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돈 내놔(3)
배웅대는 미소를 지으며 로비를 걸어나가 곧장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기사 맹성춘이 룸미러를 보았는데 평소 같으면 집으로 바로 가느냐고 물었겠으나 배웅대의 굳은 얼굴에 차마 묻지 못했다.
“양재동 갑시다.”
양재동은 권악수의 집이 있는 곳이다.
“예!”
사옥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맹성춘은 밴츠의 가속 폐달을 지그시 밟았다.
차는 소리없이 어두운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대문이 열리고 권악수의 아내 김부민이 나타났다.
“상무님이 어쩐 일이세요. 들어 오세요.”
배웅대는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마당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권악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어제 벌어졌던 UFC 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권악수는 UFC를 좋아한다.
학교 다닐 때 복싱과 유도를 한 탓에 유난히 격투 스포츠를 좋아하는데 배웅대를 보며 말했다.
“초대해도 오지 않던 우리 집을 제 발로 오시다니 회사에 무슨 일 있습니까?”
약간은 못마땅한 얼굴이다.
사실 어제 십억 달러 지급 문제를 놓고 약간의 충돌이 있어 서로가 불편하다.
“여보 텔레비전은 좀 끄세요.”
“어, 미안 미안.”
권악수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젼을 껐다.
“앉아요.”
배웅대는 권악수 맞은편에 앉았다.
“상무님 차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여보 가져와요. 커피 한 잔 하지 뭐.”
김부민이 부엌쪽을 향해 걸어가자 배웅대가 입을 열었다.
“낮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카이로 사람들이 왔습니다.”
“카이로 사람들?”
“그 친구들 있잖습니까? 다인코프 용병?”
“아아! 무슨 일로?”
“회사 앞까지 찾아왔더군요. 돈을 달라는 거죠. 한국에서 20일 정도 머무를 예정이라면서 서로 더 이상 얼굴 붉히는 일이 없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오늘 회장님과 골프를 치면서 생각 했는데 한 푼도 안준다는 건 조금 그렇고 천만 달러 보냅시다.”
“한 푼도 깎을 수 없다고 합니다.”
권악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십억 달러를 진짜 달라는 거야 뭐야. 이 친구들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미친 사람들 아니에요.”
김부민이 쟁반에 커피 잔 두 개를 받쳐 들고 오더니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싫으면 관두라고 해요. 천만 달러가 얼마나 큰 돈인데.”
김부민이 권악수 옆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권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당장 가서 이렇게 말해요. 천만 달러 이상은 절대 줄 수 없으니 받고 싶으면 받고 싫으면 관두라고 말이오.”
“천만 달러도 많아요. 쓰레기 같은 인간들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김부민의 눈이 위 아래로 희번득 거렸다.
배웅대는 김부민을 바라보았는데 앵커시절 청순가련형의 마스크로 연예인들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치고 한 번쯤 그녀를 짝사랑해보지 않은 이 없을 정도 주가를 올렸고 방송국의 중요한 행사의 사회는 거의 도맡아 진행했다.
그런 그녀의 실체를 보면서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른다.
아름답다고 하여 결코 마음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김부민은 지독했다.
야망을 넘어 욕망에 지배되고 있는 여자였다.
오래전 지금은 회사를 떠난 한 원로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천왕그룹이 앞으로 더 크게 되면 김부민 때문이고 망하면 그 여자 탓일세’
야망은 좋다.
그러나 욕망은 사람을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성질을 지녔다.
결국 파멸은 욕망의 끝자락에 있는 무서운 덫인 것이다.
“여보. 두 번 말할 것 없어요. 천만 달러 싫다면 끊으세요. 전쟁터에서 빌어먹은 것들이 어디서 큰 소리야. 돈이 썩었어요. 주지 마세요.”
김부민은 앙칼지게 말했다.
“배 상무!”
“예 사장님!”
“배상무 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잘 좀 처리해 보세요.”
그리고 권악수와 김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층으로 올라가버렸다. 혼자 남은 배웅대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배웅대는 현관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배웅대가 고개를 돌려 2층을 바라보았는데 두 남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쾅!
대문이 닫히고 기다리고 있던 벤츠 차량이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한 권악수는 눈살을 찌푸렸는데 뒤따라 들어온 비서 박기준이 봉투 한 개를 내밀었다.
그건 배웅대의 사직서였다.
“언제 받은 거요?”
“어제 밤 메일로 보냈기에 제가 아침에 프린터 하여 가져 온 것입니다.”
사직서를 낚아 챈 권악수가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약속을 지키십시오. 그 방법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권악수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쫙!
권악수는 사직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만 두면 떠나는 거지 어디서 개소리를 해대는 거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껐다 다시 눌렀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다는 말만 되풀이 되어 나왔다.
“나가봐요.”
박기준이 나가고 잠시 앉아 있던 권악수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최사장님 어디십니까? 잘됐군요. 잠깐 얘기 좀 나눌까요.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20여분 정도 지나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흔 중반 정도 되어 보인 건장한 사내는 천왕 케이 원(K1) 사장 최준구였다.
천왕 케이 원은 경호 경비를 맡고 있는 보안서비스 회사이다.
“부탁할 것이 있어 보자고 했습니다.”
“부탁이라뇨.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최준구는 깍듯했다.
버스가 멈췄다.
사람들이 내렸는데 권총수가 있었다.
