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1)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저와 적지 않은 옷깃을 스치고 있으니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하겠습니다. 아드님께 전해주십시오. 사람 죽는 것 생각보다 쉽습니다.”
눈이 차갑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등골이 서늘하다.
‘살기라는 것이구나’
말로만 듣던 살기가 틀림없다고 보았다.
야수보다 차갑고 잔혹하며 으스스한 두려움이 온 몸을 기어간다.
정글 못지 않은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었으나 아직까지 저토록 무서운 눈빛은 보지 못했다.
꿈틀!
갑자기 권총수는 온 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신체가 위험을 감지하고 피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쏴아아아!
권총수의 양팔이 쭉 뻗어나가면서 열 손가락에서 새빨간 섬광이 일어났다.
소림의 탄지신통이다.
절정에 오르면 무쇠도 뚫고 들어가는 가공할 지력이었다.
“큭!”
“으윽!”
숲속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경호원들이 휴대하고 있던 권총을 뽑으려다 권총수의 감각에 걸려든 것이었다.
검을 휴대만 하고 있을 때와 뽑았을 때의 몸의 반응은 다르다.
권총 역시도 같았다.
경호원들이 권총을 갖고 있을 때는 몸이 긴장하는 선에서 끝나지만 뽑으면 공격신호로 받아 들인다.
“이런!”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태섭이 눈을 부릅떴다.
네 명의 경호원 모두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경호원들의 손은 모두가 왼쪽 옆구리 근처에 멈춰 있었는데 그건 홀스터의 권총을 뽑으려 했음을 알 수 있는 자세였다.
그런데 권총은 뽑지 못한 채 손이 시뻘건 피로 덮였다.
탄지신통이 경호원들의 손바닥을 뚫어 버린 것이다.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평생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할 거요.”
권총수의 싸늘한 말이 흐를 때였다. 경호원 중 다른 한 명이 왼손으로 홀스터에 꽂힌 권총을 뽑아 들었다.
“갈!”
권총수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싸아악!
뭔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을 뽑은 경호원이 산이 떠내려 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 내손!”
왼손이 손목에서부터 깨끗하게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관음청강수를 장력으로 전환하여 날렸고 예리한 칼날에 잘리듯 손목이 절단된 것이다.
“뭣 하는가? 어서 119를 부르게. 아니지 당장 차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가게.”
윤태섭이 재빨리 경호원들을 향해 말했다.
“뭣들해요. 어서 갑시다. 서둘러요.”
누구보다도 정신무장이 잘되어 있는 경호원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자칫 병신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공원 아래 주차되어 있는 차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닥!
경호원들이 차를 타고 떠났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실망하신 모양인데 제가 누굽니까? 원치 않았지만 권씨 집안의 피를 조금 이어받다 보니 당신들의 속성을 아는 편이죠. 뒤통수 치는 것에 관해서는 달인급 아니겠습니까?”
권철태가 이럴 줄 알았다는 뜻이었다.
“헛헛!”
권철태는 웃었다.
그러나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싹 마른 웃음이다.
너무 어이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경호원들의 권총이 이토록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권철태는 말보로 레드를 깊숙하게 빨아들이고 있는 권총수는 바라보았다.
권악수는 아들이다.
형님에게 양자로 보냈지만 그는 친 자식이며 지금도 그를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누구 못지않았다.
내 아들을 살리느냐 한 번도 같이 앉아 밥 숟가락 한 번 들어보지 않은 남보다 더 못한 권총수를 택하느냐.
그건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당연히 권총수다.
“십억 달러를 보내자고 한 내 말은 진심이었네. 하지만 녀석이 도저히 줄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 이 방법이었네. 자넨 아직 자식을 길러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부모는 자식 대신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죽겠다는 얘깁...”
말을 하다말고 권총수는 멈췄다.
권철태의 손에 한 자루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경호원 하나 없는 이 순간에 권총을 뽑아 들다니.
권총은 베레타 92로 15발들이 박스탄창을 사용하는 아담한 권총이다.
둘의 거리는 10미터.
소총보다 관통력이 약한 권총이라고는 하지만 10미터에서 쏜 총알을 호신강기가 막을 수 있을까.
어렵다.
호신강기로 인해 충격은 줄어들겠지만 몸속으로 파고드는 건 충분할 것이다.
스으으으!
방법은 하나뿐이다.
총알보다 더 빠를 수는 없겠지만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려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권총수는 준비자세가 필요한 신법 보다는 예비동작 없이 순간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불영보를 펼쳤다.
타아앙!
총성이 울렸다.
권총수는 휘청하면서 재빨리 바위를 찾아 몸을 날렸다.
탕탕!
2탄도 맞았고 3탄은 권총수가 숨은 바위에 맞췄다.
“음!”
다행히 총알이 몸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불영보를 극성으로 펼쳐 뒤로 물러나는 시도가 효과가 있었다.
강한 충격이 전달 됐으며 살갗을 뚫고 들어오긴 했으나 장기를 건드릴 정도로 깊숙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 총알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혔고 세 번째는 살갗과 호신강기에 막혔다.
탄창이 가득 채워졌다면 12발이 남았다.
내상이 얕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권총수는 발 아래 있는 아이 주먹만한 돌멩이 두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내공을 끌어 올렸는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소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한 발 한 발 느리게 다가왔지만 권총수의 청각을 속이지는 못했다.
