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맨 헌터(3)
도망치거나 다친 척 꾀병을 부리다 몰래 뒤에서 덮치는 사내들을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오케이!”
고개를 끄덕이는 오민철의 목소리가 다부지다.
“시작하자!”
선두의 사내가 차갑게 외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회칼을 든 열 명의 사내들이 권총수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권총수는 달려오는 사내들을 보며 뒤로 슬쩍 한 걸음 물러나는 듯싶더니 벼락 같이 파고들어 선두 사내를 향해 짧게 쳤다.
물러나는 행동을 보여 마음을 놓고 있던 선두 사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파고들어 갈기자 피할 방법이 없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막기 위해 칼을 들어 올렸다.
싹!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듯하더니 팔꿈치가 잘려졌다.
취익!
권총수는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뿌리치듯 칼을 휘둘렀다.
칼은 다가서던 좌측 사내의 앞가슴을 깊숙하게 베고 지나갔다.
촤아아!
사내의 앞가슴 옷자락이 잘려나가며 붉은 피가 흰 와이셔츠를 적셨다.
부우웅!
정면과 오른쪽에서 재차 두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러자 권총수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권총수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사내의 칼이 발아래를 지나갔다.
빙글!
권총수의 몸이 한 바퀴 도는 듯 하더니 거꾸로 바뀌었다.
낙하수연(落下水燕).
허공을 날던 제비가 수면에 있는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유래한 동작이다.
쫘아아!
한 칼, 즉 한 동작이었다.
크아악!
욱!
외마디 비명이 산을 울린다.
두 사내 중 한 명은 목이 잘려나갔고 다른 한 명은 등에 커다란 칼자국을 남기며 엎어졌다.
사사삭!
기세 좋게 달려들던 사내들이 일제히 뒤로 후퇴를 했다.
모두가 당황하는 얼굴들이다.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상대 해왔던 찌르면 피를 흘리고 때리면 아파서 비명을 흘리던 라이벌 조직원들과 차원이 다르다.
사람이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거꾸로 내려온다.
또한 동료의 목을 잘라 버렸는데도 놀라거나 충격 따위는 전혀 받지 않아 보였다.
오랫동안 살인을 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저토록 덤덤할 수는 없다.
쓰아아!
불영보가 펼쳐졌다.
사내들의 공격이 주춤하자 이번에는 권총수가 나섰다.
“엇!”
“어어어!”
모두가 놀란다.
권총수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나타나며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여기 번쩍 저기 번쩍이다.
그리고 한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목을 적신다.
푸욱!
싸아악!
칼이 지나가자 목이 떨어지고 다리가 잘려 나갔다.
취릿!
칼이 빙글 도는 듯 하더니 왼쪽 소나무를 등지고 있는 사내를 파고들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피하려는데 옆구리가 뜨끔했다.
허어억!
사내는 재빨리 옆구리를 감싸다 내려다보았는데 두 눈이 커졌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물처럼 흘러나오더니 잠시 후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자신의 장기중 하나인 간이었다.
간이 베어진 옆구리를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투툭!
사내는 몇 번 몸을 떨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숲에 정적이 흐른다.
뚝뚝!
권총수의 손에 쥔 칼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남은 사내들은 우두머리를 포함해 다섯이다.
스으으!
권총수가 다시 다가갔다.
쏴!
쏴사사사!
사내들은 칼을 휘둘렀다.
권총수를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라 살고 싶어 나오는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촤촤촤!
한 자루 섬광이 수평으로 지나갔다
‘검이 바람을 일으켜 청소한다’ 검하풍소(劍下風掃)
달마삼검 속에 있는 초식의 일부이다.
네 명의 사내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눈동자가 움직이고 미약하지만 분명 숨을 쉬고 있었는데 어느 한 순간 주르륵 하며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툭!
왼쪽 첫 번째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투투툭!
이어 도미노처럼 나머지 세 사내의 목이 지면을 뒹굴더니 뒤이어 육중한 몸통이 쓰러졌다.
우두머리 사내 추성철의 안색은 허옇게 탈색 되어버렸다.
얼마나 놀라고 있으면 얼굴의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흰색의 분을 발라 놓은 듯 보인다.
쓰윽!
싸아악!
권총수는 죽은 사내의 앞가슴에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었는데 전달 받지 못했나 보죠?”
권총수는 깨끗하게 닦으며 말했다.
“축구를 좋아 했죠. 그래서 시설을 나오자마자 터를 잡은 동네 조기축구에 가입했소. 여름 날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감나무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즐겨 마셨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단순했고 행복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가, 그 시절이 생각나 잠시 들려봤는데 웬 처음보는 친구가 칼을 휘두르더군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처음이니까 살려는 드린다고,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짓 말라고.”
추성철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 사내는 지금 목이 잘려 죽었다.
권총수는 피가 제대로 닦였는지 칼날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어디십니까?”
추성철이 침묵하자 오민철이 버럭 소릴 질렀다.
“어이 아저씨, 어디서 왔냐고 내 동생이 묻잖아. 당신들 소속 있잖아. 무슨 파, 역전파, 부두파 이런 것 말이야?”
대답 대신 추성철은 칼자루를 세게 잡았다.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다가왔는데 권총수는 눈을 좁혔다.
추성철은 자신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공격 하려는 것이 아니다.
죽여 달라고 달려들고 있다.
많은 동생들이 죽었는데 혼자 살아 돌아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무라이처럼 자결은 더욱 자기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니 선택은 한 가지 뿐이다.
