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반격(2)
다시 한 번 화면을 돌렸으나 역시 없다.
‘뭐야 이거’
대낮에 사람을 반 죽여 놓고 나갔는데 들어온 흔적이 없다.
권악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고봉석 본사 보안팀장은 나극주 만큼은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지만 권총수가 보여준 그간의 행적을 본다면 솔직히 두려운 상대였다.
항상 가스총을 무장하고 만약을 대비해 칼까지 차고 다니지만 상관이자 노련한 싸움꾼 최준구가 일방적으로 얻어 맞아 죽었다는 것이 너무 놀라울 뿐이었다.
고봉석은 담배도 피울 겸 사무실을 나와 뒤쪽 공원으로 걸어갔다.
대낮의 공원은 텅 비었다.
한쪽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불 좀 빌립시다.”
고봉석은 흘긋 사내를 돌아 본 뒤 아랫주머니에 들어 있는 라이터를 꺼내 주었다.
딸칵!
사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맙소.”
그러더니 사내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고봉석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고봉석은 불편한 시선으로 사내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무릎 위에 양 팔꿈치를 올린 채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앉았다.
입에 물린 담배를 보았는데 국산이 아닌 말보로 레드이다.
“단풍도 이제 막바지입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단풍구경 한 번 가야 하는데.”
사내의 말에 고봉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눈에 거슬린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져다 놓은 벤치도 아닌데 다른 곳에 앉으라고 할 수는 없다.
“단풍 구경 다녀왔습니까?”
고봉석의 이마가 더욱 좁혀졌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냐.
단풍구경은 아재 아짐들이나 다니는 거지 촌스럽기는 하며 속으로 흉을 보았으나 말은 다르게 했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 없다는 것 모두 거짓말입니다. 나 같으면 엽총으로 애먼 사람 쏘느니 그 시간에 단풍구경 가겠습니다.”
홰액!
고봉석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사람 한 명 잡기는 정말 좋은 날씨군.”
고봉석의 안색이 굳었다.
노골적으로 죽음 운운하는 것이 분명 자신이 엽총을 쐈던 권총수란 사내가 틀림없다.
그런데 얼굴이 다르다.
“누...누구?”
우연히 뱉어낸 말일지도 모르므로 물었다.
“승냥이라고 아시죠? 인도 들개라고 하는 아주 붉은 개 말입니다. 늑대보다는 조금 작지만 온 몸의 털이 시뻘겋다 보니 붉은 이리라고도 부릅니다.”
승냥이를 왜 모르랴.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가장 좋아 하는 것이 동물의 왕국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인도 들소를 공격하여 잡아먹는 장면을 보며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집요하고 끈질기면서 교활하기까지 하며 호랑이도 그들 무리 앞을 지날 때면 조용히 앞만 보고 걸었다.
호랑이에게 덤비지는 않았지만 승냥이들 역시도 피할 생각이 없는 듯 지켜보기만 했다.
“승냥이의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복수심입니다. 승냥이 사냥꾼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룰이 있습니다. 뭔지 말해 드릴까요?”
고봉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모르게 사내의 얘기 속에 깊이 빠져 든 것이다.
“한 번 표적 삼은 승냥이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죠. 방아쇠를 잘못 당겨 죽이지 못하고 부상만 입혔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은 인도 농부들이 적지 않다는 군요.”
무언가 느끼는 게 있는 듯 고봉석이 소리친다.
“당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 고봉석의 안색이 변했다.
상체를 숙이고 앉아 있던 사내가 허리를 곧게 폈다.
“삭초제근(削草除根)이란 말이 있소. 적을 죽일 때는 후일 복수가 찾아 올 수 없도록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한다. 강호식이라면 당신 마누라와 아이들까지 모조리 정리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차마 그렇게는 하지 않겠소. 고맙게 생각하시오.”
벌떡!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고봉석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고봉석은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푹!
빳빳하게 날을 세운 권총수의 오른손이 고봉석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끙!
트림을 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고봉석은 잠깐 몸을 떨었고 이내 조용해졌다.
경문혈(京門穴)은 치명적인 사혈이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을 걸어 사라졌다.
고봉석이 멀지도 않은 건물 뒤에 있는 공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나극주는 몸서리를 쳤다.
‘아 씨이.’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몸이 떨린다.
‘자수하여 광명찾자’
자수하라는 의미였다.
자수를 한다면 자신은 당시 배후까지 모두 밝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직장에서 쫓겨난다.
나극주는 권악수의 비서로 현재 만족도 200퍼센트다.
주위 사람들도 눈치가 빠르고 계산이 능숙하여 비서로는 제격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대로 뻗어나가면 권악수의 측근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재벌 회장의 측근이 된다는 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성공을 의미한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 심남천과 다릅니다.”
심남천을 대신해 새로 온 유두석이 목에 힘을 주었다.
심남천 보다 체격조건이 앞서고 군 특수부대 출신이기까지 하여 든든하긴 하다.
“제가 있는 한 누구도 나 비서님을 건들지 못합니다. 건드는 순간 죽는 거죠.”
여유있는 웃음에 나극주는 한숨 놓았다.
빈말이라도 듣기에 좋았다.
지하 주차장에 벤츠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정장의 사내가 내렸는데 고개를 들어 천장과 벽을 바라보았다.
