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29화 (329/651)

제329화: 지키지 않는 약속(3)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김부민은 권악수 뺨에 묻은 자신의 립스틱 자국을 휴지로 닦아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에요?

뭐가 어떻게 되냐는 듯 권악수가 돌아보았다.

“며칠 전 최 이사님이 그러시는데 돈의 규모가 크다던대요? 성공 댓가?”

“아 난 또.”

권악수는 빙긋 웃었다.

입 꼬리를 말려 올리는 것은 상대를 무시할 때 짓는 특유의 버릇이다.

“돈이 썩었나?”

“설마 주지 않겠다는 거에요? 얼만데요?”

“십억!”

“십억이면 뭐 적절한 것 아닌가요?”

“달러.”

“십억 달러요? 그런 미친놈들.”

김부민의 눈이 커졌다.

“십억 달러면 도대체 우리 돈으로 얼마야.”

“천원씩만 잡아도 일조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양형모가 말했다.

“웃겨 진짜.”

김부민은 어이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권악수를 보았다.

“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냥꾼들이 나섰을 것이고?”

“내가 앞서 말하지 않았나. 돈이 썩었냐고”

“호호호호.”

김부민이 갑자기 소릴 내어 웃었다.

무척 즐겁다는 듯 한참을 웃더니 오른손으로 권악수의 어깨를 탁 쳤다.

“당신 정말 대단한 남자에요.”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이나?”

김부민을 바라보는 권악수 눈이 이글거렸다.

“작년 우리 천왕중공업 순 이익이 1조2천억이었어. 날 더러 일 년 뼈빠지게 일해서 벌어 들인 돈을 통째 놈들 아가리에 넣으라고?”

씨익!

권악수의 입술이 가늘어진다.

그건 웃음이었다.

입꼬리로부터 시작된 웃음은 삽시간에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는데 운전을 하는 양형모가 소스라쳤다.

순간적으로 권악수의 눈 코 귀 입 귀를 합친 이른바 일곱 개의 구멍(七孔)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대신 얼굴이 아닌 다른 모습이 있었다.

방상시(方相氏)였다.

양형모의 할머니는 무당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많은 굿을 보았는데 그중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할 때 쓰는 무서운 탈이 있었다.

할머니는 곰의 가죽을 덮어쓰고 황금의 네 눈을 갖고 있는 방상시라는 탈을 쓴다.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온 마당을 뛰어다닐 때면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불 속으로 숨었다.

지금 권악수의 얼굴이 착각인지 모르지만 당시 할머니가 썼던 방상시 탈로 변한 것이다.

‘으음’

그건 잔인하게 단련된 욕망이었다.

십억 달러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지불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비아냥인 것이다.

부우웅!

차는 빠르게 남산 터널을 속으로 사라졌다.

천왕그룹 사옥 앞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입구 계단 위로 연설용 탁자 한 개가 놓여 있었고 안쪽에서 최왕창 이사를 포함한 간부들을 대동하여 권악수가 나타났다.

카메라 후레시가 터지기 시작하고 연단에 선 권악수는 사진 찍는 기자들을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해주었다.

눈을 맞추고 손을 들어 보이며 가벼운 인사를 건네 권악수는 마이크를 좀 더 세웠다.

“퇴근들 하셔야 할텐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유있는 한 마디에 좌우로 서 있던 간부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알고 계시겠지만 그동안 국민들을 밤잠 설치게 했던 우리회사 엔터프라이즈호 선원 모두를 구출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단 한 명도 다치거나 희생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린 도전을 했고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권악수는 단호히 대답했다.

“구출작전에 용병들이 투입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경험이 풍부하고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들과 접촉했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다치거나 희생되는 사람 없이 전원 무사히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작전을 요구했죠.”

“혹시 이번 일에 개입한 용병들이 미국 제일의 민간보안업체 아카데미 아닙니까?”

권악수는 기자를 향해 빙긋 웃었다.

“계약조건으로 인해 대답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원들과는 연락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장과는 이미 통화를 끝냈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국민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최왕창 이사의 표정이 굳는다.

전혀 없는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직 선장은 한국 정부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시끄러워 질 것인데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용병들은 프로 군인인데 몸값은 얼마나 지불했습니까?”

“이 역시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분명한건 우리 회사는 어떤 댓가와 희생을 치러서라도 선원들을 기어이 데려와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고 신은 우리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선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역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신변보호를 위한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사장님, 선원들 귀국은 언제입니까?”

“무자헤딘에서 즉각 보복을 천명했다는데 맞는 얘기입니까?”

권악수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걸어갔다.

보안요원들이 일렬로 서서 기자들의 사옥 출입을 막았다.

권철악은 술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가족들을 불러 생일 저녁을 같이 했지만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늘 세 번째 소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었고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마치 핏물속에 담갔다 꺼낸 듯 보였다.

“아버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권악수가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다.

“형님 그만 하시죠.”

바로 아래 동생이자 전직 대통령인 권철태가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맨손으로 천왕그룹을 대한민국 일등기업으로 키운 나 권철악이야. 이까짓 소주 석 잔에 내가 흔들릴 줄 알아.”

