이 여자 죽어가는 모습이 현장감 있게 찍히도록 핸드폰 잘 세우십시오.”
부르르!
죽는다는 말에 신미리가 몸을 떨었다.
“안되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앉아 제대로 찍으세요.”
신미리는 주춤거리며 건너와 김부민 오른쪽으로 앉았다.
그제야 화면이 제대로 잡혔다.
“저런 미친 놈.”
권악수의 눈이 커졌다.
착!
권총수는 양손으로 김부민의 뺨을 잡았다.
“잘 보세요. 남편의 얼굴을 빤듯하게 바라보면 됩니다.”
김부민은 목에 힘을 주었지만 권총수가 꼼짝 못 하게 붙잡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핸드폰 속의 권악수를 바라보았다.
“집 사람 건들면 너 죽을 줄 알아. 당장 안 놔.”
“사모님 막지막으로 한 말씀 남기시죠. 이제 남편과 영영 이별하게 될텐데.”
“야 권총수 씹새끼야. 집 사람 가만 두지 못해. 야 시팔 개새키야.”
“사랑한다고 한 마디 안 하십니까? 내가 없어도 미국에 있는 아이들 잘 키워달라는 유언도 괜찮을 것 같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김부민은 눈물을 흘렸다.
“여보, 괜찮아. 울지 마. 저 놈은 내 손에 죽게 되어 있어. 야아 쌍놈의 새끼야.”
“준영이 아빠. 우리 준영이!”
화악!
권총수가 김부민의 목을 돌렸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울렸고 권총수는 천천히 김부민을 옆으로 뉘였다.
김부민은 죽은 듯 꼼짝 하지 않았으며 앞에 앉아 있던 신미리와 주향림은 사색이 되어 오돌오돌 떨기만 할 뿐이다.
“여보, 여보!”
전화기를 그대로 둔 채 권총수는 사무실을 나갔다.
응급실을 걸어 나온 권악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내 김부민은 검사결과 잠시 기절 했을 뿐 어느 곳도 상처 입거나 다친 곳이 없다고 했다.
“음!”
주위에 정장을 한 사내들이 사방을 살피고 있었는데 모두 경호원들이다.
분명 목이 부러지는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고 아내는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잠시 기절했을 뿐 전혀 다친 곳이 없다는 의사의 말은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