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돈 내놔(1)
카이로는 조금씩 밤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잠에 빠져 있었다.
권총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태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권총수는 결가부좌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전의 내기가 서서히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냉수를 마시면 목구멍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데 지금 그와 비슷한 느낌을 얻은 것이다.
스으으으!
경락을 흐르는 진기는 힘이 넘쳤고 이번 작전으로 입은 크고 작은 몸속의 상처를 말끔히 씻으며 임맥을 관통한다.
이어 독맥으로 들어선 진기는 백회와 용천을 부드럽게 흘러 통과했다.
가끔씩 몸이 불편한 지점에서는 뜨끔 할 만큼 아픔이 전해져 왔지만 큰 내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무난한 흐름이다.
일주천, 즉 임맥과 독맥을 한 바퀴 도는데 대략 20여분의 시간이 소모된다.
물론 부상이 심할 경우에는 시간은 한없이 길어지고 때로는 도중에 멈춰야 할 때도 있다.
20여분에 걸치는 일주천의 시간이란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극양의 기운은 들숨과 날숨으로 빨아 삼키며 권총수는 계속 운기조식을 이어갔다.
후우!
흐흡!
후!
절제된 호흡은 하루 중 가장 강력한 기운을 뿜어낸다는 태양의 기운을 끝없이 빨아들였다.
팟!
권총수가 눈을 떴다.
3주천, 딱 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몸 상태는 말끔하고 고장 난 부분은 없지만 마음 한곳이 끝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비렌드라.
포탈라궁에 그의 전사소식을 전해야 한다.
천여명이 넘는 많은 승려들로부터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비록 버려진 아이였지만 누구 못지 않게 따뜻함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혼자 생각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그는 자선과 자비에 대해 배웠다.
이웃을 돕고 나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부처라고 배운 것이다.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영국의 구르카 용병이 되어 복무를 했고 제대 후 본격적인 자선의 실천에 나선 것이다.
‘옴 마니 밧메 훔’
권총수는 나직하게 티벳불교의 진언을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지?”
언젠가 비렌드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비렌드라는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니라는 뜻이었는데 권총수가 계속 알고 싶어하자 설명을 해주었다.
천수경이란 불경에 나오는 진언(眞言)이다.
진언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냥 아름다운 말, 지혜로운 뜻을 가진 불교의 주문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 주문을 자주 외우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 날수 있다.
옴마니 밧메 훔(唵麽抳鉢銘吽)
옴마니 밧메 훔(唵麽抳鉢銘吽)
옴마니 밧메 훔(唵麽抳鉢銘吽)
권총수는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 진언을 암송하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무한한 자비와 지혜를 얻는다는 비렌드라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극락왕생이다.
그리고 덧붙여 환생을 한다면 다시 자신의 벗으로 와주길 소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총수야!”
오민철이 옥상에 나타났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오민철이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이 안 왔는데.”
“누가 그래?”
“조금전 버홀터 지사장한테서 전화가 왔어. 이곳 카이로 은행 다인코프 계좌에 확인을 했는데 송금 된 사실이 없대.”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적은 돈이 아닌데, 며칠 더 기다려 보죠 뭐.”
권총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옥상을 내려갔다.
오민철은 내려가는 권총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다인코프 주가는 또 한 번 수직상승을 했다.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이제 아카데미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생겼다.
급기야 메몰라는 성과급으로 알파팀 전원에게 일 인당 백만달러 씩을 지급했다.
다인코프 말고 또 한 곳의 회사의 주식이 폭등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천왕중공업이었다.
이번 사건 해결로 천왕중공업을 포함한 천왕그룹 계열사 주가가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시가총액 2위인 KS 하이닉스와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사장님 카이로 전화인데 돌릴까요?”
인터폰으로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건이 해결되면서 대책본부도 해체 되었으므로 이제 카이로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없다.
팟!
그러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권총수였다.
상황이 종료되고 보름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전화를 걸어올 때라고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천왕중공업 권악수입니다.”
“돈이 오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권총수였다.
“하하하! 난 또,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십억 달러는 쉬운 일이 아니죠.”
“애초 약속이 열흘 아니었습니까?”
작전이 성공한다면 열흘 이내에 돈을 입금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흘 드리죠.”
전화는 끊어졌다.
“이런 싸까지 없는 개자식.”
빠아악!
수화기를 내동댕이쳤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요란한 소리에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들어섰는데 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슬며시 돌아나갔다.
휘익!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책상위에 있던 노트북을 들어 던져 버렸다.
“사흘을 준다고, 네놈이 뭔데 나한테 협박을 하는 거야.”
뻥!
이번에는 소파를 걷어찼다.
“사장님!”
그때 여비서의 연락을 받은 배웅대 상무가 들어섰다.
배웅대 눈이 커졌는데 아직까지 권악수가 저토록 화가 난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와장창!
권악수는 창문을 거칠게 열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배웅대는 권악수의 화가 가라앉도록 잠시 기다렸다.
“죽일놈!”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권악수는 커다란 목소리로 권총수가 전화를 걸어와 협박을 했다고 했다.
상당한 모욕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때 여비서가 들어와 여기저기 튀어 날아간 수화기와 노트북 파편을 주워 담았다.
