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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38화 (338/651)

제338화: 생사판관(1)

권철태는 앉아 있는 권악수를 내려다보았다.

“불행은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응보(應報)라고 했다. 아비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권철태는 몸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지만 권악수는 꼼짝하지 않았다.

질근!

권악수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금니를 물었다.

“뭐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다는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권철태가 대문을 닫고 사라진다.

잠시 닫힌 대문을 바라보던 권악수는 걸음을 옮겼다.

딸칵!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권악수의 인상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담배를 문 권악수는 담장너머 밖을 바라본다.

멀리 한강이 보인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냈다는 분이 점쟁이 말에 일희일비 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듯 하더니 아내 김부민이 불렀다.

“여보, 누구 왔다갔어요?”

잠에서 막 일어난 김부민이 머리를 뒤로 묶으면서 걸어왔다.

“아버지 다녀가셨어.”

“아버님께서 무슨 일루요?”

김부민의 눈이 커졌다.

“집안에 액운이 몰려오고 있으니 굿을 해야 한다나 뭐나, 어이가 없네 진짜.”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 양반이 늙었나?”

“여보!”

김부민은 앞서 걸어가는 권악수를 불러 세웠다.

“이상해요.”

정색한 김부민을 보며 권악수 눈이 가늘어졌다.

“꿈을 꿨어요. 새벽녘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 일어날까 말까하며 잠시 누웠는데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아버님이 글쎄.”

김부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말해봐요.”

“글쎄 우리집 마당을 깊이 파더니 눕지 뭐에요.”

권악수는 이마를 지푸렸다.

언젠가 꿈에 황토물이나 흙바닥에 눕는 건 그다지 길몽이 아니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김부민이 말하는 아버지란 천왕그룹 권철악 회장을 의미한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는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권악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현관을 향해 걸어 가버렸다.

벤츠가 골목을 빠져 나갔다.

라디오에서는 천왕그룹 둘째 딸 권마진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일부 라디오에서는 권마진의 죽음이후 천왕그룹의 지배구도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를 전화로 연결하기까지 했다.

“양기사 미아리 좀 갑시다.”

“아, 예!”

운전기사 양형모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핸들을 꺾었다.

부우웅!

도로에 들어선 벤츠는 1차선으로 들어가 유턴을 하더니 터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른 출근시간인데도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는 차량들은 쭈욱 밀려 있었다.

다행히 외곽으로 나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 20분이 걸리지 않아 미아리에 도착했다.

차는 몹시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섰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보였다.

흰색의 깃발을 세우고 있는 붉은 기와로 된 단층 주택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했다.

끼이익!

그 앞에 벤츠는 멈췄고 뒷문을 열고 권악수가 내렸다.

바로 앞 빨간 기와집 대문을 바라보았는데 녹이 슬어 새빨갛다.

간판도 없고 오로지 점 집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백색의 깃발 뿐이다.

점 집은 깃발의 색깔로 구분한다.

걸린 깃발의 색에 따라 불러내는 신이 다르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잠시 대문을 바라보던 권악수는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자 다시 한 번 길게 눌렀다.

“누구시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권철태가 정치할 때 이곳을 자주 다닌다는 말을 비서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자신의 두 발로 찾아와 보긴 처음이다.

“권악수라고 합니다.”

“권악수?”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인터폰 사이로 쇳가루 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당장 모셔 오너라.”

인터폰이 끊어지고 잠시 후 신발 끄는 소리가 다가오더니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흠칫!

권악수는 대문이 열리고 나타난 여자를 보며 깜짝 놀랐다.

긴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훤칠한 키의 여자는 대략 스물 후반 정도로 보였다.

양쪽 귀에 투명한 물방울 귀고리를 했는데 걸음을 멈추자 미미하게 흔들 거렸다.

오똑한 콧날과 립스틱을 하지 않았는데도 붉게 빛나는 두툼한 입술, 그리고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은 차라리 수려했다.

“들어오십시오.”

여자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는데 권악수는 또 한 번 놀랐다.

언젠가 모 방송국 여자 성우가 나레이터로 나오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어찌나 청량한 음성이든지 몸속의 모든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가 끝났는데도 맑고 투명한 목소리에 취해 한동안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는데 오늘 또 그런 목소리를 듣는다.

“실례 하겠습니다.”

권악수는 안으로 들어섰다.

시멘트로 된 조그만 마당을 가로지르자 곧장 안방이 나왔는데 권악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사회 저명한 인사들 출입이 잦다고 들었다.

즉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 굳이 다 쓰러져 가는 옛날 집이라니 잠시 헷갈린다.

어려서 외가를 간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툇마루로 불리는 공간을 본 적이 있었다.

마당에서 한 계단 오르는 토방이 있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그곳을 툇마루라고 했다.

안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통로였는데 그 툇마루가 서울에도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덜컹!

어느새 따라온 여자가 둥근 한옥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문을 열었다.

잠시 멈칫하던 권악수가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어두침침했다.

권악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파리똥이 잔뜩 묻은 작은 형광등 하나가 방안을 밝히는 조명의 전부였다.

형광등을 보던 시선을 내렸다.

아랫목에 비쩍 마른 노인 한 명이 한복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금테 안경을 썼는데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다.

맹인들은 자신들의 눈의 움직임이 자칫 상대에게 불쾌감이나 두려움을 줄 수가 있어 거의가 선글라스를 끼어 눈을 가리는데 노인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앉으시오.”

