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천하제일가(1)
권총수는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 한 개를 꺼냈다.
이제 더 이상 중동에서 용병이 죽고 공격을 받는 일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미국은 계속 발을 빼고 있고 그 자리를 용병들이 채우고 있다.
유명한 프리랜서이자 탐사작가인 미국의 체프먼은 이제 미국의 대통령은 더 이상 중동문제로 골치 썩을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방부가 일 년 동안 중동을 포함한 국제 분쟁지역에 쏟아붓는 돈이 자그마치 3,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용병들로 대체하면 자금 규모는 뚝 떨어져 1,500억 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1,500억 달러를 투자해 3,000 달러어치 이상의 목표를 이루고 있으니 미국 정부로서는 이보다 더 편한 전쟁이 없다.
체프먼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용병시장은 더 커질 것이고 미국 정부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고 용병을 통한 대리전쟁을 하다 보니 국제적 비난거리도 발생하지 않는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는 일이 없으니 선거때마다 표를 달라고 하기도 훨씬 쉬워졌다.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인 것이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을 보던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지사장님!”
“일처리는 잘 되나?”
메올라로부터 월급을 받는 버홀터가 자신의 일이 걱정되어 전화했을 리는 없다.
“말씀하세요.”
“뉴스 봤나 모르겠군?”
“팔루자 다리에 시체 걸린 것 말입니까?”
“사실 이번 사건 이전부터 그쪽의 피해가 적지 않았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터진거지. 알다시피 그런 사건이 한 번씩 일어나면 회사가치는 급전직하 하지.”
버홀터의 얘기는 간단했다.
돌아온 즉시 알파팀을 데리고 팔루자 출전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권총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약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다.
권총수는 일단 알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았는데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이잉!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권총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딥니까? 그리로 가죠.”
권총수는 곧장 옷을 챙겨 입고 객실을 나섰다.
30분 후 권총수는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사내는 한동안 권총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젼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참치 집 어군의 주인 마낙춘이었다.
권총수는 빙그레 웃었다
“사장님도 여전 하십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가벼운 덕담을 건네며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마낙춘이 커피숍 주위를 한번 스윽 훑더니 노랑색 서류 봉투 한 개를 건넸다.
“보십시오.”
권총수는 봉투에서 A4용지 두 장을 꺼냈는데 천천히 훑어 보았다.
마낙춘은 서류를 살피는 권총수를 날카롭게 살폈는데 매우 놀라고 있었다.
‘몸이 더 좋아졌다’
권총수에게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지만 가벼운 미소로 넘겼는데 지금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뿜어 나온다.
자신은 강호의 세계를 모른다.
단지 분명한 사실은 부드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부드러워야 한다.
부드러워야 비즈니스에도 유리하고 운동선수들도 유연한 몸이 넘치는 파워를 이끌어낸다.
뒷골목 칼잡이들도 부드러워야 한다.
자신의 작업 장면을 보던 부하들이 마치 벗겨놓은 여자를 쓰다듬는 것 같다는 표현으로 부드러움을 극찬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인간과 내장기관과 위치가 닮은 돼지를 상대로 칼질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실제 작전이 벌어지고 조직간의 혈투가 생기면 칼을 쥐는데 긴장으로 인해 잔뜩 힘이 들어간다.
죽이는 칼이 아닌 부상을 입히려는 목적의 칼이지만 힘이 들어가면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즉 살인으로 번지는 것이다.
긴장한데다 잔뜩 몸이 굳은 상태에서 칼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부드럽다는 건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섰다는 뜻이다.
만약 권총수가 칼잡이라면 사람을 죽였는데도 죽이지 않은 것 같은 동작을 연출해낼 정도의 고수일 것으로 판단했다.
“모두 27명이군요?”
“권철태 전 대통령과 두 형제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와 손자 손녀까지 포함하면 그렇습니다.”
권총수는 다시 한 번 명단을 살피더니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
이어 봉투를 반듯하게 접어 손아귀에 쥐었다.
스으으으!
연기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봉투는 재가 되어 밑으로 떨어졌기에 마낙춘은 기겁했다.
“이런!”
완전히 서류봉투가 사라졌고 권총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요즘 사업은 잘되십니까?”
“덕분에 좋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만약 권총수가 떠벌리기라도 했다면 마낙춘은 살인죄로 지금 교도소에 있어야 한다.
그런 그를 권총수는 덮어주고 눈감아 주었다.
그 고마움은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다.
“사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마낙춘은 자세를 최대한 공손히 갖추었다.
내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조금 전의 마술 같은 능력 앞에서는 움츠려들고 또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사장님께서 떠들어도 증거가 없으니 별문제 없겠지만 그래도 입 조심 해야 할 겁니다.”
“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총수씨에 대해 얘기 한 마디 꺼내지 않았습니다.”
“출국하기 전 한 번 들리겠습니다.”
권총수가 일어서자 마낙춘이 따라 일어났다.
“오시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또 봅시다.”
권총수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숍을 빠져 나갔다.
권총수가 떠나고 마낙춘은 다시 자리에 앉아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대한민국에서 권씨 일가와 싸워 이길 사람이 있던가”
옥상옥(屋上屋).
청와대 보다 더 강력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권씨들을 그렇게 부른다.
골프장 휴게실에서 세 명의 여자들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휴게실 바로 앞에는 검정색 벤츠 두 대와 흰색의 아우디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기사들이 뒷문을 열고 기다린다.
“오늘 즐거웠어요.”
가장 앞에 있는 벤츠 S틀래스 뒷좌석으로 중년의 여자가 올랐고 다른 두 여자가 미소로 배웅한다.
“조심해 가세요. 사모님!”
“오늘 즐거웠습니다.”