권악수는 소파에 주저앉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껐고, 자잘한 파편을 빗자루로 쓸어 치우고 나간 여비서가 다시 들어와 물었다.
“상무님 차 한 잔 드릴까요?”
여비서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살짝 웃으며 묻는다.
“괜찮습니다.”
탁!
문이 닫히고 잠시 사장실에 정적이 흘렀다.
“어쩌시렵니까?”
“어쩌라뇨? 몰라서 묻습니까?”
“정말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배 상무.”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십억 달러가 많긴 하지만 이미 뱉은 말입니다. 주기로 했으면 주십시오.”
“이상하군요. 평소 내가 알던 배상무 같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내 마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십억 달러를 꼭 지불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뿐입니다.”
“천만 달러라면 한번 고민해 보겠지만, 병신새끼.”
권악수는 씨익 웃었다.
카이로 다인코프 사무실 분위기는 어둡다.
이번 작전에 참여했던 권총수를 포함한 나카아먀, 오민철, 벤자민이 앉아 있었다.
버홀터는 외출중인데 지금 카이로 천왕중공업 지사를 찾아간 것이다.
“처음부터 기분 나쁘게 생겼더니 끝내 말썽이구만.”
오민철이 투덜거렸다.
“만약에 끝까지 버티면서 안주면 어떡하지?”
나카야마가 우려스런 표정을 했다.
“우린 살았으니 재수 옴 붙었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죽은 비렌드라와 팀원들은 어떡해?”
그러면서 말없이 오래된 뉴스위크지를 보고 있는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권총수는 지금의 상황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잡지만 보고 있었다.
딸칵!
문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버홀터가 들어섰다.
버홀터는 곧장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더니 절반쯤 마셨다.
“크흐!”
트림을 하며 다가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권총수를 제외한 모든 시선이 버홀터에게 모였다.
버홀터는 유일하게 시선을 모으지 않고 잡지를 보고 있는 권총수를 향해 말했다.
“장난 아닌데.”
“못주겠대요?”
벤자민이 물었다.
“통화가 안돼. 천왕중공업 카이로 지사장이 계속 전화를 하는데도 받지 않아.”
“전화 차단 시켰네.”
오민철이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아 그 자식 처음부터 불쾌하더니 끝까지 불쾌하게 만드는구만.”
팔랑!
권총수는 아무런 반응 없이 뉴스위크지만 읽었다.
탁!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잡지를 덮은 권총수가 물었다.
“연락이 안 된다고 그랬습니까?”
“의도적인 것 같아. 비서진들이 완전히 차단 한 모양이야.”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채권자가 받으로 가야죠 뭐. 형 한국 갈 준비해.”
“한국가서?”
“가서라니, 돈 받으로 가는 거지. 우리는 그렇다 쳐, 비렌드라와 떠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상해줘야 해. 돈이 들어가면 가족들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되겠지.”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겸사겸사 해서 휴가까지 다녀오죠 뭐?”
버홀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권총수 일행이 사무실을 나가고 혼자 남은 버홀터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국이 한바탕 시끄럽게 생겼군’
길게 연기를 뿜었다.
‘그나저나 십억 달러란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 낼 수 있을까’
그것 또한 궁금하며 흥미롭다.
‘세상에 싸움 구경보다 더 재밌는건 없다고 했는데.’
가벼운 미소가 얼굴을 덮었다.
* * *
포드 익스플러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나카야마가 핸들을 잡았는데 두 사람을 공항에 바래다주는 길이었다.
권총수와 오민철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각자 핸드폰 게임에 빠져 있었다.
“민철!”
“왜 쪽발아.”
“줄까?”
“주다니 뭘 줘?”
오민철은 게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으로만 대답했다.
“돈 말이야.”
그러자 하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룸미러의 나카야마를 바라보았다.
“개자식들. 안주면 어떡할 건데.”
그러면서 옆에서 역시 게임에 빠져 있는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은 한국 재계서열 1위 기업인데 우리가 무슨 수로 받아 내느냐 이거야.”
“안주면 권악수 죽고 나죽는 거지.”
나카야마의 의문에 오민철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우리가 왜 죽어?”
권총수가 게임을 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치사한 자식, 동네 슈퍼 외상값도 아니고.”
오민철이 인상을 쓰며 게임중인 권총수를 바라보더니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
“그만 좀 해. 지금 게임할 정신이 있느냐고?”
“왜 이래? 조금 전까지 형도 했잖아.”
“고민 좀 해야 할 것 아냐. 돈을 받아 낼 작전은 세웠어?”
권총수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건 말보로 레드였다.
딸칵!
권총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창문 유리를 내렸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돈 받는데 무슨 계획이 필요해. 찾아가 달라 그러는 거지.”
“말로 하니까 안 주잖아.”
“권씨들 매너가 좀 더럽긴 해도 영리하지 못해서 내 놓을 거야.”
권총수는 조금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불편한 감정에 뱉은 말이지만 영리하지는 못하다는 건 틀리다.
오민철이 지켜본 권씨들은 교활했고 거래에 능수능란했으며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는 망설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오늘을 위해 누구보다도 무자비하게 살아왔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타인의 피와 눈물을 가장 많이 빼낸 족속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권총수의 말이었다.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 자리가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권총수는 크게 긴장해 보이지 않는다.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긴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이 권씨이니 누구보다도 그들 속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