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독촉(1)
십억이라는 돈도 중요하지만 이번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면 앞으로 천왕그룹으로부터 많은 일거리가 생길 것이다.
안정적이고 파워넘치는 기업과 일을 한다는 건 회사 미래를 봐서라도 흥분될 일이다.
삐잉!
인터폰이 울린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조무종은 멈칫하며 오늘 스케줄을 살폈다.
저녁을 약속한 사람은 있으나 회사로 불러들인 사람은 없었다.
“커피로그인 영업총괄본부장 최성용씨라고 합니다.”
조무종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서 모셔요.”
커피로그인은 미국의 스타봉스를 제외하고는 국내 커피 프렌차이 브랜드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얼마 전부터 후발주자인 커피앤커피의 거센 추격을 받으면서 국내제일의 커피 브랜드라는 명예를 잃게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바야흐로 이제는 커피도 향과 맛의 시대다.
어떤 커피가 진하고 향이 앞서는지에 따라 소비자의 선호도가 분명히 갈리는 것이다.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닥거리며 마시는 분위기용 음료가 아닌 것이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걸 보면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스르르!
문이 열리고 마흔 중반 가량의 정장을 한 사내가 들어섰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여성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사진으로는 봤었다.
“죄송합니다. 굉장한 결례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떤 꾸중도 달게 받겠습니다.”
영업총괄본부장 다운 행동이다.
연락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하다는 뜻인데 오늘의 커피로그인이란 브랜드를 일궈내는데 큰 역할을 한 최성용이다.
현재의 대표이사는 최성용의 친형이며 자신이 대표 자리에 올라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절대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성용은 자신은 현장을 누비겠다며 자리를 고사했다.
“꾸중이라뇨. 난 그저 기쁘기만 할 뿐입니다. 앉으십시오.”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고 문이 열리며 여직원이 커피 두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여직원은 최성용에게 고개를 꾸벅한 뒤 방을 나갔다.
최성용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는데 눈을 빛냈다.
“맞습니다. 커피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블루 마운틴 커피는 역시 차이를 보입니다.”
블루 마운틴 커피를 들여오기 위해 다각도로 손을 쓰고 뛰었지만 실패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조무종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단 1킬로그램도 메가탄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유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조무종이 자메이카 커피 유통을 독점하는 갱 조직 ‘야시와 파시’에 접촉하여 그들과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야시와 파시는 멕시코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역사 깊은 갱단이다.
“사무실이 좋습니다. 생각보다 넓고.”
커피 잔을 내린 최성용이 고개를 돌려 사무실을 살폈다.
멈칫!
조무종의 눈이 빛났다.
뭐랄까 최성용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진중함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저거 진짜 같은데, 맞죠?”
최성용은 사무실 한 곳에 놓여진 커다란 백자 항아리를 가리켰다.
“저런 항아리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던데 뭐라더라.”
“달 항아리입니다.”
“맞습니다. 달 항아리라고 부르더군요. 저 정도 크기면 가격이 꽤 나가죠?”
“조금!”
“사무실에 저런 달항아리를 놓고 감상하고 계시다니 우아하고 아름다운 취향이십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몇 번 봤지만 실물은 처음입니다.”
조무종의 얼굴이 처음과 완전히 바뀌었다.
불쑥 찾아왔고 정중한 사과까지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이 크고 좋다느니 백자를 보며 우아한 취미라는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얘기들을 쏟아낸다.
자신은 메가탄이라는 회사의 대표이다.
또한 국제JP파라는 폭력조직의 우두머리이며 양지 사업을 하지만 수사기관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
언제든지 사고를 칠 수 있는 위험인물로 분류해 놓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바닥에서 커피 숟가락 뜨는 동업자인 만큼 진짜든 아니든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말은 한두 번 정도 들었을 것이다.
정식으로 제의를 해온 건 아니지만 커피로그인에서 메가탄 커피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메가탄에서 들여오는 블루 마운틴 커피를 사용하고 싶다는 사업적 제안을 하기 위해 찾아 왔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가볍다.
진지한 대화를 갖기 위해 온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으음!”
조무종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주 가느다란 냉기가 목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음으로 된 백지장 보다 얇은 칼날이 스윽 목을 스치는 것 같은 기분에 온 몸을 떨었다.
‘젠장!’
속으로 불편한 심기를 달래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쨌든 커피 문제로 왔을 것이다.
뚝!
최성용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반듯한 시선으로 조무종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가 너무 빤히 쳐다보았으므로 조무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얼마 전에 권마수가 죽었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무종이 움직였다.
재빨리 탁자 서랍을 열어 비상시를 위해 넣어둔 회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회칼을 보면서도 최성용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서랍에 회칼을 숨겨 놓고 사업을 하신다니 매우 신선한 아이디어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칼로 해결하나 봅니다?”
“최성용씨는 아닐테고, 설마 기동술 청와대 정무수석?”
권마수는 기동술로 변장한 사내에게 당했다.
즉 그 기동술이 지금 최성용으로 변장하여 나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성용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까지 손을 뻗은 최성용의 동작은 누가봐도 그 칼 이리 내놔 하는 것이었다.
조무종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조무종은 번개처럼 최성용, 즉 권총수의 손목을 내리쳤다.
