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지키지 않는 약속(2)
권총수는 지면을 보았다.
알밤 정도 되는 조그만 돌멩이들이 지천이다.
한 주먹 주워 적엽비화의 수법으로 돌멩이를 날리면 제압하지 못할 건 없다.
문제는 쉰 명이라는 숫자였다.
양손 가득 돌멩이를 거머쥔다 해도 20개가 어렵다.
그래서 스무명을 죽인다고 하면 나머지 서른 명으로부터 총격을 받을 것이다.
슥!
스으윽!
일단 돌멩이를 쓸어 모았다.
최악의 경우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자신이 20여명을 책임지고 그 사이 팀원들이 나머지 30명과 교전을 벌인다.
물론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겠지만 선택의 방법은 없다.
그때 멀리서 자동차 라이트가 비췄다.
자동차가 나타나자 소령이 명령했다.
“5분대 공격준비.”
그러자 열 명의 사내들이 재빨리 뒤로 빠지더니 동네로 들어오는 길 좌우로 엎드렸다.
공격자세로 들어간다는 건 다가오는 차량이 이들과 어떤 관련도 없다는 것으로 봐야 했다.
이 밤에 무슨 차량이 이런 오지로 들어오는 것일까.
비포장 길인데도 다가오는 차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차가 다가오면서 모두가 사격자세를 취했는데 한 명의 군인이 길 한가운데를 막으며 소리쳤다.
“정지!”
차가 멈추며 먼지가 밀려왔다.
“라이트 꺼!”
탁!
라이트가 꺼지고 주위는 어둠에 쌓였다.
딸칵!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놀랍게도 베레모를 쓴 군인이었는데 어깨에 별을 달고 있었다.
그러자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이 깜짝 놀라며 멈칫 했다.
“지휘관이 누군가? 난 어바시 장군이다.”
어바시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령이 총알처럼 달려와 힘차게 거수경례를 했다.
“소령 만도르입니다.”
어바시 장군이라는 말에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군인들도 재빨리 총을 내렸다.
어바시는 파키스탄 최정예 SSG 사령관이다.
정확한 이름은 파키스탄 육군 특수 임무단.
SSG는 파키스탄의 네이비 씰이라 할 만큼 최정예이며 여단 병력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사령관 어바시 준장은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까지 복무하다 미국의 네이비 씰로 1년간 전투 전술 훈련 파견을 갔었다.
그곳에서 일 년동안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치고 귀국하여 네이비 씰의 부대전술을 그대로 SSG에 접목시킨 인물로, 현재는 사령관으로 부대를 통솔한다.
그 보다 계급적으로 높은 장군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어바시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없다.
파키스탄의 대통령 아리프 알비의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구축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건 독자적인 것 보다는 윗선인 대통령의 뜻일 가능성이 높다.
보편적으로 국내 사건도 아닌 국제적으로 굵직한 이런 사건은 군 사령관 혼자 해결하고 처리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만도르 소령은 어바시 장군 한 발 뒤에 붙어서 질문이 있으면 즉각 브리핑하고 대답할 자세를 갖추었다.
“사막의 흑새가 누구요?”
그러자 권총수는 바닥에 엎드린 채 오른 발을 들었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건 적에게 잡힌 포로들의 동작이다.
“일어나시오.”
권총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멈칫!
권총수 뺨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을 발견한 어바시가 깜짝 놀랐다.
어바시 장군은 길게 숨을 한 번 들이 마시더니 나머지 팀원들에게도 일어날 것을 지시했다.
팀원들 모두 일어났는데 표정들이 딱딱해 있었다.
그들 모두 만도르 소령을 쏘아보았는데 금방이라도 소총으로 갈겨 버릴 것 같았다.
“잠시나마 불편하게 한 점 미안하게 생각 합니다. 절차와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을 어깨에 달고 있는 장군이 사과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팀원들의 굳었던 얼굴 표정들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맥보란씨의 전화를 받았소.”
권총수는 놀라지 않았다.
만도르 소령의 강압적인 행동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바시 장군이 나타나면서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이뤄졌다는 걸 눈치 챘다.
그때 어둠을 가르며 헬리곱터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권총수는 고개를 돌렸는데 불빛을 깜빡이며 눈 덮인 설산을 날아오는 두 대의 헬기가 있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며 권총수는 러시아 Mi-17수송용헬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헬기는 고도를 낮추면서 천천히 내려앉았는데 대형 수송기답게 엄청난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헬기에서 무장 군인 십 여명이 내려 다가오더니 어바시 장군에게 거수 경례를 했다.
“즉각 탑승시키도록.”
어바시 장군의 지시에 군인들은 두 대의 헬기에 엔터프라이즈호 선원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자세를 낮추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헬기에 오르려던 선장 임선근이 다가왔다.
파파팡!
헬기 로터가 일으키는 바람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 거렸다.
“당신 이름도 모르고 가면 안될 것 같습니다.”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권총수라고 합니다.”
“아마 오늘 이후 내 인생에 당신은 가장 큰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 하길 빕니다.”
권총수는 임선근의 손을 굳게 잡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눈빛은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임선근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더니 재빨리 헬기를 향해 뛰어갔다.
두두두둥!
두 대의 헬기가 떠올랐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치료하지 않아도 되겠소?”
이미 혈도를 눌러 지혈했기 때문에 피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고 크게 문제될 상처까지는 아니었다.
권총수는 자신의 개머리판으로 때린 파키스탄 군인을 바라보았다.
군인은 재빨리 눈을 내리 깔았는데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소령!”
“예 장군님!”
“난 그대의 조치가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제 그만 철수해도 좋소.”
