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34화 (334/651)

제334화: 서울의 소나기(2)

놀랍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신호가 한 번 갔는데 받는다.

“주무시지 않았군요?”

“어쩐 일이십니까?”

당황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숨소리가 계속 빨라지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하긴 할 말이 없는데 새벽에 전화할 사람은 없죠.”

스스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해 보려는 자문자답이다.

“사직서를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상대는 천왕중공업 상무 배웅대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배웅대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제 난 천왕중공업 관계자가 아닙니다.”

“그건 상무님 사정이고 권악수 사장과 통화가 되지 않으니 그래도 나 보다는 가까운 분께서 한 말씀 전해 주시죠. 상무님 전화는 받을 것 아닙니까?”

배웅대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도 죽이려고 했고 민철이 형은 칼을 맞고 지금 저승길 오락가락 하고 있습니다.”

“예옛?”

배웅대는 상당히 놀랐다.

“특히 쓰러진 민철이 형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것 말입니다. 그건 죽이려고 했다는 분명한 증거겠죠?”

“지금 어디십니까? 내가 가겠습니다.”

“올 건 없고 전해주기만 하세요. 오늘부터 천왕그룹의 권씨와 그 식솔들은 웬만해서는 살아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건 단순히 돈을 떼먹는 차원을 넘어 죽여 입 싹 닫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권악수 사장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세요. 내 말 우습게 넘겼다가는 고생 좀 할 것입니다.”

“권총수씨 권총수씨!”

“말하시오.”

“어딥니까 지금 가겠습니다.”

“당신 사직서 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곳 직원 아니라면서 왜 날?”

“수리된 건 아닙니다. 일단 얘기 좀 합시다. 병원입니까? 지금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어느 병원입니까?”

배웅대의 말은 절박했다.

그건 사막의 흑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한 대의 차량이 병원으로 들어오더니 멈췄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배웅대였다.

배웅대는 아직 캄캄한 병원 주위를 쓰윽 훑더니 벤치에 앉아 있는 권총수를 발견하고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권총수는 팔꿈치를 양 무릎에 괴고 앉아 있었는데 찌푸려진 이마가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흘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내가 반드시 사장님을 설득하여 송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기다려드리죠. 자정까지 다인코프 계좌로 돈이 입금되지 않으면 사냥은 시작 됩니다.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실테고.”

권총수는 무릎에서 팔꿈치를 떼며 허리를 세웠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멈칫 하며 배웅대에게 한 개비 권했다.

“괜찮습니다.”

배웅대가 거절하자 자신만 불을 붙였다.

“다시 얘기 하겠소. 오늘 밤 자정까지 입금이 안 되면 천왕그룹, 백서그룹 전직 대통령 권철태씨까지 내 사냥감이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잠깐만!”

다급히 불러 세우려 했으나 권총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점차 병원 밖 어둠속으로 권총수의 모습이 묻혀 가고 있었다.

‘진짜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배웅대는 재빨리 핸드폰을 눌렀다.

권악수를 만나려는 것이다.

권악수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아침 일찍 전경련 관계자들과 골프가 있었다.

운전기사 양형모는 골프가방을 싣고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체크하고 있었다.

이상 없음을 확인한 양형모는 트렁크를 닫고 권악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권악수가 흰색의 모자에 자주색 바지와 검정색 줄무늬가 들어간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양형모를 재빨리 뒷문을 열어주었고 권악수는 허리를 숙여 차에 올랐다.

탁!

문을 닫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은 양형모는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채 백미터도 이동하지 못했을 때 권악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야, 이사람 그만 뒀잖아.”

권악수는 액정을 보고 투덜거리더니 전화를 받았다.

“배상무가 어쩐 일입니까? 우리 회사 사직서 내지 않았습니까? 어제 수리됐는데?”

“사장님!”

“뭐 지금이라도 사직서 철회해달라고 하면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딸칵!

권악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아침 일찍 전화 한 걸 보니 잘못했다고 봐달라고 하시려나 본데 그동안 회사에 끼친 공이 적다고는 할 수 없으니 오세요. 대신 반성문은 몇 장 써야 할 겁니다.”

룸미러를 통해 권악수를 보는 양형모의 눈이 떨린다.

배웅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최측근이자 충성을 다해 일한 분신과 같은 존재다.

더욱이 본인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 사람을 지금 조롱하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이런 그림을 볼 때마다 과연 계속 저 사람 밑에서 핸들을 잡아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가끔씩 갈등에 빠지곤 했다.

“최사장 전화 받으셨습니까?”

“최사장이 누구요?”

“케이 원(K1)최준구 사장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러는 거요? 내게 보고 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든지 찾아올 텐데, 뭔 일로 그래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나 보군요. 어제 케이 원 직원들이 오민철씨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르지 않는다.

자신이 지시한 일인데 절대 모를리 없으며 단지 결과에 대한 보고만 아직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민철씨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권총수씨를 쳤던 박상호 팀장쪽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발목이 잘렸고 온 몸의 갈비뼈가 내려앉았으며 손목뼈가 산산이 부서져 몇 명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군요.”