권총수는 정류장 바로 앞에 ‘경복상회’란 간판을 걸고 있는 조그만 가게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간판을 보던 시선이 가게밖에 놓인 냉동박스를 주시했다.
보육원 시절 주인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돌리고 아이스크림께나 훔쳐 먹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간판은 녹이 슬대로 슬었고 그때도 꽉 닫히지 않던 가게 문은 여전히 틈이 맞지 않아 엉거주춤 열려있다.
권총수는 몸을 돌렸는데 보육원길이라는 푸른색 이정표 하나가 걸렸다.
예전에는 못 보던 간판이었다.
이십 여미터 쯤 걸어가자 왼쪽으로 개천을 낀 골목길이 나타났다.
개천의 물은 맑았고 수량이 많은 것이 오기전 큰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개천을 따라 난 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커다란 산이 나타난다.
산은 단풍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회백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당과 보육원 건물이다.
딸칵!
권총수는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하나 피우기 위해 불을 붙였다.
개천과 길을 가로막고 있는 철제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보육원을 또 찾아왔다.
‘그렇게도 갈 곳이 없는가’
묻고 또 묻는다.
아무리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갈 곳은 더욱 없었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같이 살았던 유병칠이 가까운 사람의 전부였다.
워낙 야무지고 의지가 강한 유병칠인 만큼 지금쯤 그쪽 공사판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군’
짜증이 확 솟구친다.
보육원 출신들은 묘한 습성을 갖고 있는데 사회로 진출하면 철저히 자신을 숨긴다.
절대 서로 연락하거나 소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서로가 버려진 아이, 부모가 없다는 치욕과 불편함을 더는 느끼지 않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만나면 서로의 처지가 더 비참해 질지 모른다.
그래서 서로가 숨고 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꽁초를 개천에 던졌다.
“여전하구나. 꽁초 버리는 것.”
빙글!
돌아선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성당 경비 베다 아저씨였다.
흰머리가 더욱 많아졌고 얼굴의 주름살도 훨씬 늘었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다.
칠십이 넘었을 테니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어려서부터 아저씨라고 했기 때문에 쉽지 않다.
“녀석!”
경비 아저씨는 권총수의 손을 잡았다.
“그토록 오기 싫어하던 이곳을 왜 또 왔니? 이쪽 보고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악담을 퍼붓고 갔잖니?”
“아저씨 내가 언제요?”
권총수가 인상을 썼다
“어서오너라. 바오로 널 환영한다. 그렇잖아도 원장수녀님과 주임신부님께서 널 한번 보고 싶어했지. 하지만 워낙 정해진 곳 없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날 왜요?”
“왜긴 왜 겠느냐? 네가 카톨릭 재단에 기부한 돈이 얼마인지 몰라서 그러니? 너 덕분에 보거라. 우리 보육원도 새로 지었다.”
성당 측면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낡은 목조건물로 비만 오면 여기저기 새던 보육원자리에 콘크리트로 된 2층 건물이 생겨났다.
붉은 벽돌로 외관을 쌓고 작은 지붕까지 만든 보육원 건물은 생기가 있었다.
“수녀님, 원장 수녀님!”
오후 3시가 넘어가는 보육원 앞마당 꽃밭에서 풀을 매던 재색의 베일을 쓴 수녀가 고개를 돌렸다.
선종한 안나 수녀를 대신해 새롭게 온 원장 베로니카였다.
예순 가까워 보이는 베로니카는 일어서서 누군가 하는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혹시 바오로?”
한 번도 직접 본적은 없다.
물론 보내준 사진과 이곳에 남은 기록들을 이용해서는 충분히 봤지만 실제는 처음이다.
서로가 처음 보는 얼굴이어서 어색했다.
“안녕하십니까? 권총수 바오로입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우리 바오로를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내주시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원장 수녀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권총수의 손을 잡았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었지만 따뜻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아니지 주임 신부님에게 연락을 드려야지.”
원장 수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린다.
“신부님, 바오로가 왔어요. 아니요. 오래전 여길 떠난 바오로 말이에요. 보육원을 지어준, 네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원장수녀가 말했다.
“당장 오시겠다고 하는군요. 우선 들어가요.”
권총수는 원장수녀를 따라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보세요. 우리 바오로씨 덕분에 아이들이 이토록 편안한 곳에서 생활하고 있답니다.”
큰 아이들은 학교를 간 듯 없었고 젖먹이 아이 십여 명이 보모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권총수는 여기저기 둘러보았는데 표정은 덤덤했다.
단 한 번도 자선을 꿈꾸지 않았다.
세상을 증오와 미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냉기 가득한 마음속에 자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공간은 없었다.
오로지 비렌드라의 자선을 보고 잠시 흉내를 낸 것뿐이었다.
한마디 더 붙인다면 죽은 전 원장수녀 안나의 자신을 향한 희생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돈을 보낸 것이다.
권총수 바오로를 사람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무던히 애쓰셨던 분이다.
원장 수녀실은 예상대로 단촐했다.
추리닝 한 벌이 걸려있는 것이 옷의 전부였고 구석의 작은 책상위에 성모상과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앉아요.”
권총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고 원장수녀는 전기 주전자의 스위치를 꽂았다.
봉지에 담긴 커피를 작은 머그잔 세 개에 각각 담았다.
곧 오게 될 주임신부 몫까지 타는 모양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다행히.”
“오 성모님.”
안나 원장수녀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정도 공백이 있었으며 경남 왜관 어디에 있는 수녀원에서 왔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바오로!”
문이 열리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