주차장에서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내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끈 것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30분 전부터 병원 내 외 주차장까지 완전히 껐습니다.”
CCTV를 껐다는 말에 사내는 다소 안도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쨍!
엘리베이터는 건물 3층에서 멈췄다.
사내는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왼쪽으로 꺾어져 한참을 걸어가자 맞은편에 ‘김황신 성형외과’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내는 성형외과의 닫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입구에 앉아 있던 창구의 여직원이 벌떡 일어나 목례를 했고 사내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직원은 사내를 안쪽 깊숙한 방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사내가 안내된 방은 벽 쪽으로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고 일인용 침대도 보였다.
“옷 갈아 입으시죠.”
사내는 안쪽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풍성한 잠옷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원장님 금방 오실 거에요.”
여직원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사내는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어와 피곤하다.”
양팔을 좌우로 크게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2013년 1월 15일 새벽이었다.
강남의 유명 모 피부과 의사 K씨가 안방에서 사망했다.
조사결과 외부의 침입 흔적도 없고 자살을 기도한 증거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침대에서 발견된 건 주사기 한 개와 작은 약병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의 팔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적지 않았다.
2019년 4월 20일 대히트를 기록했던 주말 드라마 ‘달빛과 달님’의 주연을 맡아 열연했던 배우 H씨가 마약류 투약한 혐의로 구속됐다.
배우 H씨는 배우로써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저지른 실수였다고 사과했지만 법원은 그녀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때렸다.
그러나 그녀의 일탈은 시작에 불과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H씨와 같은 마약류를 정기적으로 투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대체 그 약이 뭐냐는 것에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약은 다름 아닌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이었다.
하얀 색깔로 인해 ‘우유주사’로도 불리는 프로포폴은 원기회복에 좋고 식욕을 저하시켜 다이어트 효과도 있다고 알려지면서 유흥업소 여자들과 연예인, 나아가 재벌2세들까지 은밀하게 투약을 해 온 것으로 알려 졌다.
2009년 6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으로 지목된 이 약은, 흔히 수면내시경 시술 때 주로 주사하는 마취약이다
장점은 마취가 빠르고 마취에서 회복되는 시간도 짧다는 점이었다.
프로포폴로 마취하면 보통 3분에서 8분 만에 끼어난다.
또한 간에서 대사 되는 속도가 빨라 소변으로 금세 빠져 나온다.
즉 몸에 남지 않는 것이다.
프로포폴이 주는 최대 각성효과는 만족과 도취감이다.
문제는 수면 마취제이기 때문에 맞으면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황홀하고 만족스런 도취감을 느끼려고 마취되지 않을 만큼만,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만 맞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프로포폴을 맞다 보면 어느 순간 중독을 피하지 못하면서 서서히 무너진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들어왔다.
원장 김황식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내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습니다.”
“빌어먹을.”
“불편한 일 있나보죠?”
“이것 저것 골이 너무 아픕니다. 이왕 주실거면 빨리 넘겨줄 일이지.”
“회사요?”
“걸핏하면 너에게 자리가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지 않나. 더러워서.”
사내 이름은 권왕수였다.
백서그룹 권철무 회장의 아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약파티 혐의로 미국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국내 언론에 큼지막하게 보도 되었다.
그건 시작이었다.
그의 마약 사고는 계속 반복되었고 권철무는 어쩔 수 없이 국내로 데리고 들어왔다.
하지만 귀국 6개월도 되지 못해 그는 은밀하게 한 병원을 찾아왔다.
마약의 유혹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덜컹!
의사는 서랍의 문을 열더니 우윳빛 약병 한 개를 꺼내 주사기로 옮겼다.
흘긋!
돌연 의사가 침대 위 권왕수를 바라보았는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의사는 서랍에서 약병 한 개를 더 꺼내 또다시 약을 주입했다.
주사기에는 두 병의 흰색 액체가 채워졌고 의사는 권왕수 오른쪽 팔뚝에 바늘을 꽂았다.
의사는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누름 대를 지그시 눌렀다.
주사기에 가득 채워졌던 프로포폴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권왕수의 팔뚝으로 들어갔다.
“편히 쉬십시오.”
의사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방을 나왔다.
여직원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대략 주사를 맞고 3,40분 정도면 몸을 털고 일어난다.
그런데 지금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권왕수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툭!
책상 위 인터폰을 눌렀다.
“원장님, 권왕수 사장님 아직 안 나오는데 어떡하죠.”
“권왕수 사장님 오셨어?”
“네? 아까 오셨잖아요? 오늘 예약 잡혀 있었구요.”
“나도 아는데 아직 오시지 않아서 무슨 일 있나 하고 기다리는 참이야.”
“원장님께서 직접 주사까지 놔드리고 나오셨잖아요.”
“해진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주사를 놨다는 거야.”
잠시 후 안쪽 원장실 문이 열리고 김황식 원장이 나타났다.
마흔 중반 정도 되어 보인 김황식은 여직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지금 오셨어?”
“VIP방에 계시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이야?!”
김황식은 복도를 걸어갔다.
바쁜 걸음으로 걸어간 김황식은 닫힌 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침대 위에 권왕수가 잠을 자듯 누워 있었다.
“사장님 언제 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