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돈 내놔(2)
대한항공기 한 대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이지? 4년 조금 넘었지?”
“무슨 4년이야 정확히 5년 3개월 만인데.”
“그렇게 됐어? 세월 딥다 빠르다. 그럼 올해 엉아 나이가 몇이냐.”
오민철은 자신의 나이를 물으며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이동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아직 한낮의 기온은 덥다.
천장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화물을 실어 내는 컨베이너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실려오는 가방을 낚아 채 둘러멨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던 권총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어, 왜 아무도 안 나왔어?”
오민철의 가족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말 안했어.”
상대가 천왕그룹이다 보니 자칫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대비한 조치였다.
두 사람은 줄지어 서 있는 승차장으로 걸어가 칠십 정도 되어 보이는 노신사가 핸들을 잡고 있는 개인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초동 갑시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미터기를 누르고 차를 출발 시켰다.
부우웅!
두 사람은 각자 창밖을 보며 아직은 쨍쨍한 초가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려 택시가 멈췄다.
권총수는 카드로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부우웅!
택시가 떠나고 권총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두 개의 빌딩이 보인다.
천왕그룹 사옥이다.
45층 높이로 강인한 사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건물은 올려다보는데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았다.
“이런 건물은 얼마나 할까?”
오민철이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몇 천억 하겠지?”
없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권총수가 저 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오민철은 재빨리 쫓아갔으며 가까운 이 층 커피숍으로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력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나왔는데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워낙 사운드가 좋아 마치 연주장에 들어선 느낌이었는데 손님이 없어 크게 음악을 듣던 여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줄였다.
“어서오세요.”
서른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여주인이었는데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베이지색 스카프를 목에 걸었다.
오민철은 커피 두 잔을 주문하며 계산했다.
권총수는 창가에 앉아 도로를 매운 차량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슬람국가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까닭에 한국은 확실히 시끄럽고 번잡하다.
물론 소음의 첫째 요인은 자동차와 사람들이다.
이집트와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은 이렇게 요란하지는 않았다.
또 한 가지 차이는 사람들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쪽보다 한국이 훨씬 인권에 대한 지수가 높고 민주적인데도 사람들 표정은 굳어 있다.
반면 그들은 한국보다 가난하고 인권 지수가 형편없는데도 즐겁고 생기가 넘친다.
“마셔!”
오민철이 두 잔의 커피를 놓고 앉았다.
권총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듯 잠시 기다리더니 전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배웅대 상무님?”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우리 카이로에서 한 번 뵀죠.”
“카이로, 아아아!”
그제야 생각 난 듯 배웅대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여기 엔젤 커피숍입니다. 기다리죠.”
권총수는 전화를 끊었다.
오민철은 어떤 식으로 절차를 밟아 돈을 받아내겠다는 권총수의 설명을 들은 적은 없다.
“사전에 약속은 한 거야?”
“아니!”
뚝!
잔을 들어 올리던 오민철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회사 직원도 아니고 천왕중공업 상무를 사전 연락도 없이 불러낸다는 건 결례이다.
그런 식의 접근은 상대의 감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이쪽은 돈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다.
채권자이지만 아쉬운 입장이다.
오민철은 좀 더 부드럽게 대처하자는 얘기를 하려다 입을 닫았다.
권총수 하는대로 자신은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한편 전화를 끊은 배웅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었다.
실내를 서성이던 배웅대는 구석에 있는 정수기 물을 한 컵 받아 마셨다.
만나긴 해야 한다.
결코 전화를 받지 않는다든가 하는 저열한 수법으로 통할 상대들은 아니다.
권악수는 시간을 끌면서 상대가 지치길 기다린다.
건네 줄 수 있는 액수를 얼마를 생각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판단하기에 천만 달러는 결코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십억 달러에서 천만 달러’
누구 머리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액수다.
한마디로 거저먹겠다는 뜻이다.
배웅대는 핸드폰을 들고 옷걸이에 있는 윗도리를 걸쳐 입었다.
일단 만나서 얘긴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때 마침 중공업 관리이사 윤중철이 오고 있었다.
“어딜 가?”
나이차는 있으나 자신과 막역한 사이다.
윤중철은 차나 한 잔 얻어먹기 위해 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배웅대는 급한 손님이 찾아와 오늘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내일 한 잔 사죠.”
“아이 그 사람, 오랜만에 입 좀 풀려고 했는데.”
윤중철은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다.
올해 예순여덟으로 천왕그룹 창업멤버중 한 명이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진즉 옷을 벗었을 테지만 젊은 시절 권철악 회장의 온갖 지저분한 일은 도맡아 처리했고 입이 무거워 아직까지 현역으로 남아 있다.
운동삼아 출근할 뿐 하는 일은 그다지 없고 그러다 보니 마음이 맞는 직원들 방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며 바둑도 두고 커피도 얻어 마시며 소일한다.
‘무슨 일이지’
배웅대를 잘 안다.
심지가 깊고 좀체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책사(策士)형 인물이다.
젊은 시절 권철악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윤중철이 있었다면 지금 권악수 곁에는 배웅대가 있다.
어쩌면 성격이 비슷하여 더 마음이 가고 뜻이 맞는지도 모른다.
‘거참!’
보기 드물게 배웅대 얼굴이 굳었다.
