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전열정비(1)
신호가 울리자마자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포커를 즐겨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딥니까? 번호를 보니 한국에 오신 모양이군요?”
“태양병원입니다. 바쁘지 않으면 잠시 뵙죠.”
“지금 바로 갑니다.”
채명천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20분 만에 병실에 나타났다.
“사장님!”
깁스를 하고 있는 권총수를 보며 크게 놀랐다.
권총수는 오민철로 하여금 침대를 세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침대가 세워지며 상체를 일으킨 권총수가 빙그레 웃었다.
“아주 좋습니다.”
“도대체가.”
채명천은 눈만 깜빡 거렸다.
곁에 있던 마낙춘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채명천의 표정이 굳었다.
권총수의 능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권악수 또한 만만치 않다.
“거기 종이에 적힌 사람들 가족사항과 주변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조사 좀 해주십시오.”
오민철로부터 건네받은 쪽지를 읽은 채명천은 권총수를 보며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염려가 된다는 뜻이었다.
권총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생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그저 아찔할 뿐이다.
“그럼 나 먼저 가보겠습니다.”
채명천이 손을 들어 보이고 병실을 나갔다.
주말이어서 인지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마다 차량들로 가득 했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통나무로 지어진 2층짜리 별장이 있었다.
집을 빙 둘러 3미터 가까운 높이로 쌓아 올린 화강암 담벼락과 그 위로 가시가 달린 윤형철조망이 쳐져 있고 검정 페인트를 칠한 대문은 굳게 잠겨 있다.
실내에는 원탁을 놓고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권악수를 비롯해 아버지 권철태와 권철악의 큰 딸 권서진 백서그룹 회장 권철무와 아들 권왕수, 딸 권혜림이었다.
권철악은 딸 권마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지금 병원에 누워 있다.
각자 앞에 녹차가 놓여 있었지만 마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병원부터 뒤지는 게 순서 아니겠냐?”
백서그룹 회장 권철무가 침묵을 깼다.
“지금 뒤지고 있습니다. 총상 환자이기 때문에 일반 병원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권악수 얼굴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찾아내면?”
“현장에서 사살될 것입니다.”
“어떻게?”
권서진이 묻는다.
“일단 사살을 한 뒤 체포에 저항을 하여 어쩔 수 없다는 기사를 낼 생각이죠.”
“하긴 검찰에서 그러면 그런 줄 알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 놈이 마진이와 헤림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보느냐? 교통사고 아닌 것이 틀림없느냔 얘기다?”
권철무의 눈이 빛났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경찰이 차량 정밀 조사를 했고, 심지어 벤츠 본사에서까지 기술자들이 입국해 살폈지만 정비 부실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고 했다.
결국 교통사고가 맞다는 뜻이다.
단지 의심스러운 건 운전기사 조덕봉의 말이었다.
핸들이 잠긴 듯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한 번에 돌지 않으므로 더욱 힘을 내서 트는 순간 잠긴 핸들이 쉽게 돌아갔고 그 바람에 길가 가로수를 받은 것이다.
“형님 왜 아무말씀이 없으십니까?”
권철무가 바로 위 형님인 권철태를 바라보았다.
권철태는 아침에 이곳에 도착하고서부터 일체 말이 없었다.
“십억 달러를...”
“돈 얘긴 그만 하세요. 이제는 주고 싶어도 늦었습니다.”
권악수가 권철태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이제 죽고 죽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놈이 죽느냐 내가 죽느냐?”
지이잉!
전화울림에 모든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권서진이 핸드폰을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청와대에서도 상당히 불쾌한 모양이더라.”
권철무가 말했다.
“당연하겠죠. 범인이 하고많은 사람 놔두고 정무수석으로 변장을 했으니.”
“왜 정무수석으로 변장을 했다고 생각 하느냐?”
“일반 사람은 들어올 수가 없죠. 문상객을 가족 말고는 일체 받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가져왔다는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영리한 놈이군.”
권철무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인 권혜림을 바라보았다.
“경호원들은 어찌 됐니?”
“다섯 명 더 채용했어요.”
국내 최고의 보안회사 천왕 케이 원이 있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는 신변경호 전문가들이어야 한다.
“하나 같이 특수부대 출신인데다 각종 무술 유단자들이에요. 내 걱정은 할 것 없어요.”
내 걱정 말고 아버지나 신경 쓰라는 얘기였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권서진이 들어왔다.
모두가 무슨 전화였냐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회사 전화에요.”
그 한마디를 뱉고 자리에 앉았다.
토론은 이어졌다.
더 이상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경호를 강화하고 낯선이의 접근을 경계하기로 했다.
잠깐의 외출이더라도 귀찮겠지만 꼭 경호원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의견이 나왔는데 권서진이었다.
“권총을 준비했어요. 출처는 묻지 말아주세요. 내일 오전 10시에 정릉 사격장으로 갈거에요.”
“정릉사격장, 정릉에 사격장이 있단 말이냐?”
“아무튼 9시 30분까지 조계사 앞으로 모이세요. 조계사 앞에 도착하면 우릴 태우고 갈 밴이 있습니다. 타면 됩니다.”
“서진아 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우리가 사격연습을 하다니?”
권철태가 물었다.
“내일 오시면 알게 될거에요. 난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어요.”
권서진은 핸드백을 메고 방을 나갔다.
“나도 가봐야 해요.”
