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서울의 소나기(1)
낯익은 사제 한 명이 서 있다.
원래 성당의 주임 사제 임기는 5년이다.
5년마다 근무지를 바꾸며 이동하는데 이곳 성당만큼은 권총수의 기부금이 커진 탓에 특별히 교구차원에서 발령을 보류 시켰다.
현 신부의 지도 감독 아래 권총수가 보낸 기부금을 이용한 여러 사업을 완성하라는 의미였다.
그런 관계로 눈앞의 이효언 펠릭스 신부는 권총수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총수 악수 한 번 하자.”
권총수는 신부와 굳게 손을 잡았다.
“가장 악명 높았던 아이가 가장 선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구나. 이거야 말로 하느님의 신비 아니겠느냐.”
신부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권총수가 보내온 그 많은 돈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총알은 절대 피할 수 없다.
살아있는 건 총알이 날 피해가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피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신부와 원장수녀는 궁금했던 질문을 교대로 던졌는데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두 사람은 신비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렇게 용병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고 들으며 시간은 흘러갔고 땅거미가 지면서 밤이 되었다.
권총수는 그냥 가려고 했지만 한사코 잡는 바람에 원장 수녀가 직접 차려준 저녁을 먹고 보육원을 나왔다.
기뻐야 한다.
그러나 권총수의 마음은 전혀 즐겁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처음 기부를 시작할 땐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고 우쭐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계처럼 보내고 가끔씩 후원 받고 있는 단체로부터 다인코프 주소로 자신들의 소식지가 날아오지만 처음 몇 달을 제외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물고 저 멀리 있는 북한산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고 빛나는 별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보현봉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올라있다.
‘가족’
혼자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줄 몰랐다.
‘세상 참 웃기는 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던 가족이란 단어가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고 가끔은 나도 동생이나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허허롭게 웃기도 했다.
부우웅!
맞은편에서 자동차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권총수는 오른쪽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로부터도 라이트가 비쳤으므로 고개를 돌렸다.
일방통행이기 때문에 뒤에서 오는 건 위반이다.
더욱이 도로가 좁아 두 대의 차량이 비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끼익!
약속이나 한 듯 앞뒤에서 오던 차량이 멈추더니 라이트가 꺼졌고 동시에 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내렸다.
꿈틀!
권총수의 눈썹이 모아졌다.
앞으로 다섯, 뒤에서 다섯 모두 열 명으로 하나같이 정장차림이었다.
신발 역시 구두였는데 어둠속에서도 보일 만큼 깨끗하게 잘 닦여 있었다.
사내들이 포위망을 좁혀 다가온다.
툭!
권총수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철제 난간 쪽으로 등을 돌렸다.
방향이 전환되면서 사내들은 앞뒤가 아니라 좌우 양쪽에서 좁혀 오는 모양새이다.
권총수는 밀물이 들어오듯 느릿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사내들을 좌우로 살폈다.
쉭!
정면에서 한 사내가 주먹을 뻗어온다.
권총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이 전광석화와 같이 뻗어나가더니 날아오는 사내의 손목을 거머쥐고 그대로 꺾어 버린다.
뚝!
마치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렸고 사내는 비명을 터뜨렸다.
사내는 자신의 부러진 오른손을 잡고 펄쩍 뛰었다.
부웅!
좌측에서 왼발 돌려차기가 날아온다.
싸악!
권총수의 왼손이 칼처럼 날을 세워 내리쳤다.
비록 어둡지만 푸른색의 손 하나가 사내의 발목을 내려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소림의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였다.
꺽!
단발마의 비명이다.
순간적으로 강렬한 통증이 파고들 때 내지르는 비명인데 툭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의 왼발이 발목에서부터 잘려 아스팔트 길 위로 떨어졌다.
스윽!
또다시 정면에서 주먹 하나가 파고들었다.
상체를 오른쪽으로 움직여 피한 권총수는 비어있는 사내의 옆구리를 찍었다.
