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27화 (327/651)

제327화: 지키지 않는 약속(1)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느릿하게 내렸다.

부하인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사람이라는 것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움찔!

갑자기 몸을 떨며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제서야 권총수 등 뒤로 죽어 있는 부하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카악!

권총수는 거칠게 가래침을 뱉었다.

휙!

아슈칸은 재빨리 권총을 뽑으려 했지만 어느 한순간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권총수가 쏘아 보낸 소림의 탄지신통이 곡지혈을 점혈 함으로써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권총수는 가까이 다가가 아슈칸의 허리에 꽂힌 권총을 뽑았다.

“베레타 스톰 자동권총, 몹시 마음에 드는 녀석인데.”

드드드드!

방아쇠를 당기자 굉음을 내며 총알이 날아갔다.

딱!

더 이상 총소리가 나지 않자 권총수가 휙 한쪽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늘 아래 주저앉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딸칵!

권총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뱉었는데 마치 뙤약볕에서 일하던 농부가 그늘에 앉아 잠시 쉬는 것 같았다.

아슈칸은 꼼짝하지 못했다.

앉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알파 팀에 의해 걸어오고 있는 엔터프라이즈호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일까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더니 실소를 지었다.

일이 너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긋나버리면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것과 같은 그런 심정인 것이다.

“저기...물 좀 마셔도 되겠소?”

선원중 한 명이 더듬거렸다.

“그러세요.”

오민철이 허락하자 선원들은 마을 뒤 강을 향해 달려갔다.

“휴식하며 사주 경계!”

오민철의 명령이 떨어지자 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각자 은폐 엄폐물을 찾아 엎드린 후 모두가 바깥쪽을 바라보았는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말하는 이도 없다.

작전이 끝나면 긴장이 풀어지며 입이 쉬지 않는다.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담배도 피고 먹을 걸 나누며 시끌벅적 한데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무겁다.

무려 일곱 명의 동료가 떠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슈칸은 냉철해졌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져야 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위험하지만 죽기까지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사내들은 다인코프 용병들이 분명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권총수를 흘긋 거렸는데 사막의 흑새가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갑자기 흡연 욕구가 생겼다.

슬며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는데 한 개비도 들어있지 않았다.

권총수는 아직까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권총을 빼앗은 이후 말 한 마디 걸어오지 않는다.

사람은 많은데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강으로 물을 마시러 달려간 선원들이 하나둘 오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물을 마신 선원들의 얼굴은 확실히 생기가 넘쳤다.

설산에서 내려온 깨끗한 물이기 때문에 마셔도 아무런 위험은 없다.

그때 강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오던 선원들이 하나씩 아슈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출렁거렸다.

배를 납치하고 자신들을 물건 다루듯 하며 폭력을 휘두른 테러범들의 우두머리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중 서른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다가섰다.

“나쁜자식!”

쫓아가려고 하자 누군가 소리쳤다.

“2등 항해사, 그만 두게.”

비쩍 말라버린 선장 임선근이였다.

“선장님!”

“어쨌든 우린 살았네. 나머지는 저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실 2등 항해사 정만오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선원들 모두가 피가 거꾸로 돌만큼 분노했으나 자제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을 구한 사람들이 한국군이나 미군이 아니라 용병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호르무즈해협과 아라비아해 일대를 수시로 항해하기 때문에 용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활동하는 해적들 중에는 전직 용병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이 용병시절 커다란 범죄를 짓고 경찰에 쫓기는 자들인데 무자비하다.

돈만 주면 표적이 누구든 방아쇠를 당긴다. 뉴스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하루에도 크고 작은 많은 배들이 그들에게 점령된다.

심지어는 소형어선까지 털기도 했다.

뭔가 하나라도 수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납치에서 풀려났다고 하여 아직 완전히 살아났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2등 항해사 정만오는 어금니를 깨물며 뒤로 물러나왔다.

“벼락맞아 뒈질 놈!”

정만오는 아슈칸을 향해 다시 한번 적의를 드러내고 돌아섰다.

권총수가 느릿하게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아롱바의 얼굴이었다.

슥!

권총수는 아슈칸을 향해 손짓을 했는데 옆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아슈칸이 다가오자 주저없이 사진을 내밀었다.

아슈칸은 권총수가 건네준 사진을 바라보았는데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억지로 대답할 것 없습니다.”

권총수는 사진을 가로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앉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슈칸이 일 미터 정도 떨어져 앉았다.

권총수는 담배를 갑 째 꺼내 한 개비 권했다.

아슈칸은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담배를 뽑아 물었고 자신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아슈칸은 한숨을 토하듯 연기를 내뿜었다.

“자녀가 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권총수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슈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열두 살 사내아이와 아홉 살 여자 아이죠.”

“그 나이 때는 한참 아빠를 찾는다던데?”

“당신도 아이들이 있는 모양이죠?”

“주위에 그 만한 나이의 자녀들을 두고 있는 용병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아이들도 아빠를 찾는다는 얘기였다.