이어 권혜림이 자리를 비웠고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남은 사람은 권철태와 권악수 둘 뿐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권철태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별장이다.
정치할 때 중요한 결정이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면 항상 이곳을 찾아와 밤을 세고 참모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멈출 수 없다는 얘기다. 전쟁은 일어나야 하지 않겠지만 일단 붙으면 오로지 공격 말고는 필요 없는 법이다.”
정치는 전쟁이었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양측은 서로자제하고 절제하지만 한번 터지면 그때는 난장판이 되든 아수라장이 되든 상관없다.
국민이 무슨 말을 하든, 언론에서 뭐라고 떠들던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작든 크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명심해라.”
“그놈입니까?”
권철태 역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권악수가 물었다.
“그놈이라니?”
“그놈이 오설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난 새끼냐구요.”
“난 너와 마수 말고는 자식을 둔 적이 없다.”
쾅!
현관문이 세차게 닫히며 사라졌다.
권악수는 닫힌 문을 보며 중얼 거렸다.
‘당연히 나와 죽은 마수 말고는 자식이 없어야지요. 내 손으로 시체를 만들어 한강물에 담가 드리겠습니다.’
권악수는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뭐니 뭐니 해도 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은 없다.
돈이면 다되는 것이다.
운기조식이 끝났다.
창백하던 안색은 대추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내상이 거의 완치 되었다는 걸 의미했는데 권총수는 왼쪽 무릎의 깁스를 바라보았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며 담당 간호사가 들어섰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깁스를 풀어야겠습니다.”
“네에?!”
간호사는 소스라쳤다.
깁스를 한지 이제 겨우 사흘 됐는데 풀겠다는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바라본다.
“권총수 환자님!”
“내 무릎은 정상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보여 드리죠.”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침대 밑으로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
“악!”
간호사는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이라는 듯 미리 비명을 질렀으나 권총수는 걸리적 거리는 깁스로 인해 약간 기우뚱 거릴 뿐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뛰어볼까요?”
타타타탁!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양발로 뛰는 데는 이상이 없다.
“잠깐만요?”
간호사는 기겁하며 밖으로 나갔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깁스를 했던 석고반 직원이 들어섰다.
“깁스를 풀어달라고 했다면서요?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담당의사 선생님의 사인이 있어야 합니다.”
“담당 의사를 불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대머리 의사가 들어섰다.
서 있는 권총수를 보며 깜짝 놀란다.
의사는 믿을 수 없다면서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 보자고 했고 권총수는 흔쾌히 응했다.
“맙소사!”
엑스레이 상으로 완전했다.
뼈가 제대로 잘 붙은 것이다.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사가 석고담당 직원에게 깁스해체를 지시했다.
예상한 대로 사흘만에 다리 부상은 나았다.
그리고 퇴원준비가 한창일 때 채명천이 나타났는데 세 사람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면서 서류 봉투를 내 밀었다.
서류 봉투 속에 담긴 자료들을 대충 훑어 본 권총수는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채명천은 씨익 웃었다.
그때 오민철이 들어왔다.
“병원비 계산 끝, 가자.”
권총수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고 간단한 소지품이 담긴 가방은 오민철이 짊어졌다.
그 시각 인천공항에서 일본항공(JAL)소속의 여객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비행기가 멈추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가장 맨 뒤에 내렸다.
짙은 푸른색 싱글에 무늬없는 붉은색 넥타이를 했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입국장을 걸어나온 사내는 마치 정해진 길을 걷듯 망설임 없이 청사를 나가 택시승강장으로 향했다.
일반 택시를 놔두고 모범을 선택하는 걸 보면 한국 사정에 제법 익숙해져 있는 듯 보였다.
부우웅!
택시가 공항을 출발했다.
기사가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하얏트 호텔 갑시다.”
다소 서툴긴 했지만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의 한국어였다.
기사는 단번에 일본인이라는 걸 알고 빙긋 웃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사내는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를 하는 것이 택시기사의 귀에 들려온다. 외국 손님을 태운 경험이 많아 일어 영어 중국어 간단한 의사 소통은 된다.
택시 기사가 들어보니 사내는 부산에 있는 사사키라는 동료에게 몇 시차로 올라올 예정이냐고 묻고 있었다.
한참 웃으며 통화를 끝낸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계사 앞에 25인승 버스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사복차림을 한 권씨 일가들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버스 문이 열렸다.
유리창은 짙게 선팅이 되어 실내는 물론 승차자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권악수가 나타나 올라타자 버스는 시동을 걸고 종로 쪽을 향해 나가더니 우회전 하여 광화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계사 앞을 떠난지 20여분 만에 북악산 뒷자락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온통 산이었는데 멀리 북한산 보현봉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평창동 어딘가 싶다.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북악터널 쪽 같은데.”
권혜림이 중얼 거렸다.
사격장이다.
그런데 권총사격장이 아니라 야외에 있는 30미터 자동화기 사격장이었다.
청와대 경호실 소유의 사격장이다.
사람들이 주변을 기웃 거리고 있을 때 오솔길을 따라 정장을 한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나타났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는데 하나같이 체격들이 다부지고 표정들은 근엄했다.
그 뒤로 전투복을 한 비무장 군인 두 명이 국방색 나무상자 한 개를 들고 따른다.
군인들은 상자를 놓고 돌아갔다.
권서진이 한 사내에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