빠악!
흐읍!
호흡이 덜컥 막히는 소리를 지르며 사내는 무너졌는데 대자로 뻗어 버렸다.
호흡이 있는 것을 보면 목숨이 끊어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내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쇠몽둥이도 부러뜨리는 소림의 무상각(無上脚)을 권으로 바꾼 것이다.
아마 다리를 이용해 찼다면 사내의 왼쪽 갈비뼈는 모조리 부서졌을 것이다.
멈칫!
사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춤했다.
손목이 꺾이고 발목이 칼에 잘린 듯 베어 떨어지고 길가에 큰 대자로 뻗어 옴짝달싹 못한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 치고받는 난타전 속에 나온 부상이 아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모두가 한 방에 뭉개졌으며 권총수는 털끝 하나 다치거나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정한 옷차림의 직원들이군.”
권총수는 이미 사내들이 천왕 K1 직원임을 알아차렸다.
“그쪽이 우두머리 같군?”
권총수로부터 지목을 받은 사내 박상호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왼쪽 가슴에 직위와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단번에 알아본다.
“그만 데리고 돌아가시죠. 잘못하면 부하직원들 모두 병신 됩니다.”
권총수는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저기 누워 있는 친구는 빨리 데리고 가야 할 것이오. 겉으로는 부상이 없어 보이지만 몸속은 난장판일 겁니다. 힘들겠지만 병원에 1년 정도 누워 있으면 걸음은 걷게 될 것이고, 잘린 발목은 회복 불가능이오. 장애인 연금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당신들 주인이 보상을 해줄지는 모르겠고.”
권총수가 말을 하다 멈췄다.
우두머리로 지목한 박상호가 권총을 꺼냈다.
한눈에 호신용 가스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방범 순찰중 범죄자와 만났을 때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블랙가드이다.
씨익!
권총수는 미소를 지었다.
“치우시죠.”
딱!
박상호가 첫발을 발사했다.
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첫 탄이 무형의 벽에 부딪쳤다.
티티팅!
모두 다섯 발이 발사됐지만 권총수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대신 가까이 있는 부하직원들이 최루 가스를 마시고 기침을 하며 자릴 피했다.
으왁!
콜록 콜록!
권총수는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박상호를 향해 다가갔다.
권총수가 다가온다고 느끼는 순간 박상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가스총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뻐퍽!
머리가 뜨겁다.
권총수가 총으로 머리를 찍어 버린 것이다.
박상호는 뒤로 밀려나며 맞은편 담벼락에 부딪혔는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을 덮는다.
쉭!
박상호에게 한 방 더 갈기려던 권총수 귓가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희끗한 광채가 파고드는 순간 권총수는 어느새 자리를 이동해 피해버리며 손을 뻗는다.
탁!
삼단봉이다.
휘익!
거칠게 잡아당기자 사내는 삼단봉을 놓지 않고 휘청하며 끌려왔다.
권총수는 끌려오는 사내의 낭심을 구둣발을 찍었다.
끄으!
사내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한순간 꼼짝도 않더니 퍽 하며 무릎을 꿇었다.
츄츄츅!
재봉틀 바늘이 박음질하듯 삼단봉이 어둠을 찔렀다.
누구도 피하지 못했고 명치를 가격당하면서 사내들은 나뒹굴었다.
상당한 내공이 실린 공격인 탓에 굼벵이처럼 꿈틀거릴 뿐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툭!
권총수는 담벼락에 기대어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닦고 있는 박상호 앞에 삼단봉을 던져주었다.
“이런 식은 도움이 안 된다고 하세요.”
권총수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십여 미터쯤 내려갔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던 권총수가 이마를 찡그렸는데 처음 보는 번호였다.
잠깐 고민하던 권총수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총수씨? 총수씨 맞죠?”
“혹시 민심 누님?!”
“큰일 났어요. 민철이가 칼을 맞았어요. 여기 삼운병원.”