“누가 흔들린다고 했습니까. 형님 나이를 생각해야지.”

막내인 백서그룹 회장 권철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악수 넌 뭐하니? 형님 모시고 들어가거라.”

“예! 숙부님!”

권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권철악을 부축했다.

“놔 이놈아. 더 마실수 있다.”

“많이 드셨어요.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석 잔은 작은 것이지만 아버님에게는 많은 양입니다. 김박사가 갑작스런 알콜 섭취는 좋지 않다고 조금 전 전화 했습니다.”

“어떻게 김박사가 내가 소주를 마신 줄 알아?”

“내가 걱정이 되어 물어봤습니다. 큰일 난다고 말리라고 하더군요.”

“헛헛!”

갑자기 권철악이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아비가 걱정이 되어 김 박사에게 물어봤다고?”

몹시 좋은 모양이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권악수의 마음 씀씀이가 기쁜 모양인지 입가에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알겠다. 우리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래 그만 마셔야겠구나.”

권철악은 권악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장방형의 긴 식탁에 앉은 30여명 가까운 가족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아냐. 즐겁게들 놀아. 어 기분 좋구나.”

권악수는 권철악의 오른손을 쥐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끝에 권철악의 방이 있는데 문을 열어주었고 안으로 들어간다.

단촐하다.

벽에는 권악수에게는 조부모가 되는 흑백의 사진 두 개가 걸려 있고 오른쪽 벽에는 고향 달성농협에서 나온 글씨 굵직한 달력이 걸려있는 것이 방안에 걸려 있는 것의 전부였다.

“쉬십시오.”

권악수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히고 돌아섰다.

“악수야!”

문을 나가려는데 권철악이 불렀다.

권악수는 몸을 돌렸다.

“십억 달러 말이다.”

권철악은 탁자 위에 올려 있는 컵 속의 냉수를 단숨에 비웠다.

“어찌할 셈이냐? 성공하면 십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고 말했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십억 달러를 주기로 했죠.”

“내 얘긴 약속을 지킬 것이냐는 것이다.”

“날 죽이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닫는다.

“헛헛! 죽어도 못주겠다는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킬 것 지켜가며 기업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뺏고, 죽이고, 속이며 하는 것이다.”

권철악은 흐뭇한 표정으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생일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문 앞으로 나왔다.

골목은 권씨가문의 사람들이 타고 온 고급 차량으로 가득 했다.

권악수는 부인 김부민과 나란히 운전기사 양형모가 서 있는 밴틀리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악수야.”

막 허리를 구부리고 차에 타려는데 누군가 불렀다.

권악수 상체를 세워 고개를 돌렸는데 아버지 권철태가 잠깐 보자는 듯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당신 먼저 차에 들어가.”

아내를 태워놓고 권악수는 부친 권철태를 향해 걸어갔다.

친아버지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다.

“예 아버지!”

“형님과 무슨 얘길 나눴냐?”

“별 것 없어요.”

권철태가 이마를 찡그렸다.

자기 아들이지만 가끔은 너무 벅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내가 야망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거칠게 달리는 것 까지는 나무랄 것이 없다.

문제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능력과 후천적으로 개발된 기술이 있다.

그 두 가지가 통제할 수 있는 야망이면 위험하지 않으나 넘어서버리면 과욕이 된다.

과욕은 자신을 패망으로 몰아가는 지독한 덫이고 반드시 무리수를 둔다.

어차피 형님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분위기 또한 천왕그룹의 차기 총수가 될 가능성은 높으며 재계 관계자들 모두 권철악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키운 자식이다.

아무도 모르는 부모만이 아는 습관이 있는데 권악수의 단점은 욕심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약속을 제때에 지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장사꾼은 거래가 분명해야 한다. 애비 간다!”

탁!

부친이 문을 닫았고 검정색 벤츠가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장사꾼은 거래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아직까지 자신의 비즈니스에 결함이 발생하거나 사고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파팟!

돌연 두 눈을 빛내다.

번개처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 가지 거래가 있었다.

그건 다인코프 용병들과 약속한 십억 달러였다.

‘설마!’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권력의 비정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인물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인정사정없는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설마 십억 달러를 반드시 지불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무슨 얘기에요?”

차에 타자 아내 김부민이 물었다.

“이상한 얘길 하는데.”

권악수는 조금 전 아버지 권철태가 한 얘기를 말해주었고 아내 김부민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부우웅!

차는 골목을 빠져나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전 세계가 들끓었다.

다인코프소속 용병 알파 팀이 무자헤딘에게 납치된 한국엔터프라이즈호 선원들을 구출했다는 것이다.

선원들 모두 약간 수척하고 오랜 구금생활로 지쳐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그리고 뉴스에는 어김없이 한 사내가 등장했다.

‘사막의 흑새’

그는 항상 다인코프가 일궈낸 수많은 작전의 선봉에 있었다.

피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으며 소리없이 접근하여 정확히 목표물을 제거한 뒤 유유히 물러난다.

그를 따르는 팀원들은 명령이 아닌 부탁, 지시가 아닌 협조를 요청하는 그의 지휘전술에 경의를 표한다.

신문과 방송 모두가 극찬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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