싸우다 죽는 것이다.
권총수는 다가오는 추성철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형, 우리 바닥에 떠도는 속담이 뭐가 있죠?”
갑작스런 질문에 오민철은 움찔하더니 말했다.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저 새끼 것.”
촤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총수의 칼이 불규칙한 섬광을 피워냈다.
소나기 오는 날 나타나는 번개와 비슷했는데 달려들던 추성철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멈췄다.
투투투!
걸치고 있는 상의가 완전히 걸레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안에 입은 셔츠까지 완전히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떨어진다.
순식간에 상체를 드러낸 추성철은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었다.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옷만 산산조각이 되어 버린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권총수가 손을 뻗자 오민철은 들고 있던 자신의 몽둥이를 건네주었다.
권총수는 몽둥이를 대충 살피더니 사정없이 휘둘렀다.
빠악!
추성철은 본능처럼 피하려고 했지만 몽둥이가 너무 빨랐다.
눈앞으로 커다란 별 하나가 둥실 나타나더니 이어 수십 개로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따악!
또다시 강한 타격이 머리에 가해지고 휘청하면서 추성철은 주저앉아 버렸다.
추성철은 어지러운 듯 옆의 소나무를 붙잡았다.
권총수는 가까이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전장에서 내 모가지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와 싸우는 적의 것이죠. 전리품 또한 내 맘대로 하는 겁니다.”
추성철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하는 것 보다는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정신은 흔들거렸고 눈앞으로는 여전히 별들이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더를 내린 사람이 누구요? 사단장이 총 들고 전장에 나설 리는 없고.”
두목이 누구냐.
두목이 칼을 잡고 직접 현장에 나타날 리는 없다.
빡!
뻐바바박!
빨래를 두들기는 방망이처럼 추성철의 몸을 내리쳤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온 몸을 덮었지만 죽지 않았다.
사혈을 피해 고통만 가중되는 부위를 가격하기 때문이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대신 팔 다리 하나씩만 자를 생각입니다.”
추성철의 눈빛이 흔들린다.
전문가다.
단순한 깡패 따위가 아니다.
전혀 서두르는 것도 없고 사람을 죽이는데도 망설임이나 두려움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냥 용병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이 정도일 것이라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특히 밑의 동생들을 죽이는 칼은 중국 영화 속에서나 보는 그런 것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추성철은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가 길게 내 뿜었다.
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표정 없는 시선으로 추성철의 말을 듣고 있었다.
권총수가 떠나갔다.
11명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넷이었다.
반항한번 못해 보고 죽은 동생들을 보며 추성철은 눈을 감았다.
그의 칼은 화려했다.
경쟁 조직의 두목을 젖히고, 조직을 추적하는 형사반장을 차로 밀어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국제JP파를 수사하던 대검 강력부장까지 휴가 중인 제주도에서 숨통을 끊었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고 추적당하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건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토록 많은 동생들이 동원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쓰러져 있다.
이건 차라리 학살이다.
“끄아아아!”
추성철은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소릴 질렀다.
“으아아아아 우욱!”
울분 가득한 외침에 목에서 피가 넘어왔다.
“형님!”
왼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간 후배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광필아!”
추성철의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형님!”
푸어억!
추성철은 갖고 있던 칼을 자신의 목에 박아버렸다.
“형님, 형님!”
광필이 부축해 흔들었으나 목뒤까지 삐져나온 칼은 추성철의 목숨을 빠르게 점령해버렸다.
국제JP파 두목 조무종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건달세계는 바뀌었다.
옛날처럼 유흥가를 상대로 갈취하거나 보호비 명목으로 푼돈을 뜯어내는 시대는 오래전 지났다.
이제는 각자 도생이다.
모두가 양성적인 사업, 세금을 내는 합법적인 일터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한다.
그러다 어느 한곳에 문제가 생기면 일제히 조직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형태로 운영된다.
조무종의 직함은 주식회사 메가탄 대표이사이다.
메가탄은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루왁커피와 북중미 자메이카 블루산맥에서 생산되는 커피를 국내에 독점 공급한다.
루왁(Luwak)커피는 인도네시아어로 커피를 뜻하는 코피와 긴 꼬리 사향고양이를 의미하는 루왁이 결합한 이름이다.
동남아, 주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 서식하는 사향고양이가 커피 열매를 먹고 난 뒤 배설한 씨앗을 햇빛에 말려 볶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커피다.
사향고양이는 가장 잘 익은 커피 열매만을 따먹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화 과정을 거치면서 원두의 쓴맛과 떫은맛이 사라지고 특유의 맛과 향만 남는다.
누군가는 루왁 커피의 향을 다이아몬드의 광채에 비교했다.
블루 마운틴 커피는 자메이카에서 가장 긴 블루 산맥에서 나는 커피다.
고산 지대의 습하고 시원한 공기로 인해 토양이 비옥하다.
블루마운틴 커피는 쓴맛이 없는 부드러운 향미로 유명한데,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의 대부분을 조무종의 회사 ‘메가톤’이 단독으로 들여온다.
독점은 횡포를 낳는데 그중 첫 번째가 가격이다.
다른 기업들이 블루 마운틴 커피를 수입하기 위해 자메이카를 부지런히 드나들었지만 실패했다.
메가톤에서 블루마운틴 커피 생산협회를 돈으로 발라 버린 것이다.
그야 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다.
조무종은 자꾸 시계를 봤는데 약간 초조한 얼굴이었다.
이미 은퇴한 후배를 불러내 이번 일을 부탁했는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