“금방 가겠습니다.”
권총수는 재빨리 달려갔다.
그리고 길가에서 달려오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외치듯 말했다.
“삼운 병원 갑시다.”
기사는 미터기를 누르고 가속 폐달을 밟았다.
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삼운병원 수술실 앞에 일남일녀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흔 후반의 남녀는 오민철의 둘째 누님인 오민심과 남편 강경준이었다.
“누님!”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는데 권총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총수씨!”
오민심은 권총수를 보자마자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 민철이 죽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조용히 해 이 사람아.”
강경준은 울먹이는 오민심을 향해 인상을 쓰며 조용한 중환자실 복도라는 걸 상기시켰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식구들과 돼지갈비를 먹고 돌아오는데...”
식당을 나와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사내들이 덮쳤다고 했다.
오민철은 오랜만에 만난 누님 가족들과의 저녁으로 기분이 좋은 듯 소주를 마셨다.
놀라운 운동신경을 지닌 오민철이었지만 술이 취했고 거기에 사내들은 일곱 명이나 되었다.
비록 술이 취했으나 오민철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맞으면서도 거세게 치고 나오는 공격에 부상자가 발생하자 두 명의 사내가 칼을 휘둘렀다.
이미 이곳저곳 가격을 당해 몸은 무너지고 있는 상태에서 능숙하게 휘두르는 사내들의 칼을 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사내들은 오민철이 완전히 널브러지는 걸 확인하고 사라졌다.
“쓰러져 반항을 전혀 못하는 상태인데도 복부에 칼을 꽂았소.”
권총수의 눈이 좁혀졌다.
살인이다.
그들은 오민철을 죽여 없앨 계획이었다.
권총수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말했다.
“두 분은 들어가 쉬십시오. 여긴 제가 지키겠습니다. 내일 가게에도 나가야 하잖아요.”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니다 오민철의 도움으로 홍대 앞에서 버럭킹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민철의 말을 빌리면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은 여기 있지 그래. 오전은 내가 나가니까 일찍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
오민심은 권총수를 한 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형 강경준이 고맙다면서 허리를 구부리고 돌아갔다.
“총수씨 뭐 좀 물어도 돼?”
“예.”
“무슨 일이야? 중동에서만 싸우던 민철이가 한국에 오자마자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잖아.”
권총수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 오민심을 빤히 바라보던 권총수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권총수는 천왕중공업과의 사이에 생긴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받아 낼 돈이 얼마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천벌을 받은 인간들, 인질까지 구출에 성공했으면 약속한 돈을 지불해야지.”
오민심은 거품을 물었다.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들이 나타났다.
오민심이 쪼르르 다가가 질문을 했다.
“우리 민철이는 괜찮습니까?”
“다행히 칼이 심장을 비켜가는 바람에 고비는 넘겼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하루 정도 경과를 살핀 후 입원실로 옮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민심은 걸어가는 의사들을 향해 넙죽 절을 했다.
연락을 받은 듯 병원직원 한 명이 다가왔고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며 오민철의 침대가 나타났다.
“민철아!”
“마취가 아직 깨어나지 않아 듣지 못해요. 비켜 주세요.”
병원 직원은 오민철이 누운 침대를 밀고서 복도저편으로 사라졌다.
중환자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일이 없었다.
오민심이 돌아갔고 권총수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새벽2시의 병원은 조용했다.
권총수는 말없이 담배를 피우다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나 살피다 없는 것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권총수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찌이익!
하며 빨아들일 때 나는 담배 타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푸른색 연기를 신경질적으로 뿜어냈다.
화를 삭히려는 듯한 담배로 보였는데 평소보다 훨씬 빨리 피운다.
담배 한 개비는 금방 타들어갔고 꽁초는 앞에 있는 입식 재떨이에 끄고 번호를 눌렀다.
새벽2시의 전화는 누구에게라도 실례이다.
그러나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