“오여사 최여사 먼저 갈게요.”
탁!
문이 닫히고 벤츠는 천천히 골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짜증나, 언제까지 이런 더러운 골프를 쳐야 하는거야.”
챙이 큰 흰색의 썬 캡을 쓴 여자가 짜증을 부리자 같이 있던 자색 썬캡을 쓴 여자가 거들었다.
“글세 말이야. 진짜 드러워서.”
앞서 간 여자는 백서그룹 권철무의 아내 이순영이다.
두 여자는 백서그룹 기획본부장 정상오와 법무팀장 나동수의 아내였다.
두 여자의 골프 실력은 보잘 것 없었다.
늦게 배운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남편들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워두긴 했으나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틈나면 연습장으로 달려가는 열정은 없다.
그런데 틈만 나면 이순영은 두 사람을 불러냈다.
그리고 꼭 내기 골프를 요구한다.
실력이 모자라 이길 수도 없지만 이겨서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골프 한 번씩 치고 나면 스트레스 수치가 극한으로 올라간다.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이순영에 대한 흉을 본 뒤 각자 차를 타고 떠났다.
오후의 국도는 한산했다.
이순영의 기사 조덕봉은 두 손으로 핸들을 쥐고 시속 70km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이순영은 친구와 전화통화중이었는데 오늘 내기 골프에서 이겼다는 걸 거품을 물며 자랑했다.
추수가 막 시작되고 있는 계절이다.
맞은편에서 경운기 한 대가 달리고 있고 그 뒤 멀리서 25톤 덤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조 기사 늦겠다. 좀 빨리 가.”
이순영은 통화를 하면서 재촉했다.
조덕봉은 가속페달을 밟았고 속도계는 순식간에 80킬로를 넘어섰다.
최고 속도 60킬로 구간인데 20킬로를 초과한 과속이다.
하지만 속도계는 더욱 올라갔다.
바로 그때였다 경운기를 피해 덤프가 중앙선을 넘어왔다.
일반적으로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속도를 줄였다가 지나간 뒤에 중앙선을 넘어 추월해야 한다.
“이런 미친.”
조덕봉은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헉!”
그 순간 조덕봉은 다시 한 번 소스라쳤다.
전방에 포토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은 구덩이를 발견했다.
오래된 이런 국도는 아침까지도 멀쩡하다 오후에 도로가 파손된 곳이 적지 않기 때문에 자주 다니는 길이라고 안심했다가는 사고를 당하기 십상이다.
재빨리 핸들을 오른쪽으로 더 틀었다.
틀지 않으면 왼쪽 앞바퀴가 깊이 패인 곳에 쳐 박힐 수 있고 더욱이 맞은편에서 덤프트럭이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무조건 오른쪽으로 틀어야 했다.
“어엇!”
조덕봉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핸들이 돌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핸들이 잠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더욱 힘을 주어 돌렸다.
휘이이!
화악!
조덕봉의 눈이 커졌다.
안 돌아가던 핸들이 너무 쉽게 돌아가면서 차는 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아름드리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 받고 말았다.
뻐어어!
가로수는 휘청 흔들리기만 했을 뿐 그대로였고 벤츠는 범퍼와 차량 앞부분이 상당히 찌그러졌다.
퍼퍼펑!
팝콘처럼 흰색의 에어백들이 아우성을 치며 터졌다.
조덕봉의 얼굴은 운전석 에어백에 세게 부딪쳤다.
에어백이라고는 해도 충격이 적지 않았으나 금방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불렀다.
“사모님!”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보이지 않는다.
조덕봉은 상체를 묶고 있는 안전밸트를 재빨리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사모님!”
이순영의 바닥에 엎드렸는데 얼굴이 왼쪽 뒷문과 자신의 의자사이에 끼어 있었다.
재빨리 뛰쳐나간 조덕봉은 뒷문을 열고 이순영을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사모님! 사모님!”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교통사고입니다. 빨리 와주십시오.”
조덕봉은 이순영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했다.
부상에 대한 질문에는 정확히 잘 모르겠으며 기절한 듯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이순영을 끌어내려고 더욱 가까이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던 조덕봉이 소스라쳤다.
‘허걱’
목이 돌아가 있다.
상체는 앞가슴이 바닥을 향해 엎어 졌는데 문과 의자틈에 끼인 머리는 9시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설마!”
조덕봉은 끌어내려다 멈칫했다.
교통사고 환자 발생시 가급적이면 구급요원들이 오기 전까지는 환자를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조덕봉은 발을 동동 굴리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침을 삼켰다.
금방 온다던 구급차는 보이지 않는다.
조덕봉은 눈을 빛내며 손을 뻗었다.
엎어져 있기 때문에 심장이 뛰는지 안 뛰는지 확인 하려면 왼쪽 가슴에 손을 대어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대려고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던 조덕봉이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이순영의 왼손을 잡고 맥을 살폈다.
“이...있다.”
맥이 원래 이렇게 약하게 뛰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움직인다.
맥이 뛴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나무관세음 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조덕봉은 허리를 펴고 도로 양쪽을 살폈으나 아직도 구급차는 보이지 않는다.
애애앵!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구급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다가온 구급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며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내렸다.
덜컹!
두 남자들이 이동침대를 내리고 여자가 재빨리 다가오더니 맥부터 살핀다.
“서둘러야겠어요.”
남자 한 명이 재빨리 운전석 의자를 앞으로 최대한 당기자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이순영의 몸이 반쯤 모로 누워버렸다.
“목뼈 탈골 같은데.”
익숙한 동작으로 목뼈를 고정시키고 조심스럽게 이순영을 침대에 눕혔다.
삐뽀삐뽀!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는 떠났고 조덕봉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