아빠란 책임감 때문일까 아슈칸이 크게 숨을 내 쉬었다.

또 다시 침묵이다.

두 사람은 한 바탕 싸우고 난 친구처럼 다시 입을 꾹 닫았다.

“사진 속의 그는, 며칠 전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슈칸이었는데 아롱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열한 명의 장로들이 밤새 토론하고 표결을 했는데 6대5 아슬아슬하게 인정을 받았죠.”

아롱바가 무자헤딘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말에 권총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개인의 능력은 출중한데 지휘관으로서는 다소 모자람이 있다는 평가를 받죠. 특히 이란 정부와 너무 가깝다는 것이 조직원들의 불만입니다.”

“이란과 가까우면 좋은 것 아니오?”

“이란의 최대 적이 누굽니까.”

“미국.”

“미국의 표적이 되긴 싫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미군에 대해 공격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친 이란 노선을 견지하는 건 투쟁 목표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반대를 했던 다섯 명의 장로들을 끌어안는 것이 우두머리로서의 가장 큰 첫 숙제죠.”

“6대5라고 하면 절반가까이가 아롱바의 우두머리 취임을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그는 지금 어디있소?”

순간 아슈칸이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부딪쳤는데 아슈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잘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모른다고 하면 당신이 믿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권총수는 아슈칸의 대답을 믿는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온이 급강하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공기가 차가워진다.

권총수 일행은 돌아올 때는 강을 통하지 않고 절벽길을 걸어 서스펜스 브릿지를 건넜다.

다리를 건넌 권총수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이동했고 한 시간여 행군한 끝에 멀리 훈자 마을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다.

저 불빛도 저녁 여덟 시만 되면 모두 꺼질 것이다.

전력 부족으로 파키스탄 정부에서 강제 정전을 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대도시는 조금 덜한 편이지만 이런 깊은 산골은 여지없다.

그래서 이곳에서 영업을 하는 업소들은 대부분이 발전기를 돌려 불을 켠다.

얼마 후, 마을에 도착한 용병들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병력수송트럭 두 대가 있고 장갑차까지 보인다.

처처척!

철컥!

오십 여명의 파키스탄 군인들이 일제히 사격 자세를 취했고 러시아군 주력 장갑차중 하나인 BTR-90의 주포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각도를 지면으로 꺾는다.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를 갖췄는데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인질을 구출하고 난 뒤 곧장 버홀터와 맥보란에게 귀띔을 했다.

처음에는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할까 했지만 자신들은 엄연히 다인코프소속이었으므로 버홀터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 후 맥보란에게도 여러 가지 정보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알린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군 출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언질 받지 않았으므로 권총수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 빨강색 베레모를 쓴 소령 계급장의 군인이 손에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모두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시오.”

파키스탄 군인들은 발포 명령이 떨어지면 방아쇠를 당길 듯 권총수 일행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뭐하자는 거야?”

벤자민이 총을 들어 올리려고 하자 권총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벤자민 흥분하지 마세요. 모두 소총을 내려놓고 머리 위로 손을 올리세요. 소령의 지시에 따르세요.”

“난 못해.”

오민철이 버럭 소릴 질렀다.

“형 진정해. 여긴 파키스탄이야. 다인코프와 미국 대사관에서 우리의 활동에 대한 협조 약속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지 상황이 유동적인거야.”

권총수는 팀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소총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어 차고 있던 글록-18도 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누군가 거칠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뻐억!”

툭!

투툭!

소총을 놓은 팀원들 얼굴이 살기로 번들거린다.

“1분대 수색하라!”

소령의 명령에 맨 앞에서 무릎 쏴 자세를 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인 열 명이 일어났다.

서서쏴 자세로 알파 팀을 향해 다가왔는데 오민철이 으르렁 거렸다.

“어디다 총구 들이대고 지랄들이야. 재수 없는 자식들이.”

군인들은 오른 겨드랑이에 소총의 개머리판을 끼우고 총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누군가 아차 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이겠다는 동작이다.

“더 높이 들어.”

가장 앞선 군인 하나가 권총수를 향해 인상을 썼다.

권총수는 군소리 않고 높이 손을 들었고 군인은 빠르게 몸을 훑었다.

다다닥!

가슴에서부터 겨드랑이, 이어 사타구니부터 시작하여 발목까지 완전히 훑어 내려갔다.

“너희는 지금부터 포로다. 수색이 끝난 포로들은 바닥에 엎드린다.”

빠악!

권총수를 수색한 군인이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찍었다.

“엎드리라는 소령님 말씀 안 들리나?”

주르륵!

개머리판에 맞은 권총수의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총수야!”

오민철이 깜짝 놀라며 소리칠 때 다른 군인이 달려들었다.

퍽!

“어디서 움직여. 꼼짝 말라고 했잖아.”

역시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오민철이 빙글 돌아서며 공격하려는 순간 땅에 엎드린 권총수가 말했다.

“형 엎드려. 엎드리라고.”

오민철이 개머리판으로 자신을 때린 군인을 노려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며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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