권악수는 양반자세로 앉았다.

여자는 오른쪽에 다소곳 앉았는데 뭔가 받아 기록하려는 듯 노트북을 켜놓고 있었다.

“반가운 분이 오셨군요?”

노인은 지그시 웃었다.

마치 올 줄 알았다는 듯한 의미가 풍겨 나왔으므로 권악수의 눈이 좁혀졌다.

“날 아십니까?”

“권철태 전 대통령을 친 아버지로 두고, 천왕그룹 권철악 회장을 양부로 둔 분을 모르면 안되지요.”

“아신다니 자세한 설명은 할 것도 없을 거 같고 내 사주 좀 봐주시겠소?”

노인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굳이 사주까지 볼 필요 없습니다.”

“지금 뭐라고?”

“저승 갈 날짜를 잡아 놨군요.”

권악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르신.”

“온 몸에 먹구름이 두껍게 덮여 있소. 저승사자들이 사람을 데려갈 때 검은 구름에 태워가지요. 당신뿐 만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권씨 일가가 올해가 가기 전에 모조리 묏자리 팔 운명이오.”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내가 죽는다?”

“이토록 죽을 점괘가 백퍼센트로 나온 사람은 처음이오. 오늘이 10월 2일이니 가만 있자.”

노인은 뭔가를 헤아리는 듯 중얼 거렸다.

“늦어도 성탄절까지는 정리가 될 것 같소.”

“정리라면 죽는다?”

“그럴 것이오.”

노인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채는 필요 없으니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귀한 분을 뵙는 것도 영광이니 그것으로 족하지요.”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우리 권씨 집안을 몰락시키는 저승의 그림자는 어디서 오고 있습니까? 저승사자도 오는 방향과 장소가 있다던데?”

“맞습니다. 저승도 여러 곳이 있으므로 저승사자의 출발 장소가 다르지요.”

“한국은 아닌가 보군요?”

“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외국?”

“예, 확실합니다.”

권악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한참 주시하더니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여자가 일어나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늦어도 성탄절 이전에는 죽는다. 즐거운 얘기로군.”

권악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신은 권악수가 중얼 거리듯 말했다.

“후후! 흥미로운 늙은이야!”

권악수는 사라졌고 잠시 후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여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사부님 괜찮을까요?”

“두려우냐?”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눈빛을 봤는데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천살목(天殺目)이었습니다.”

“천살목은 쉽게 볼 수 없는 눈이지. 세상을 휘어잡을 눈이 분명하지만 반대로 굉장히 불행한 운명이기도 하다.”

“활인목(活人目)도 같이 태어난다는 것이군요.”

“잘 지켜보자꾸나. 싸움이 매우 재미있을 것으로 보이는구나.”

“천살목과 활인목이 싸우는가요?”

“천적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의 이치이지.”

노인의 입가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병원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권악수는 곧장 원장실로 올라갔는데 이미 권철악과 아내 서옥선이 와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서옥선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악수야!”

서옥선이 권악수의 어깨에 기대며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어머니 우세요. 실컷 우세요.”

눈물은 때로는 흘려야 한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어야 하는 것이 삶이다.

“엉엉엉!”

서옥선은 다시 통곡했고 권철악의 눈자위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어금니를 물고 있다.

부들부들!

아직까지 권철악이 저토록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려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우는 걸 못난 사내들의 하품이라고 꾸중할 만큼 희로애락에서 벗어난 거인이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병치레를 많이 해 커서도 항상 부모의 가슴을 뛰게 했던 권마진이었다.

아픈 자식이었기에 더 안타까울 것이다.

권악수는 서악선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우리 권씨 집안을 몰락시키는 저승의 그림자는 어디서 오고 있습니까? 한국은 아닌가 보군요?”

“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외국?”

“예, 확실합니다.”

권악수는 나직하게 입을 벌려 중얼 거렸다.

‘외국에서 들어왔단 말이지’

눈앞으로 한 사내를 떠올렸다.

뿌드득!

어찌나 이를 가는 소리가 컸던지 눈을 감고 있던 권철악이 바라보았다.

대한일보 사회부 기자 김치성은 잔뜩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이번 사건도 하루가 멀다 않고 일어나는 교통사고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모두 죽는 경우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발생한다.

하물며 보름 사이에 숙모와 조카가 죽는다는 것 역시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보름 전 죽은 이순영의 교통사고가 어제 밤 일어난 권마진의 사고와 자꾸 겹쳐 떠오르는 걸까.

아직 사고 자동차에 대한 경찰의 조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운전부주의로 인한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대산병원 앞은 지금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로 북새통이다.

삼삼오오 잘 아는 기자들끼리 앉아 사적인 얘기도 나누고, 누군가는 어제 밤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다면서 힘겨워하고, 어떤 이들은 김치성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표정들이 심각했다.

김치성은 로비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는 김치성의 눈이 빛나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울 만한 비밀스런 구역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병원은 전부 금연구역이다.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건 취재를 하다보면 금연구역에 오랫동안 갇힐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비밀스러운 곳은 반드시 있고 거기서 니코틴 부족에서 오는 어리버리해지는 정신상태를 바로 잡는다.

“이러다 일 한 번 크게 치죠.”

담배를 피우던 김치성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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