회칼은 바람 없는 천장에 매단 실 한 올을 베며 그 예리함을 시험한다.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힘 있는 동작이었다.
휘익!
칼을 휘두르는 각도가 크지 않았으나 손목 스냅을 최대한 주었기에 순간적인 파괴력은 크다.
탁!
조무종은 권총수의 손목을 잘랐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조무종의 눈이 커졌다.
으헉!
권총수가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자신의 회칼을 거머쥐고 있었다.
너무 놀라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다 이내 재빨리 칼 자루를 틀었다.
권총수의 손바닥을 칼로 난장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는데 멈칫했다.
꾹!
꾸우욱!
죽을힘을 다해 돌려도 칼은 꼼짝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지금쯤 붉은 피가 탁자위로 흥건하게 흘러내려야 하는데 핏물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권총수 얼굴 또한 고통으로 찡그리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쓰으윽!
손아귀에 쥐어진 칼이 빠져나가고 있다.
권총수가 칼날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조무종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손아귀에 모든 힘을 쏟았지만 칼은 조금씩 조무종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툭!
끝내 칼을 빼앗기고 말았다.
콱!
피할 틈도 없었다.
권총수의 왼손이 어느새 조무종의 왼 손목을 거머쥐었다.
싸악!
하는 소리가 들리며 팔꿈치 근처가 연탄불에 데인 듯 뜨겁다.
툭!
뭔가 탁자 위로 떨어지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조무종은 기겁했다.
“허꺼억!”
자신의 손목이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시계까지 차고 있는 손목은 한동안 여러 형태로 움직였다.
손목에서는 피가 쏟아졌고 조무종은 비명을 지르며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강기로 차단하여 외부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권총수는 잘린 조무종의 손목을 들고 말했다.
“권악수에게 얼마 받았습니까?”
움찔!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실패다.
그런데 갑자기 의혹이 생겼다.
권총수가 여기 왔다는 건 추성철이 데리고 간 별동대가 뭉개졌다는 뜻이다.
“설마?”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것이다.
권총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몇 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사지가 잘리거나 찢겨져 평생 불편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전화가 없어 불안했다.
그런데 이렇게 참혹한 결과가 나타난 것에 조무종은 어금니를 물었다.
“십억 받았소.”
손목 한 개 잘린 것이 어쩌면 복일지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회칼을 손바닥에 쥐고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 같지 않은 상대에게는 무조건 굴복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어떤 잔꾀도 오히려 화를 북돋을 뿐이다.
“그는 당신을 죽이라고 했소. 물론 성공했을 때 십억을 더 지불하겠다는 언질도 받았죠.”
“날 무난히 죽일 것이라고 즐거웠겠군.”
조무종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사실이라는 뜻이며 또한 당신에게 더 이상 거역하거나 저항하지 않겠다는 항복이기도 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오야붕 답게 당신은 말이 통하는군.”
더 이상 당신을 닦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권총수는 한쪽에 있는 신문을 펼치더니 조무종의 잘린 손목을 둘둘 감아 쌌다.
자신의 손목을 신문지에 싸는 권총수를 보며 조무종은 당황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잘린 신체 부위의 접합수술 성공률은 떨어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을 모르므로 권총수가 떠나면 잘린 손목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저...!”
내 손목 돌려 달라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권총수는 태연히 신문지에 싼 조무종의 손목을 들고 문을 열고 사라졌다.
권철태가 회사를 깜짝 방문했다.
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권악수는 놀란 얼굴로 들어서는 권철태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목이 칼칼하구나. 냉수 한 컵 다오.”
권악수는 한쪽에 있는 정수기로 다가가 머그컵에 냉수를 가득 담아 소파에 앉아 있는 권철태 앞에 놓았다.
벌컥벌컥!
맞은편에 앉아 단숨에 물을 비우는 권철태를 바라보는 권악수는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문 밖 출입만 해도 기자들이 달라붙는다.
또한 경호원들이 따르기 때문에 상대를 무척 복잡하고 피곤하게 하므로 가급적 외출을 자제한다.
“아침에 뭘 드셨습니까?”
뭘 먹었기에 그렇게 냉수를 허겁지겁 마시느냐는 질문이었는데 권철태가 탁자 서랍을 열었다.
“왜요? 뭣 찾으세요.”
“담배 없냐?”
“아버지!”
권철태는 담배를 끊었다.
“담배 있으면 한 개 다오.”
“갑자기 무슨 담배를?”
“하나만 줘.”
권악수는 주머니에서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내밀었다.
“불은 안줘?”
권악수는 라이터를 주었고 권철태는 불을 켜서 담배에 붙였다.
흐우우!
담배연기를 빨아 내 뿜던 권철태가 휘청했다.
오랜만에 피운 담배인 탓에 머리가 띵 한 모양이었다.
대마를 흡연하는 사람처럼 몽롱한 시선으로 맞은편에 앉은 권악수를 바라보던 권철태가 입을 열었다.
“악수야.”
권악수는 권철태를 마주 바라보았다.
“돈 줬느냐?”
“돈을 주다뇨?”
“십억 달러?”
피식!
권악수가 얄팍하게 웃었다.
“아버지!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줘라.”
권철태는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