“당신 지금 어디야. 양기사 차돌려. 골프 취소해.”

“오늘 밤 12시까지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권씨 일가에 대한 사냥을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디냐니까?”

권악수가 소릴 질렀다.

“삼운병원? 알았소. 꼼짝 말고 기다리시오.”

전화를 내리고 난 권악수는 다시 번호 한 개를 꾸욱 눌렀다.

“예 사장님!”

천왕 케이원 사장 최준구였다.

“말해보시오. 어제밤 일 어찌됐소?”

“무슨?”

“한 가지도 빼 놓지 말고 말하세요. 발목이 잘리고 갈비뼈가 부서지고 개 박살이 났다면서 왜 얘길 않는 거요?”

“사장님 그런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이기 때문에...”

“당장 삼운병원으로 오시오.”

권악수는 퍽 소리가 나도록 핸드폰을 집어 내리쳤다.

차가 삼운병원에 도착했다.

“어디 있는 거야?”

차에서 내린 권악수가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나무 벤치에 배웅대가 혼자 앉아 있다.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린 배웅대는 권악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자를 만났소?”

“돈 지불해야 합니다.”

“그놈이 뭐라고 했소?”

“전화로 얘기 한 그대로입니다. 오늘 밤 12시까지 입금하라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권씨일가를 죽이겠다? 완전 또라이 아냐. 미친놈.”

권악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 차 한 대가 급히 다가오더니 주차장 입구에 멈추고 한 사내가 내렸다.

권악수 지시를 받고 달려온 천왕 케이원 최준구 사장이었다.

황급히 뛰어온 최준구는 권악수를 향해 목례를 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소리소문 없이 정리하겠습니다.”

“정말 많이 다친거요? 말해 봐요?”

“별 것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신경 좀 안 쓰게 하세요.”

“획실히 하겠습니다.”

“좀 잘해요. 말로만 잘하겠다고 하지 말고, 에이.”

권악수는 못 마당한 표정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청소 잘하라고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건데.”

“오늘 안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사장님!”

권악수는 천왕그룹의 미래다.

아주 먼 미래가 아니라 길어야 일이 년이면 회장 자리에 오를 것이다.

최준구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권총수를 없애겠다고 했다.

“사장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권악수를 배웅대가 불렀다.

시간이 없다.

권악수를 설득시켜 거래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권총수는 사람이 아니다.

그를 상대하려면 신이 되어야 한다.

“다인코프 계좌에 돈 넣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출근해요.”

“천왕그룹에서 십억 달러는 푼돈입니다.”

“당신 진짜 짤리고 싶소?”

권악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

“사장님 줘버리세요. 그것이 편합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배상무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가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됐으니 입을 다물라는 경고였다.

권악수는 차를 타고 떠났다.

떠나는 차를 바라보는 배웅대는 절망했다.

계약 위반으로 설혹 소송을 당한다고 해도 미국이 아닌 한국 법정에 선다.

다인코프가 아닌 권총수의 사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 법정에서는 상대가 안 됨을 알고 저러는 것이다.

“빌어먹을!”

최준구가 투덜거리며 벤치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그놈이 누굽니까? 용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배웅대는 천천히 최준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쪽팔려서 원.”

“최사장을 염려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 사람 일에서 손 떼세요. 건들면 안 됩니다.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최준구는 눈을 좁혔다.

배웅대는 허투루 말 하는 사람이 아니다.

냉철하며 상황을 읽는 눈이 빨라 권악수의 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상무님 그 친구에 대해 잘 아시면 설명 좀 해주십시오.”

“난 아는게 없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배웅대는 차로 걸어갔다.

“아!”

뭔가 생각 난 듯 배웅대가 돌아섰다.

“있습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죽기 싫으면 손 떼시오.”

움찔!

최준구는 놀란 눈으로 걸어가는 배웅대를 보았다.

손 떼라는 건 회사를 그만 두라는 뜻이다.

최준구는 어이없다는 듯 사라지는 배웅대의 차를 바라보았다.

권총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식사로 룸서비스를 이용했으며 일체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어떤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봤자 만날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전 오민철이 일반병실로 옮겨졌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곧바로 경호회사에 전화를 걸어 신변안전을 부탁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인터넷에 들어가 다인코프 상황을 살피던 중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사진 한 장이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팔 다리가 잘려 나가고 머리와 몸통뿐인 시체 두 구가 다리 위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불에 검게 탄 시신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고 그들 가슴에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Allahu akbar(알라후 아크바르)’

기사는 간단했다.

죽은 두 명은 다인코프 소속 용병들이며 어제 이라크 팔루자에 의약품을 호송하다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총수는 굳은 표정으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를 읽는 권총수의 표정은 수시로 변했고 가끔씩 한숨을 토해 냈다.

“흐음!”

잠시 화면속 사진을 바라보던 권총수는 다른 신문기사를 체크했다.

CNN기사와 BBC가 다르고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도 약간씩 차이나는 내용이었으나 한가지에서는 공통점을 보였다.

다인코프 용병 아홉 명이 어제 이라크 팔루자에서 반군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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