배웅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배웅대가 나타나자 보안요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지만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로비를 걸어 나갔다.
퇴근길도 아닌데 도로에는 차가 꽉 막혔다.
천왕그룹 사옥터를 짓는데 당대에 내로라 하는 풍수학자를 동원했다고 들었다.
음택(산소)은 후손을 발복케 하고 양택(집)은 현세의 자손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 권철악 회장의 지론이다.
악인은 정해져 있고 선인 역시 타고난다는 것에 따라 철저히 관상을 중시하며 직원을 뽑는다.
그래서 이만큼 융성하고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을까.
신호가 바뀌고 배웅대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걸어갔다.
흘긋!
2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밖에서는 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없는 유리창이어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아직까지 회사 앞에 있어도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커피숍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귀에 익은 음악이 시선을 끌었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반, 이른바 라 캄파렐라가 흘러나온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파가니니의 대표적인 곡으로 대학시절 기숙사 방에서 이어폰을 통해 자주 들었었다.
지금의 아내도 지휘자 ‘마시모 지네티’ 파가니니 음악 내한 공연 관람을 갔다가 거기서 만났다.
당시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라 캄파렐라였다.
음악 소리에 발을 맞추듯 걸어가며 주위를 보았는데 창가에 앉은 두 사람이 보인다.
낯익은 얼굴들이다.
카이로에서 만났던 권총수와 오민철이란 사내다.
오민철은 주춤 하며 일어났으나 권총수는 의자에 앉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배웅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앉으세요!”
오민철이 자리를 권했다.
권총수는 맞은편에 앉은 배웅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바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왔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물론입니다.”
권총수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며칠을 더 기다릴까요?”
배웅대는 고개를 들었다.
오묘한 질문이다.
이쪽에서 기다려 달라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원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끝나도 돈이 입금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느낌도 온다.
“권악수 사장님에게 전해 주십시오. 모처럼 한국 땅을 밟았으니 잠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떠나기 전까지 잘 해결되길 원한다고 말입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십 일 정도 묵을 예정입니다. 혹시 내 전화번호를 잊었을까 싶어.”
그러면서 A4용지를 내 밀었는데 매직으로 굵직하게 쓴 핸드폰 번호가 있다.
“밤이건 낮이건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권총수와 오민철은 커피숍을 걸어 나갔다.
배웅대는 두 사람이 떠난 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A4 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 곳이 서늘해진다.
급작스런 두근거림은 두려움이 밀려오기 전에 신체가 보이는 반응이다.
즉 권총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신의 몸이 미리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길게 한숨을 쉰다.
그렇게 배웅대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권악수는 바깥에서 일을 보고 곧장 집으로 퇴근한다는 연락이 왔다.
회사로 들어오지 않으니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상무님!”
맞은편 복도에서 기획팀장 윤설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 역시 퇴근하는 모양인데 올해 서른다섯으로 뛰어난 역량으로 입사 7년 만에 팀장을 꿰찬 과감한 여자였다.
엘리베이터는 먼저 도착한 배웅대가 눌렀다.
“언제 소주 한 잔 해요?”
“좋은 일 있나봅니다?”
“아니 저보다는 상무님 아닌가요? 엔터프라이즈호 사건이 깨끗하게 해결됐으니 말이에요.”
듣고 보니 맞다.
술을 살 사람은 자신이다.
“언제 자리 만들까요? 윤 팀장이 오케이 하면 난 바로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말 시간 내요?”
“감히 뉘 앞이라고.”
윤설영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내일 저녁 어때요. 흑돼지 껍질 집.”
흑돼지 껍질 집은 40년 역사를 가진 배웅대의 단골 술집이다.
“콜!”
“콜!”
두 사람은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상무님 얼굴이 불편해 보여요?”
눈치 빠른 여자답게 금세 알아차린다.
배웅대는 얘길 할까 말까 망설이다 자신과 불편함 없이 소통되는 동료라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했다.
병은 떠들수록 치료약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건은 배웅대에게 지독한 병이다.
당면한 절대 과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이 없었다.
“장난 아니네요?”
윤설영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쪽에서 성공하지도 못할 것을 알고 그냥 한 번 불러 본 액수일 수도 있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쨌든 성공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긴.”
“국제적으로 인질 구출하는데 십억 달러가 오간 거래가 있었나요?”
“이런 일은 당사자들끼리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알 수는 없죠. 여러 소문이 떠돌기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고, 7년 전 일본의 미쓰비시에서 콜롬비아 반군에게 잡힌 자사직원 다섯 명을 구출하는데 이천만 달러가 거래됐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오천만 달러를 줬더군요.”
“모른 체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씨익 웃었다.
“거의 짐승수준의 사람들이라고 들었어요. 말이 민간 보안업체이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행되는 살인과 약탈 성폭행은 물론이고 마약밀매까지 완전 무법자들이라더군요.”
윤설영은 자신이 직접 겪은 사람처럼 말했다.
쨍!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두 사람은 일 층에서 내렸다.
윤설영은 배웅대가 걱정이 되는 듯 쉽게 자기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일 봐요”
배웅대가 웃으며 지나가려 하자 윤설영이 말했다.
“그들은 쓰레기들이에요.”
절대 줄 필요가 없다는 분명한 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