휘익!
바위 너머로 두 개의 돌멩이를 던졌다.
적엽비화 수법이다.
퍼억!
타앙!
권철태는 머리에 돌멩이를 맞는 순간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그렇게 발사된 총알은 절대 사람을 맞추지 못한다.
권총수는 바위 뒤에서 걸어 나왔다.
권철태는 권총을 떨어뜨린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깨진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가 물처럼 흘러나오는 것이 상처가 깊어 보였다.
권총수는 떨어진 권총을 주워들었다.
툭!
탄창을 꺼내 실탄을 눌러보자 조금 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15발 가득 채운 모양이다.
탁!
다시 탄창을 끼운 권총수는 권철태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권철태를 내려보던 권총수가 총을 겨누었다.
권철태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한참을 겨누고 있던 권총수는 휙 권총을 던져 버렸다.
“난 당신에게 분명히 약속했소. 과거의 일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정치 생명을 끊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는데.”
이럴 수 있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권총수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빌어먹을’
지금은 때가 아니다.
모든 살인에는 순서가 있다.
아직은 권철태 차례가 아니었다.
피가 얼굴을 덮어 버렸다.
권철태는 꼼짝하지 않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몇 걸음 걷다 돌아서서 떨어진 권총을 회수했다.
이마로 피를 흘린 채 차로 걸어갔다.
운전사까지 모두 윤태섭의 차로 병원을 갔으므로 자신이 직접 핸들을 잡았다.
그 역시 목적지는 병원이었다.
배웅대는 곤혹스런 표정을 했다.
베테랑 사회부 기자답게 장미윤의 질문은 집요했고 예리했다.
“얘기 좀 해주시죠? 언제까지 과거사가 덮어질 것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여기 보다시피 당시 오설지씨와 권철태 국회의원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기사가 가끔씩 실렸어요.”
장미윤은 당시 동아신문의 기사를 복사해와 내밀었다.
배웅대는 신문기사를 보고 있었지만 읽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장미윤의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 이 자리를 빠져나갈 것인지 궁리중인 것이었다.
“상무님, 퇴직한 저희 회사 편집국장님을 며칠 전에 찾아뵀어요. 그분께서는 오설지의 임신설이 꾸준히 흘러 다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사막의 흑새 권총수라는 사람 말이에요. 한국에 부모 형제라고는 없던데?”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의 고리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배웅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줄 얘기는 없습니다.”
“권총수씨가 오설지씨 아들 아닌가요? 이름도 권씨 집안 사람들과 같은 수자돌림이구요. 권악수 권마수 권총수, 어울리지 않나요?”
“장기자님,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권총수씨 연락처 알고 계시죠? 그것도 어려운가요?”
그때 배웅대는 멈칫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보더니 움찔하며 장미윤의 눈치를 살폈다.
“잠깐 실례 하겠습니다.”
배웅대는 재빨리 커피숍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미윤은 뭔가 감을 잡은 듯 뒤를 따라갔는데 배웅대는 호텔 로비 한쪽에서 목소리를 죽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장미윤은 잠시 서서 바라보더니 조용히 다가갔다.
“그게 사실입니까?”
배웅대 목소리가 커졌다.
“알겠습니다. 내가 곧 가겠습니다.”
배웅대는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가 등 뒤에 서 있는 장미윤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누구죠? 권총수씨죠?”
배웅대는 소스라쳤다.
단번에 찌르듯 짚어 버리자 자신도 모르게 놀란 것이다.
“어디죠? 무슨 일 생겼군요?”
“난 가보겠습니다.”
배웅대는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 나갔다.
배웅대를 바라보던 장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장미윤이 아니지.”
장미윤 역시 재빨리 배웅대를 뒤따라갔다.
경찰차들이 도착해 있고 공원입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벤츠 한 대가 오더니 멈췄고 권악수가 내렸다.
공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전경이 가로막자 권악수가 인상을 썼다.
“나 권악수요.”
“비켜 드려.”
그때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사복 형사 한 명이 다가왔다.
마흔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권악수를 향해 깍듯하게 허릴 숙였다.
“본청 강력계 이동세 팀장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권악수의 질문에 이동세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신고자는 근처 마을 주민이었는데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119로 들어왔다.
“범인은 누굽니까?”
그때 근처를 수색하던 형사 한 명이 다가왔다.
“팀장님 탄피입니다.”
형사의 손에는 4개의 탄피가 있었다.
“베레타 같은데? 경호원들 베레타 쓰지?”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알아봐.”
사라지는 형사를 바라본 뒤 이동세는 말을 이었다.
“아직 범인의 윤곽을 알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찾은 건 없습니다. 잠시후 병원에 계신 권철태 전 대통령님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 가장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동세 팀장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아직 연락을 받지 못한 모양인데.”
무슨 연락이냐는 듯 권악수를 바라보았다.
바로그때 이동세가 핸드폰을 받았다.
“예 과장님!”
갑자기 통화하던 이동세의 표정이 변하더니 알겠다면서 핸드폰을 내렸다.
굳은 얼굴로 권악수를 한 번 보더니 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철수!”
“네? 갑자기 웬 철수입니까?”
“나도 몰라, 철수들 해.”
그리고 권악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어갔다.
그때 봉고차 한 대가 멈추더니 뒷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사내들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