“돌아가겠습니다.”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선 만도르 소령은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승차!”
군인들이 일제히 두 대의 트럭에 올랐다.
부르릉!
잠시후 트럭 또한 병력들을 싣고 떠났으며 남은 건 어바시 장군이 타고 온 군용 지프와 운전병 뿐이다.
“사실 아슈칸이 우리 파키스탄 국내에 숨어 있다는 소식에 굉장히 불편했고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오해를 받았소. 우리 정부가 무자헤딘을 돕고 있다고 말이오. 다행히 다인코프에 의해 우리 대통령께서는 홀가분해졌다면서 기뻐했소.”
어바시 장군이 환하게 웃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작전중 희생된 분들에게도 알라의 풍성한 도우심이 내리실 것입니다.”
척!
그러면서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고 지프로 돌아갔다.
부우웅!
지프는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동차의 라이트가 사라지고 주위는 어둠에 덮였다.
* * *
퇴근길 정체가 심했다.
권악수는 검정색 밴틀리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는 나이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있었다.
전 KMC 9시 앵커였던 김부민이다.
훤칠한 키에 뛰어난 미모를 갖춘 재원으로 제일대 출신이다.
오늘 밤 큰 아버지이자 양부인 천왕그룹 회장 권철악의 생신으로 권씨일가 모두가 큰 집에 모이기로 했다.
“차가 너무 막히는데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면서 운전기사 양형모가 말했다.
“노인 성질 더러운데, 차 돌려.”
부우웅!
차는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현역에서 빠져 나올 때가 된 것 아닌가요?”
침묵하고 있던 아내 김부민이 말했다.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도 미모는 여전했고 그 흔한 눈가 주름살 하나 없다.
오히려 처녀 때 보다 더 늘씬해진 몸매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후후후!”
갑자기 권악수가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그 영감이 물러 날것이라고 봐?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앉아 있을 걸.”
“그 자리 분명히 준대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큰 딸에게는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을 맡겼고 작은 딸은 호텔을 끌어가고 있었다.
두 여자 모두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해도 매년 마다 십 퍼센트 초반 대 성장은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남은 주력들이다.
천왕전자를 비롯해 천왕바이오로직스, 천왕SDI등 핵심에 대한 언급은 없다.
물론 언론이나 재계 관계자들과 만나서는 천왕그룹의 뒤는 내 아들 권악수가 이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재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도 권악수 정도면 국내재계 1위 기업을 충분히 끌어갈 역량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언론에서는 조금씩 천왕그룹의 경영권이 권악수에게 집중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보도를 해댄다.
그건 사실이다.
최소한 겉으로는 천왕그룹의 상당 부분이 권악수 손아귀에 들어 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빈껍데기인 것이다.
아내 김부민은 이것이 불안한 것이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천왕은 내거야.”
권악수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주지 않으면 뺏는 방법도 있으니까.”
뺏는다는 말에 아내 김부민이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고, 룸미러로 보는 운전기사 양형모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지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액정을 보던 권악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배 상무 아냐?”
배대웅은 카이로 남아 대책본부장 원출도를 돕고 있다.
“배 상무님!”
“사장님.”
굉장히 떨리는 목소리다.
“끝났습니다. 이제 마음 놓았습니다.”
“뭔 얘깁니까?”
“아직 뉴스에는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조금 전 엔터프라이즈호 선원들 전원이 무사히 파키스탄의 모처로 이동했다는 소식입니다.”
“선원들이 돌아왔단 말입니까?”
“작전이 성공한 모양입니다. 사막의 흑새가 전원 구출했다는 정도까지만 우리도 소식을 받았습니다.”
“차 세워.”
권악수가 소리쳤고 차는 급히 핸들을 꺾어 길가에 멈췄다.
끼이익!
“계속 말해보세요.”
“구출했다는 것까지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선원들은 어디 있는 거요?”
“파키스탄 정부가 통제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정식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진짜요?”
“물론입니다. 사장님.”
“이런, 알겠소. 수고했어요.”
전화를 끊자 김부민이 재빨리 바라본다.
“선원들을 구출했단 말이죠?”
“아아! 됐어. 이제 된거야. 정말 사람 미칠 노릇이었는데.”
이번일의 경과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으로 판단했기에 더욱 마음고생이 심했고 심혈을 기울였다.
지이잉!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는데 이번에는 미래전략실장 차업동이었다.
“차실장!”
“어떻게 기자들이 알았는지 난리입니다. 잠깐 몇 마디 던지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칫 회장님 댁으로 달려들면 시끄러운 식사가 될텐데.”
권악수의 이미가 좁혀졌다.
기자들 찾아오는 걸 가장 싫어하는 권철악이다.
“그것도 그렇군. 알았어 20분 후쯤 회사 앞으로 갈 테니 자리 준비해요.”
전화를 끊은 권악수는 야릇한 표정을 했다.
기자회견도 짧게나마 하는 것이 괜찮을 듯 싶다.
스르르!
창문을 내렸다.
지나가는 사람 몇이 빤히 바라보았는데 누군지는 모르는 듯 보인다.
“으아아아!”
권악수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소릴 질렀다.
아들이라고 하지만 양아들이라는 것이 항상 발목을 잡고 있었다.
권철악의 두 딸들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 알고 있고 사위들 역시도 틈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 일 잘 해결해 봐’
이번일의 결과에 따라 향후 천왕그룹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권철악의 말이었다.
“후후후!”
선원들 구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실패하면 다인코프 용병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뒷수습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시나리오는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구출하는 편이 좀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뜻대로 이뤄진 것이다.
“여보 대단해요. 당신 정말 멋져요.”
김부민은 권악수 얼굴에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